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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시인의 아내 김현경

김수영 시인 “야! 난산이다, 이거 베껴라, 2부씩”

글 | 이소리(시인, 문학in 대표) 사진 | 조영철 기자

입력 2012.05.15 11:43:00

얼룩이 덕지덕지 낀 근현대사에 걸쳐 우리 시단에 새롭고도 환한 빛을 뿌린 ‘시의 샛별’ 김수영.
교통사고로 마흔일곱 살에 짧은 생을 마쳤지만 그가 남긴 시 ‘풀’을 비롯해 많은 산문들이 지금도 회자된다. 여자를 만날 때면 신발부터 먼저 살펴보다가 “발이 못생겼어. 야~ 안 돼!”라고 외쳤던 이 엉뚱한 사내가 진실로 사랑한 여인은 누구였을까?
영원한 시인의 아내 김현경

김수영 시인의 초상화를 들고 있는 김현경 여사. 초상화 속의 시인이 입고 있는 옷도 김 여사가 직접 지은 것이다.



지난 3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1950~60년대 문화예술인들이 자주 들락거렸던 명동을 주제로 한 기획전이 열렸다. 이 전시회에 김수영(1921~1968)이 생전 펴낸 유일한 시집인 ‘달나라의 장난’ 육필 원고(사실 육필 원고의 상당 부분이 부인 김현경이 쓴 것)에서부터 편집된 상태 그대로를 보여주는 원고 수정본, 시집 출간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가 전시됐다. 그뿐이 아니다. 계간 문예지 ‘문학의 오늘’ 봄호에서도 그의 초기 시 ‘그것을 위하여는’을 비롯해 20대 연애 시절을 되돌아본 산문을 발굴해 시인 김수영의 재조명에 불을 지폈다.
4월 5일 낮 3시 서울 인사동에서 김수영 시인의 부인 김현경 여사를 만났다. 1927년생이니 올해 여든다섯. 하지만 곱고 당당한 모습은 잠시 세월을 잊게 한다. 지금도 직접 운전을 할 정도로 건강하며, 1930~50년대에 있었던 일의 날짜까지 헤아릴 만큼 기억력도 비상하다. 그는 남편과 관련된 자료는 펜 하나도 허투루 다루지 않았다. 김수영이 어린 시절 서당에 다니면서 배운 천자문까지 간직해둘 만큼 철저하니까.

처음 보는 여자는 신발부터 먼저 살펴
“선생님은 공부벌레에다 꼬장꼬장한 성격이었어요. 명동에 나가서도 입을 꾹 다문 채 좀처럼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았죠. 술이 얼큰하게 취하면 정치든 문학이든 똑바로 씹는 바람에 주변 사람들과 말다툼을 하다가 결국 난장판으로 끝내기 일쑤였죠. 여자를 보는 눈도 독특했어요. 처음 만나는 여자의 신발부터 보고 발이 못생겼으면 첫마디에 대뜸 ‘안 돼’라고 하곤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았죠.”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마주한 김수영 시인의 부인 김현경 여사. 그는 남편을 줄곧 선생님이라 불렀다. 하지만 시작부터 시인의 꼬장꼬장한 성격과 독특한 버릇을 끄집어낸다. 기왕 여자 이야기가 나온 김에 최근 계간 ‘문학의 오늘’에서 발굴한 김수영 시인의 산문에 등장하는 장선방이라는 인물에 대해 물었다. 이 산문은 시인이 1954년 문학 잡지 ‘청춘’ 2월호에 ‘나와 가극단 여배우와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20대 시절을 회고한 글이다.

