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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review

논리로 쌓아 올린 철학자의 도망시(悼亡詩)

오홍석 기자

2022. 07. 12

여성의 종속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정미화 옮김, 이소노미아, 1만5000원

“‘자유론’은 밀이 혼자 쓴 뒷부분보다 해리엇과 함께 집필한 앞부분이 더 좋습니다.”

‘여성의 종속’을 읽으며, 대학교 수업에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읽을 당시 교수가 던진 농담이 자꾸 떠올랐다. 밀의 대표 저작인 ‘자유론’은 1859년 출간됐는데, 그의 부인 해리엇 테일러 밀은 1858년 사망했다. 최근 학계에서 ‘자유론’은 밀과 해리엇의 공동 저작이라는 견해가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밀의 다른 저작인 ‘여성의 종속’ 곳곳에서도 해리엇의 흔적이 묻어난다. 책에서 밀은 역사에 등장하는 여성들을 예시로 제시하며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리주의자답게 여성이 해방되면 증가할 사회적 효용에 대해 역설하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는 여성에 대한 지배를 당연시하는 남성을 노예주에 빗대 수치심을 주는 전략을 펼치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밀의 논지가 1851년 해리엇이 쓴 ‘여성의 해방(Enfranchisement of Women)’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책 속에는 밀이 살던 동시대 여성의 삶이 상세하게 담겨 있다. 당시 영국 사회에서 여성은 본질적으로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인식됐다. 결혼한 여성은 남편의 소유물로 여겨졌으며 남편의 허락 없이는 재산도 소유할 수 없었다. 교육의 기회는 소수의 여성에게만 주어졌고, 그나마 글을 배운 여성 중에는 여성의 종속을 정당화하는 글을 쓰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렇기에 여성의 평등을 주장한 밀의 견해는 급진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가 통념을 뒤엎고 이토록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정확히 알려진 바 없지만 밀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해리엇과의 만남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밀의 아버지 제임스 밀과 친구 제러미 벤담은 밀을 천재로 육성하기 위해 학대에 가까운 방식으로 그를 교육했다. 밀은 바깥세상으로부터 차단된 채 세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혹독한 교육을 받았다. 그 결과 성인이 되기도 전에 당대 최고 지식인이던 아버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지성을 갖추게 됐지만, 그 부작용으로 스무 살에 극심한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며 사회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처참히 무너진다.

그런 밀을 구원한 이가 해리엇이다. 밀은 해리엇의 지성에 반해 유부녀인 그녀를 18년간 곁에서 지켜봤다. 해리엇의 남편이 사망하고 둘은 결혼했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해리엇이 결혼한 지 7년 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밀은 여러 저작에 해리엇이 자신에게 끼친 지대한 영향을 기록해두었다. 밀의 급진적 여성관이 ‘탁월한 지성의 여성을 만나 깊게 교감한 개인적 경험에 따른 결과물일 수 있다’는 의심이 가는 이유다. ‘여성의 종속’은 해리엇이 죽은 지 딱 10년이 지나던 해에 출간됐다. 그래서일까. 이성으로 점철돼 있는 이 에세이는 논설적 수필이라기보다 낭만적인 애처가의 논리로 쌓아 올린 ‘도망시(悼亡詩 ·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시)’처럼 읽힌다.

#여성의종속 #존스튜어트밀 #해리엇테일러 #여성동아

사진제공 이소노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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