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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일흔한 살의 여자가 우주시대를 사는 법

‘별을 쥐고 있는 여자’의 작가 김순지

EDITOR 김지은

2020. 03. 01

일흔의 나이를 넘긴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작가 김순지는 꿈이라 답했다. 교사에서 뮤지컬 배우로 드라마 작가에서 또 수많은 직업을 거쳐 이제는 화가로 살고 있는 그가 열 번째 개인전을 연다.

작가 김순지(71). 그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기에, 드라마 ‘생인손’과 소설 ‘별을 쥐고 있는 여자’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한무숙 작가의 원작을 그가 드라마로 각색한 ‘생인손’은 구한말 신분이 바뀐 두 여인의 운명을 조명한 작품으로, ‘출생의 비밀’을 다룬 드라마의 원조 격이다. 1986년 광복절 특집으로 방영돼 온 국민의 사랑을 받은 이 드라마는 이듬해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대상과 작품상을 수상했다. 납치당하듯 시작한 결혼생활과 남편의 폭행, 정신병원 강제 입원 등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도 꿈을 좇아가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별을 쥐고 있는 여자’ 역시 ‘한국판 여자의 일생’이라는 별칭까지 얻으며 출간과 동시에 1백50만 부나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소설은 출판사에서 더 이상 종이 물량을 확보하지 못해 인쇄 기계를 돌릴 수 없었던 웃지 못할 해프닝까지 겪었다. 

김순지 작가는 신이 있다면 인간에게 퍼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몰빵해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타고난 재능과 미모의 소유자다. 학창 시절 화가를 꿈꾸는 성악도였던 그는 대학 진학 후 지역을 대표하는 탁구 선수로 활약했고, 졸업 후에는 잠시 초등학교 교사로도 일했다. 그러다 뮤지컬 배우로, 방송 리포터와 성우로, 동화 구연가이자 드라마 작가, 대학교수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팔색조의 매력을 뽐내며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왔다. 하지만 보기 좋게 화려한 이력을 차치하고서라도, 한 사람의 굴곡 많은 70년 인생을 어찌 몇 마디 글줄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지금의 그는 ‘화가’다.

신이 몰빵한 재능, 불행했던 결혼생활

그의 인생 이력을 더듬는 과정은 다소 복잡하고 힘겨웠다. 험한 소리 한번 들은 적 없이 곱게만 자란 시골 출신의 천진난만한 소녀가 낯모르는 남자에게 끌려가 다짜고짜 결혼을 당하는 대목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원래는 음대를 가고 싶었는데 입시를 앞두고 성대를 다치면서 꿈이 좌절됐어요. 부모님 뜻에 따라 교대에 진학하긴 했지만 초등학교 교사만으론 만족할 수가 없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잘한다, 잘한다 소리만 듣고 자랐으니 노래는 부를 수 없게 되었더라도 못다 한 그림 공부는 계속하고 싶었거든요. 그러다 그런 일을 당하게 되긴 했지만요.” 

스물두 살 갓 부임한 초짜 교사였던 그는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당돌하게도 ‘그림 공부를 꼭 해야겠으니 조기 퇴근을 허락해달라’ 양해를 구하고, 근무지인 청주에서 대전까지 매일같이 그림 공부를 하러 다녔다고 했다. 하루 2~3시간을 자면서도 행복했던 시절, 그림 공부를 하다 대전에서 늦은 시각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새벽별을 보며 출근을 해야 하는 강행군이 이어졌지만 그때는 그게 힘든 줄도 모르고 마냥 신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를 놓쳐 발을 동동 구르던 출근길에 낯선 승용차 한 대를 만났다. 



“손만 잡아도 결혼을 해야 하는 줄 알던 시절이라 선택지가 없었어요. 그 길로 학교를 그만두고 결혼을 해야 했지요.” 

누구 한 사람이라도 세상이 그렇게나 험하다는 걸 미리 가르쳐주었더라면 그의 인생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겠노라 말하던 인심 좋은 아저씨의 뒤에 그토록 무시무시한 욕정이 숨겨져 있었다는 걸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자전 소설 ‘별을 쥐고 있는 여자’를 출간하기 전까지 세상 사람들은 그를 곱게 자라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사는 팔자 좋은 여자로만 생각했다. 초등학교 교사라는 안정적인 일을 갑자기 그만두고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을 했을 때도 사람들은 어린 나이에 팔자 좋게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부잣집 마나님 행세를 해대는 그의 모습을 당연한 듯 상상했을 것이다. 고운 외모에 교양 있는 말씨, 손을 대는 것마다 반짝반짝 빛을 내는 재능까지도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이 있기에 가능한 호사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결혼 후 국립가무단 단원에서 뮤지컬 배우로, 성우로, 방송 리포터로 승승장구하다 드라마 작가로까지 성공한,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안 되는 일 없이 운이 알아서 척척 달라붙던 그의 인생은 누가 봐도 완벽한 한 편의 드라마였다. 

