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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

traditional sauce

발효 과학의 결정체 미식가들이 씨간장을 찾는 이유

글 백민정

2021. 06. 01

한국 음식의 기본 양념 중 하나인 간장은 발효 과학의 결정체이자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전한 음식이라 일컫는다. 발효 기간에 따라 햇간장, 청간장, 중간장, 진간장 등 다양하게 불리기도. 그중 요즘 재조명되고 있는 씨간장은 오래 묵힌 진간장 중 가장 맛이 좋은 간장을 골라 오랫동안 유지해온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에 국빈이 방문하면 가장 귀한 재료로 내놓고, 유명 음식점들이 맛의 비결이라고 말하는 씨간장. 그 진가에 대해 알아보았다.

간장 중에 최고, 씨간장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 방한 때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던 우리의 음식이 있다. 당시 국빈 만찬 코스 메뉴는 한우 갈비구이와 독도 새우 잡채를 올린 송이 돌솥밥 반상. 재미있게도 전 세계 언론이 주목한 것은 메인 메뉴들이 아닌 갈비구이의 소스로 활용한 3백50년 된 씨간장이었다. 프랑스 AFP 통신, 영국 데일리 메일 등 해외 언론들은 “미국의 역사보다 오래된 간장이 메뉴로 제공됐다”며 씨간장의 스토리에 대해 놀라움과 궁금증을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다소 낯설 수 있는 씨간장은 이름 그대로 씨가 되는 간장을 말한다. 간장은 발효 기간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막 담근 새 간장은 햇간장, 1~2년 정도 숙성시킨 간장은 청간장, 3~4년 된 간장은 중간장, 5년 이상 묵힌 간장은 진간장이라 한다. 씨간장은 진간장 중에서도 가장 맛이 좋은 것을 골라 오랫동안 유지해온 간장을 말한다. 발효식품인 간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맛은 강해지고 염도는 낮아진다. 장독에 보관하며 먹는 간장은 요리에 사용하고, 자연적으로 수분이 증발하면서 마치 소금 결정과 같은 모양으로 굳어버리는데, 이렇게 발효된 씨간장에 새로 담근 간장을 붓는 것을 ‘겹장’이라고 한다. 우리가 빵 반죽을 만들 때 전날 만든 반죽의 일부를 새로운 반죽에 섞어 빵 효모의 씨를 계속 이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묵은 간장과 햇간장을 섞으면 종균이 일정하게 퍼져나가고 마치 와인을 블렌딩하는 것처럼 맛이 한층 깊어진다. 또한 간장의 맛도 일정하게 유지돼 종가의 종부들은 새 간장과 된장을 담글 때 반드시 씨간장을 섞는다.


오래 두었다고 씨간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선조들은 장맛이 조금 떨어졌다 싶으면 잘 숙성된 씨간장을 구해다 섞어 먹곤 했다. 그 마을의 씨간장 맛은 종가에서 주로 담당했는데, 실제 트럼프 방한 당시 화제가 되었던 씨간장은 전남 담양 장흥 고씨 양진재 문중(10대 종부 기순도 전통식품 명인)의 것으로 알려졌다, 충남 논산 파평 윤씨 노종파 종가에도, 충북 보은군에 자리한 보성 선씨 영흥공파 종가에도 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는 씨간장이 존재한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종가들의 씨간장은 1L에 5백만원, 한 항아리에는 1억원이라는 값이 매겨지며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씨간장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은 ‘씨간장은 곧 오래된 간장’이라는 것. 하지만 그것은 오해다. 씨간장은 간장의 종자가 되는 개념일 뿐, 묵힌 시간은 맛있는 씨간장을 만드는 것과 하등 관계가 없다. 오히려 무작정 오래되기만 한 간장은 먹기 힘든 경우가 많다. ‘오래된 간장’이 아니라 ‘맛있는 간장’이 바로 씨간장이다. 종가에서도 가문을 대표할 간장 맛을 찾아내고 그 맛을 대대로 유지해오면서 역사가 쌓였다. 이제 씨간장의 정의는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맛있는 간장’으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맛있는 간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명인들, 또 유명 요리사들은 맛의 비결로 하나같이 씨간장을 꼽는다. 씨간장의 맛은 단순히 몇 마디 단어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깊은 풍미와 특유의 감칠맛을 선사하는 것은 물론 음식의 맛을 한껏 돋우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 조상들은 씨간장을 애피타이저로 활용하기도 했는데, 식전에 혓바닥으로 씨간장을 조금 찍어 맛을 본 후 식사를 했다. 씨간장의 깊은 풍미와 특유의 감칠맛을 느낌으로써 입맛이 돌고 미각이 살아난다는 것을 일찍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된 씨간장이 항암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이야기에 웃돈을 주고 이를 구입하거나 옹기째로 도둑질해가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잘 발효된 씨간장은 몸에도 이롭다. 씨간장을 즐기는 방식은 다양한데, 한 가지 예로 차로 즐기는 것이다. 오랜 세월 발효가 된 간장에 따뜻한 물을 부으면 풍미가 증가하고 짠맛이 줄어들기 때문에 훌륭한 차로 마실 수 있다. 특히 스님들은 소화가 안 되거나 더부룩할 때 간장차로 속을 다스리기도 했다고 한다.