“…나도 어느 댄서를 하나 선택하여야 하겠다고 비장한 결심을 하고 화살을 겨눈 것이 장선방이라는 어깨와 허리가 고무풍선같이 탄력이 있어 보이며 검은 눈동자에 말할 수 없는 비애와 향수와 청춘이 교향악을 부르고 있는, 나이 불과 열일곱이나 열아홉밖에는 되어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여자.”(290쪽)
김현경 여사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곧바로 “장선방은 본명이며 장순하로 불렸다”라고 잠들었던 기억을 끄집어낸다. 그는 “배우가 아니라 무용수로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았던 소녀였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연민이었다”고 되짚었다. 장선방은 집이 몹시 가난해서 어쩔 수 없이 기생 노릇을 했고, 김수영은 그런 장선방이 가여워 결혼이라도 해서 도우려 했다는 것.
“장선방네에서도 선생님에게는 별 흥미가 없었어요. 딸에게는 돈 많은 남자가 좋지, 가난한 시인은 탐탁지 않게 여겼죠. 장선방에겐 약혼한 것이나 다름없는 남자도 있었고요.”
유성호 한양대 교수는 새로 발굴된 김수영 산문의 해제에서 시인의 여인으로 고인숙, 김은실, 노봉식을 거론하면서도 “(아내) 김현경에 비하면 김수영에게 잠깐의 기간이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현경 여사는 이 여인들에게 대해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을까.
“고인숙은 저도 만났어요. 그분은 선생님의 친구 여동생으로 같은 동네인 종로6가에서 살았죠. 부잣집이었죠. 1942년이었을 거예요. 고인숙은 일본여자대학에 재학 중이었죠. 선생님도 1941년 선린상고를 졸업하고 1942년 도쿄상대(東京商大)를 목표로 일본에 갔다가 떨어져(인터넷을 뒤져보면 시인 김수영은 1941년 도쿄상대에 입학했다고 나온다) 도쿄성북고등예비학교에 잠시 다니다가 그만두었어요. 영국으로 유학을 가려 했지만 돈이 없었죠. 고인숙을 만나러 일본여대 기숙사를 찾아간 것도 그때였지만 고인숙이 만나주지 않았어요. 그때부터 일본에서 제일 유명했던 쓰키지(築地) 소극장 창립 멤버였던 미즈시나 하루키(水品春樹) 연극연구소에 들어가 연출 수업을 받다가 학병 징집을 피해 귀국했어요.”
김수영은 1943년 한국으로 돌아와 김현경을 찾아왔다. 서울 진명고녀 졸업식(3월 19일)을 앞둔 그달 15일께였다고 기억을 더듬는다.
“지팡이를 짚으며 거지꼴이 돼 저를 찾아왔어요. ‘가족들이 있는 만주로 가려는데 돈이 없다’고 하더군요. 일단 가까운 식당으로 들어가 무덴푸라(무와 어묵으로 만든 음식) 한 그릇을 시켜줬지요. 그리고 비상금 5원짜리 한 장이 들어 있는 지갑을 통째 줬어요. 한참 뒤에 물어보니까 돈이 모자라 그 지갑까지 팔았다더라고요.”

여고생 김현경과 ‘아저씨 친구’ 김수영의 첫 만남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42년이었어요. 집안의 인연으로 아저씨라 불렀던 이종구(영문학자) 씨와 선생님이 선린상고 동창이어서 자연스럽게 만난 거죠. 하루는 두 분이 집으로 찾아왔어요. 그때 아저씨가 선생님에게 ‘수영이 너처럼 눈이 크고 쌍꺼풀이 예쁜 현경이한테 장가들어라’라고 그랬지요. 그때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그 뒤 두 분이 종종 제게 편지와 책을 보냈어요. 선생님은 제게 라스키의 정치평론집을 보내며 독후감을 써서 보내라고 했죠. 어려운 책이었지만 독후감을 써서 보냈더니 ‘놀랐다’라고 하더니, 그다음에는 구라다 하쿠조가 쓴 ‘사랑과 인식의 출발’이라는 책을 또 보냈어요. 그 책은 다행히 라스키보다 조금 쉬웠지요.”

영원한 시인의 아내 김현경

1 영문학자 이종구 씨는 고교 동창인 김수영에게 김현경을 처음 소개하면서 “수영이 너처럼 눈이 크고 쌍꺼풀이 예쁜 현경이한테 장가들어라”라고 했고 그 말은 현실이 됐다. 2 3 경기도 용인 김현경 여사의 집에 보관돼 있는 김수영 시인의 육필 원고와 생전 그가 읽었던 책들.