사실 처음부터 드라마 작가로서의 재능이 있었던 건 아니다. 뮤지컬 배우로, 방송 리포터로 맹활약을 펼치는 그의 모습을 눈여겨본 표재순 당시 MBC 상무가 드라마 출연을 권유한 것이 계기라면 계기였다. 

“방송국을 드나들다 벽에 붙어 있던 ‘드라마 작가 공모전’ 공지를 보게 되었어요. 해본 적은 없지만 열심히 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릴 적 성악을 공부하면서 접했던 노래 가사의 ‘시어’들이 제 문학적 감수성에 불을 지폈던 건지도 모르죠. 그때부터 도서관을 집처럼 드나들며 문학 서적들을 탐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재능 하나하나가 그토록 반짝반짝 빛을 낼 수 있었던 건 어쩌면, 사업자금 명목으로 친정아버지의 전 재산을 날리고 잠적해버린 남편 탓일 수도 있겠다. 노모를 모시고, 어린 동생들과 아들 셋을 혼자 건사하다시피 했던 그에게 화려한 배우 생활과 명망 높은 작가로서의 삶은 반드시 움켜잡아야 했던 피비린내 나는 삶의 현장이기도 했다. 

“정말로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이었어요. 투잡에 스리잡은 기본이고, 아이들 키우며 공부까지 해야 했으니까요. 친정 엄마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 해내지 못했겠죠.” 

심정적으로 위기가 올 때마다 ‘내가 태어난 이유’를 곱씹었다. 스스로의 재능을 잘 알면서 포기를 떠올리는 건 ‘인생을 직무유기’하는 것에 다름없었다. 그 치열한 생존의 과정 속에서도 끝까지 그림을 향한 꿈을 버릴 수 없었던 것 역시 자기 삶을 유기해버리고 싶지 않은 열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1981년 KBS 드라마 작가 공모전에 당선된 그는 1983년 MBC 공모전에까지 당선되면서 그야말로 방송가가 주목하는 최고의 인기 작가 반열에 올라섰다. 드라마 한 편을 쓸 때마다 이전에는 만져보지 못한 큰돈이 통장에 척척 입금되었고, 곤궁하던 살림살이에도 윤기가 돌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기뻤던 건 다시 그림을 그릴 여유가 생긴 거였다. 

“1982년에 추계예대에 입학해 동양화를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졸업 후엔 성신여대 대학원에 진학했고요. 그러는 사이 미술공모전에도 몇 차례 당선되었는데, 상을 받고 보니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히 은사이신 이구열 교수님의 화집에서 중국 작가들의 작품을 보게 되었죠.” 

그는 1985년과 1986년에 구상전 공모전 입선을 시작으로 1986년 동아미술대전 입선, 후소회 공모전 장려상, 그리고 1987년엔 후소회 공모전과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각각 특선을 수상했다. 학생 신분으로 국내 최고의 공모전에 잇따라 당선된 것은 실로 대단한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국내 최고의 화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면서 그는 17년을 몸담았던 뮤지컬 극단에 사표를 내고 3년 8개월 동안 이어온 방송 리포터 생활과도 이별을 고했다. 화가로서 이름 석 자가 부끄럽지 않을 작품을 세상에 남기는 것. 그에게는 비로소 찾아온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베스트셀러가 된 자전소설 ‘별을 쥐고 있는 여자’

1988년, 남편의 폭력과 배신으로 얼룩졌던 19년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그는 이듬해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대한민국과 완전히 수교가 단절된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에게는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새로운 동양화 기법을 반드시 배워 오고야 말겠다는 명분과 오기가 있었다. 

해외에 거주하는 지인들부터 언론사, 화단의 인맥을 총동원해 알아낸 것이 중국 최고의 미술 교육 기관 ‘국가화원(구 중국화연구원)’이었다. 끈질긴 노력과 설득 끝에 마침내 국가화원으로부터 입학 허가를 얻어낸 그는 1990년, 한국인 최초로 북경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북경 아시안게임이 열리던 때라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거 같아요. 아시안게임을 취재하기 위해 중국에 머물던 한국의 언론사들이 한꺼번에 전시장으로 몰려들었죠. 당시 제가 국가화원에서 등소평의 맏딸 등림과 동문수학하는 사이였던 점도 한몫했던 거 같아요.” 

한번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니 그의 인기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여기저기 책을 내자는 연락이 쏟아졌고,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담담한 에세이 정도를 쓸 요량으로 시작했던 글은 10개월여의 시간을 거치며 점차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녹아든 소설로 굳어져갔다. 소설 ‘별을 쥐고 있는 여자’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김순지, 고난과 역경 속에서 절망하고 아파하는 여자들의 이야기였다. 

