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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artist

화폭에 나빌레라, 비단실의 화가 김선영

글 김지은

2020. 11. 03

붓이나 펜의 터치로는 표현할 수 없는 화려하고 섬세한 회화의 영역을 개척해나가는 사람이 있다. 작품에는 눈 내린 겨울 시골길 풍경도, 단풍 곱게 물든 언덕길도, 푸르른 숲도 있다. 회화와 조형, 공예의 아름다운 공존을 담아내는 현대자수화가 김선영의 이야기다.

“학력고사를 치른 후 진학하고 싶은 대학들을 구경 삼아 돌아다녔어요. 그러다 우연히, 실크사로 작업한 풍경화를 만나게 되었죠. 이화여대 섬유예술학과 졸업작품전시회였어요.” 

실로 그린 것이라고는 상상치도 못할 만큼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후광이 비치는 작품이었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 돌아온 소녀는 그날 밤 벅차도록 일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해 잠을 설쳤다. 

그날의 찬란했던 기억은 작가 김선영(51)에게 수차례의 손목관절 수술을 견디면서도 화폭을 놓지 못하는 예술가의 길로 인도했다. 소원하던 이화여대 섬유예술학과에 진학해 현대자수의 대가로 불리는 스승들을 만난 그는 개념도 생소한 ‘현대자수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현대자수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회화 기법이에요. 학창 시절 스승이셨던 분들이 당시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수예의 대가셨는데, 그분들이 우리나라 전통의 수예와 서양의 프랑스자수 기법들을 응용해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셨던 듯해요.” 

국내 몇 안 되는 현대자수화가들의 작품 중에서도 작가 김선영의 작품이 특히 독창성을 가지는 이유는 실크사 덕분이다. 현대자수에서 기존의 자수에서처럼 면사나 화학사(아크릴사)를 사용해도 되지만 그는 32년 전 현대자수화를 처음 접했을 때 한눈에 매료되었던, 빛을 머금었다 뿜어내는 실크사만의 영롱한 하모니가 없는 작품은 상상할 수 없다. 실크사는 그에게 현대자수화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만든 첫사랑의 존재다. 




실을 한 땀 한 땀 얹은 조각 같은 현대자수화

“누에고치에서 탄생한 비단실은 하늘이 우리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에요. 목화에서 얻은 면사도 자연의 산물이지만 반짝임이 없죠. 물론 실크는 다루기 까다롭고 손이 많이 가요. 하지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천연의 광택이 있죠. 실의 구조도 일반적으로 우리가 흔히 쓰는 꼰사가 아니라 한 가닥 한 가닥 길게 풀어져 있는 푼사라 내가 원하는 정도로 꼬아서 쓸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입니다.” 

그의 작품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섬세하고 풍부한 컬러 표현과 드라마틱한 구성도 놀랍지만 마치 실을 한 땀 한 땀 얹은 조각 작품을 감상하는 듯 입체감이 살아 있다. 필요한 만큼 실을 꼬아서 작품의 입체감을 더할 수 있기에 가능한 작업이다. 물론 그 모든 과정에는 완성된 작품을 눈으로 보았을 때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엄청난 수고로움이 담겨 있지만 말이다. 

언뜻 천 위에 실과 바늘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 광경이 수예와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그의 작업 방식은 회화의 범주에 가깝다. 배경 천에 염색이나 페인팅 등의 기법을 활용해 색을 입히고 밑그림 작업을 한 후에 실을 물감삼아 수를 놓는 방식이다. 단순히 자수 기법을 구사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쉽다. 누군가 밑그림을 그려주거나,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본을 대고 밑그림을 그려도 문제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자수에는 데생과 구도, 회화와 조각의 기본기가 모두 필요하다. 회화와 자수에 필요한 다양한 재료들도 모두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면만 채우는 기존의 자수기법과는 또 다른, 입체감과 명암이 생생히 살아 있는 현대자수화가 완성된다. 작품에 매료되어 배워보겠다고 나섰던 사람들이 몇 달 후에 죄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포기’를 선언하는 이유다. 