씨간장의 진한 풍미, 대중화될 수 있을까

햇장에 씨간장을 더하면 왜 풍미가 높아지는 걸까. 그것은 씨간장에 존재하는 미생물의 발효 작용 때문이다. 지난 2019년 한국교통대학교 식품공학과 최웅규 교수팀이 1년에서 7년까지 장기 숙성된 전국의 한식 간장 30종을 분석한 결과, 발효에 영향을 미치는 세균과 곰팡이, 효모의 수 역시 숙성 기간에 비례해 증가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감칠맛에 영향을 미치는 아스파트산과 글루탐산 등 유리아미노산의 함량이 1년 미만 숙성 간장보다 7년 정도 장기 숙성할 경우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는 과학적인 원리가 숨어 있다. 콩에는 단백질이 40%, 지질이 20%, 섬유질이 5% 존재하는데, 콩을 발효시키면 자연의 미생물들이 콩을 분해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효소를 분비한다. 단백질분해효소, 전분분해효소, 지질분해효소, 섬유소분해효소가 그것. 우리 전통 간장에서 나타나는 특유의 맛이나 향 역시 고초균(공기, 땅 등에 존재하는 호기성(好氣性) 세균으로 자연계에 널리 퍼져 있으나 병을 일으키지는 않음)이 분비하는 효소에서 기인한다. 이 효소는 뜨거운 열을 가해 달이면 사멸한다. 하지만 반전이 하나 있다. 고초균은 포자를 형성하여 다시 살아난다는 것. 적절한 환경이 되면 효소가 포자로 깨어나 다시 효소를 분비하는 것이다. 씨간장도 마찬가지다. 맛과 향이 풍부해지는 것 역시 씨간장의 포자형성균으로 생존한 발효 미생물 때문이다. 그래서 장의 달임 과정이나 수십 년, 수백 년의 시간에도 끄떡없이 그 깊은 맛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전통 간장에 대한 불안 요소는 존재한다. 메주 쑤기에서부터 장 담그기, 장 가르기까지 1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거쳐야 하고, 날씨와 온도에 영향을 많이 받아 맛과 향 등 품질 규격화가 어려우며, 위생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 이에 반해 개량식 양조간장은 효소 활성이 강한 코지 종균만 사용하기 때문에 한식 간장의 여러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

지난 2018년 조선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장해춘 교수팀은 전통 씨간장으로부터 프로테아제와 아밀라아제 활성이 뛰어나고 향미가 우수한 씨간장 종균을 개발해 양조간장에 이를 첨가하는 실험에 들어갔다. 결과는 놀라웠다. 양조간장에 들어가는 코지 제조에 씨간장 종균을 적게 사용하고 6개월 단기 숙성을 했음에도 간장의 맛과 향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쿰쿰한 발효취는 사라지고, 구수하면서 진한 감칠맛이 더해진 양조간장이 탄생했다. 이는 간장의 향미에 도움을 주는 글루탐산과 필수아미노산의 일종인 류신이 높게 나온 덕분이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쌓인 식문화 지혜의 보고, 간장이 씨간장의 대중화를 통해 또 한 번 비상할 수 있을지 기대된다.

사진 셔터스톡 
참고자료 한식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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