“그때도, 지금도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단 하나예요. 제 이야기가 저와 같은 삶을 살아온 여성들에게 희망과 구원이 되었으면 한다는 거. 사람들은 제 겉모습만으로 ‘재주가 좋다’ ‘운이 억세게 좋다’ 지레짐작했지만 저는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남들이 10번 해보고 포기하는 걸 100번, 1000번 더 부딪치고 노력했어요. 지금 저에게 주어진 것들은 거저 얻은 행운이 아닌 의지와 노력의 결과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요.” 

그렇게 토해내고 나니 차라리 홀가분해지기도 했다. 이제는 더 이상 과거의 기억들로 슬퍼하고 싶지 않다는 강한 의지도 생겼다. 미술평론가 박명인의 말처럼, 예술가 김순지가 도전하고 성취해온 결과물들은 어느 분야에서건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경쟁을 이겨내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기에, 그가 가진 감정적 가치는 절대 평범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김순지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구사하겠다는 의지는 중국 유학 후 더욱 뜨겁게 불타올랐다. 

“엄청난 재료를 소비하며 오랜 세월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지만 새로운 테크닉을 창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내 손에서 마구마구 별들이 쏟아졌어요. 별이란 이미지가 나의 인생과 무관하지 않은, 신이 내린 운명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갤럭시 테크닉, 별이 쏟아지다

미술사에 있어 작가만의 화풍을 정립하는 것은 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손꼽힌다. 그의 최근작들이 평단에서 새삼 주목받는 이유다. ‘갤럭시 테크닉’으로 명명된 그의 독창적인 화풍은 마치 온 우주의 별이 살아 움직이듯 일렁이며 거대한 은하수를 이룬다. 김순지는 자신이 개발한 이 회화 기법에 대해 ‘신이 내린 운명’이란 표현을 썼다. 실로 30여 년 피땀 흘려 이룩한 결실이다.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내면의 순수함, 걸러낼 것 없는 평온함이다. 풍부하고 아름다운 색채로 점철된 그의 작품은 전작 ‘Blood Painting’에서 보인 고통과 상처의 흔적들을 모조리 흡수해버린 듯 황홀하다. 지난 2004년 그는 일 년간 뽑은 2000cc의 피로 그림을 그려 자신의 고통을 표현한 바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차갑고 시린 겨울의 시간을 비옥한 토양으로 삼아 완연한 봄기운이 화려한 우주를 꽃피운 것이다. 

“예술가들은 그림을 통해 자신이 경험했던 역사를 그립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는 김순지만의 갤럭시 기법으로 탄생한 첫 번째 기록이자 역사라고 할 수 있고요. 어쩌면 자화상 같은, 지난 시련들을 호흡하는 내 얼굴이 담겨 있다고도 할 수 있죠.” 

우주는 캔버스뿐만 아니라 닥나무로 만든 ‘순지’ 위에서도 화려한 색으로 펼쳐진다. 수명이 약 500년에 불과한 캔버스와는 달리 순지는 1000년까지도 형태와 색을 보존할 수 있어 세계적으로도 주목받고 있는 소재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지켜내고 또 갈고닦은 예술가로서의 자긍심이다. 

“지금 제 머릿속은 온통 즐겁고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합니다. 이번 전시는 ‘별처럼 꽃처럼 꿈을 그리다’라는 표제처럼 보는 이들의 영혼을 일깨울 꿈과 희망의 메시지가 될 거예요.” 

붓을 든 그의 두 뺨이 상기된 소녀처럼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일흔이 되었다 해도, 뭘 다시 시작하기에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의 시선은 또다시 세계로 향하고 있다. 갤럭시 기법을 세계 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받아보겠다는 야무진 꿈이 그의 뒤를 든든히 지키고 있다. 

혹자는 긴 세월 오롯이 혼자 힘으로 아들 셋을 키워낸 그에게 행복한 가정을 이룬 삶에 대한 소회를 묻는다. 외롭지 않다고, 부럽지 않다고 답한다면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그 무수한 외로움의 시간이 ‘불행’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그의 손에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자유가 주어졌다. 폭력과 억압의 시간을 견뎌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지 못하는 달콤함이다. 매일 아침 습관처럼 이어져온 30분간의 스트레칭, 운동 삼아 다니는 동네 뒷산 산책, 정제되지 않은 곡물로 지은 거친 밥과 신선한 과일, 빼놓지 않고 챙겨 먹는 견과류, 그리고 얼마 전 새로 산 7만원짜리 오디오까지 그의 삶을 건강하게 하는 것들은 몹시 평범하지만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을 만큼 고른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저를 살게 하는 건 배움을 통해 느끼는 쾌감, 성취감, 그로 인한 행복감 같은 것들이에요. 이 행복을 오래도록 누리기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매일 꿈을 꾸며 살고 싶어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아온 그의 만개한 꿈은 3월 4일부터 17일까지 서울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시 ‘꽃처럼 별처럼’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획 김명희 기자 사진 김도균 디자인 김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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