“전시회 때마다, 현대자수를 배워보고 싶다고 연락을 해오는 분들이 계셨어요. 저 역시 후학을 양성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도 간절하기에 수차례 시도를 했었죠. 그런데 결국에는 몇 달 못 가 ‘너무 힘들다’며 그만두겠다고들 하시더라고요. 미술 입시를 준비하는 제 딸도 힘들어서 싫다니 요즘엔 ‘아, 내 세대에서 명맥이 끊기겠구나’ 싶은 절망감도 들어요.” 

작품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현대자수화에 도전했던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 뒤에 숨은 고통의 크기를 미처 알지 못했다. 겉보기에 화려하게만 느껴지는 현대자수화는 실상 한 땀 한 땀 작가의 피고름으로 완성되는 작품이다. 하지만 제자들이 말하는 고통은 단지 육체적 통증에 대한 호소가 아니었다. 그 속에는 처음 입시 미술을 시작하듯 그림의 기본기를 다지고, 회화와 조각의 기법을 마스터한 후에만 실과 바늘을 들 수 있는 지난한 시간에 대한 두려움이 섞여 있다. 그가 현대자수화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도 학창 시절 이런 모든 과정을 섭렵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더라도 “미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작업”이라 말했다. 

실제로 작가 김선영의 손은 수십 년간 이어진 고된 작업의 후유증으로 만성 통증과 기형적 이상을 겪고 있다. 이제는 바늘귀에 실을 꿰는 첫 손놀림조차 쉽지 않을 정도로 힘이 들지만 그래도 곱은 손을 놓지 못해 실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이 일상이다. 육신의 고통은 예술가의 영혼을 도려내지 못한다. 


미술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다

선화예고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이화여대 섬유예술학과에 진학해 섬유예술 전반을 공부했다. 텍스타일 전공이라면 으레 의류학과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이화여대 섬유예술학과는 미술대학 소속이다. 작품에 있어 종이가 아닌 천과 실을 더 많이 다룬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그가 지금과 같은 풍경화 기법을 완성한 것은 대학원 진학 이후였다. 대학 시절 풍경화 작업을 주로 하던 그는 졸업 후 한동안 실로 누드화를 그리는 일에 심취해 있었다. 인간의 아름다움과 그 내면의 고통을 화폭에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혼과 육아로 잠시 작품 활동에서 멀어져 있던 그는 경희대 스페이스디자인학과 석사과정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재개했다. 동 대학원 조형디자인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면서부터는 회화 작업에서 벗어나 실제 나무를 조형물에 활용하는 화예조형 작업에 심취했다. 그렇게 완성한 조형 작품이 80여 점에 이른다. 

“나무의 질감을 느껴보고 싶었어요. 거칠다, 휜다, 부러진다 등 조형 작업을 하면서 실제 경험한 나무의 질감과 조형미는 이후 현대자수 작품에서 자연물을 표현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죠.” 

2002년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에서 열린 첫 번째 개인전 ‘실로 그린 내 마음의 풍경展’이 오롯이 현대자수로만 구성된 풍경화를 선보이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 개인전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는 현대자수화와 화예조형이 어우러진 하나의 거대한 공간예술의 영역이었다. 액자 속 그림에 담긴 섬세한 자연의 섭리와 나무를 소재로 한 화예조형물이 갈망하는 인간의 정체성은 전혀 다른 듯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고 인정하며 공간을 압도했다. 

“기존의 작품들이 회화나 염색보다 자수의 비중이 더 컸는데, 다음 전시에서는 오로라의 신비로움을 담은 작품을 많이 선보일 예정이에요. 아름다운 오로라의 색감을 현대자수로 표현하기 위해 천에 염색을 하고 거기에 회화 기법을 더했죠.” 


자연에 대한 예술가의 갈망

춤추는 나무들. 18.5㎝×12㎝

춤추는 나무들. 18.5㎝×12㎝

어느 곳을 향하든, 작가 김선영의 작품에는 늘 자연을 동경하고 그리워하는 현대인들의 내밀한 속내가 담겨 있다. 그것은 어쩌면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숲과 마을들은 그가 아직 한 번도 닿지 못한 유토피아의 세계와 같다. 

“자연을 너무 좋아해요. 바라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평온하고 깨끗해지는 느낌이랄까요. 실은 한 번도 제 작품에 담긴 것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벗 삼아 살아보지 못했어요. 날 때부터 강남 토박이여서, 늘 빽빽한 도심 속 풍경만 보고 자랐거든요.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의 작품을 보아도, 신문이나 잡지를 뒤적이다가도 아름다운 자연과 마주하게 되면 그렇게 마음이 설레고 기쁠 수가 없더라고요. 자연에 이끌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인가봐요.” 

예정대로라면 그는 올해 네 번째 개인전을 열어 그간 꺼내놓지 못한 새 작품들을 대거 선보일 계획이었다. 지난 2013년 세 번째 개인전 ‘실로 그린 나무 그림展’ 이후 8년간 차곡차곡 쌓아온 내면의 기록들은 이제 제법 적지 않은 공간을 차지하며 작업실 한편을 지키고 있다. 

대관까지 해두었던 전시회 계획이 코로나19 장기화로 기약 없이 미뤄지면서 그는 잠시간 우울한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며칠씩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계속되는 불면의 밤에 괴로움은 깊어만 갔고, 8년 전 전시를 준비하면서 생긴 원인 모를 통증이 또다시 온몸을 덮쳐왔다. 이토록 고통스러운 데도 버릴 수 없는, 벗어날 수도 없는 끈질긴 것이 작가와 작품의 인연인 걸까. 그는 작품 하나를 완성할 때면 산고의 시간을 지나는 듯 고통스럽다고 했다. 그래서 누군가 작품을 구매하겠노라 연락을 해올 때면 자식을 떠나보내는 심정으로 발을 구르게 된다. 


나비가 되고픈 누에고치

가을숲I. 24㎝×16㎝

가을숲I. 24㎝×16㎝

“딸아이가 그러더라고요. ‘엄마, 나는 엄마가 유명해지지 않아도 돼. 엄마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행복해지면 되는 거잖아.’ 그 말이 그렇게 위로가 될 수 없었어요.” 

돌이켜보면 그랬다. 현대자수화의 명맥을 이을 제자들을 간절히 원했지만 누군가 또 자신과 같은 고통에 빠져 일생을 보내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지금처럼 미술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도 그에게는 적잖은 위로가 된다. 화려한 나비가 아니어도 좋다.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신비하고 지존하다. 

그는 몇 해 전, 평생 쓰고도 남을 만큼의 실크사를 색상별로 대량 구매해두었다. 기술문명의 발달로, 취미 자수 인구는 늘어났지만 그와 같이 자수 기법을 예술의 원천으로 삼고자 하는 이는 드물기 때문이다. 수요가 적으니 공급도 적어졌고, 면사나 화학사처럼 다루기 쉬운 실들은 그나마 생산해내는 곳들이 있지만 실크사는 아무리 발품을 팔아도 원하는 색상의 실을 생산하는 곳을 찾기 어려워졌다. 어쩌면 자신이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은 그에게 더욱 작품 세계에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된다. 

흥미롭게도, 통통한 누에고치의 모양은 무한대의 수학기호를 닮았다. 누에가 나비가 되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누에고치를 탄생시킨다. 그의 그림은 누에가 나비가 되고, 그 나비의 삶이 떠나보낸 누에고치로 아름다운 실을 만들어 또다시 인간이 동경하는 자연을 담는다. 삶과 죽음의 존귀한 순환은 그렇게 끝없는 무한의 세계로 나아간다. 작가 김선영의 작품 세계 또한 그렇게 계속될 것이다.

사진 홍중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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