영원한 시인의 아내 김현경


학교에 다닐 때부터 ‘공주’로 불릴 만큼 소문난 미인이었던 김현경은 이화여대 시절 김수영과 자주 만났다. 그 무렵 연희전문 영문과 4학년에 편입한 김수영은 김현경이 학교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아현동 고개를 넘어 서대문까지 걸어오거나 ‘자연장’이라는 다방에 들러 클래식 음악을 듣기도 했다.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이 좋기는 좋았는데 결혼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며 “그저 아저씨, 선생님, 친구처럼 지냈으며 애인이 없는 것 같아 내 친구를 소개하기도 했다”고 한다. 시인이 ‘발이 못생겼다. 야~ 안 돼’라고 고집을 부린 것도 이때인 듯하다.
김수영은 1944년 가족들이 있는 만주 길림성(지린성)으로 떠나 그곳에서 길림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있던 임헌태, 오해석 등과 만난다. 이들과 함께 길림성예능협회가 주최하는 춘계예능대회에 올릴 작품(연극)을 준비해 1945년 6월 길림 공회당에서 ‘춘수(春水)와 함께’라는 3막극을 올렸다. 김수영은 이 연극에서 권 신부 역을 맡았다. 광복이 되자 김수영 가족은 서울로 돌아와 종로6가에 있는 고모 집에서 잠시 머물다 충무로4가에 집을 구했다.
김수영은 그해 ‘예술부락’에 시 ‘묘정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연극에서 문학으로 마음을 바꾼다. 1946년 시인은 연희전문 영문과에 편입했으나 “영어 실력이 나보다 못한 것 같다”며 곧 그만두었다.

“시 나부랭이나 쓰는 놈에게 딸을 줄 순 없다”
김현경은 1947년 ‘흑인시’라는 장르로 억압받는 이들을 감싸 유명해진 시인 배인철(1920~1947)과 잠시 사귀었다. 이로 인해 김수영이 ‘결별’시를 써보내기도 했으나, 배인철이 어이없게 총에 맞아 죽은 뒤 한밤중에 김수영이 찾아와 “얘가~ 다른 사람과 팔짱 끼고 데이트하는 꼴을 볼 수 없어”라고 소리친 것을 보면 김현경을 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하루는 저를 찾아와 ‘이번 주 토요일은 고모가 안 계셔서 집도 조용할 테니 책 가지고 와, 공부시켜줄 테니’라고 하더군요. 종로6가에 있는 집으로 찾아갔는데 그가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거예요. 결핵성 치질이 도진 거죠. 너무 놀라서 얼른 택시에 태워 종로5가에 있는 강항문과로 데리고 갔어요. 그때 원장이 선생님을 수술대에 엎드리게 하고는 제게 ‘등에 올라타라’고 했어요. 마취도 없이 그냥 메스를 댄 거죠. 피와 고름이 쏟아지고, 얼마나 아팠겠어요.”
1948년이었다. 그날 김현경은 환자를 돌보느라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다음 날 소식을 들은 김현경의 어머니가 득달같이 병원으로 달려와 상황을 살피더니 “돌봐줄 사람도 없으니 네가 간호해라” 하고는 가진 돈을 털어주고 갔다.
“병원비를 마련해야 하는데 쉽지 않아 집에 들어가 고민을 했죠. 그때 장롱 속에서 흰색, 옥색, 분홍색 비단 20필이 눈에 띄는 거예요. 급한 김에 한 필을 꺼내 동대문시장에 가서 팔았죠. 그때부터 한 필 또 한 필 꺼내다 세 번째에 아버지에게 딱 걸렸어요. 그때 아버지께서 저희 둘을 불러 앉혀놓고 ‘시 나부랭이나 쓰는 불알 두 쪽밖에 없는 놈에게 어디 하나 빠질 게 없는 내 딸이 비단까지 빼서 병 수발을 해? 당장 헤어져라. 도둑질까지 했으니 앞으로는 만날 수 없다’ 하시더니 제 방문에 대못을 박아버렸어요.”
그해 겨울, 김현경은 아버지에게 종로에 있는 불어 학원에 간다며 허락을 받아 외출했다가 길에서 우연히 김수영과 마주쳤다. 김수영은 대뜸 “서울대 간호학교에 영어 선생으로 취직했다”며 그의 손을 꼭 붙잡고 말없이 학교로 데리고 간다. 그러고는 교정 나무 아래 앉혀놓고 “80분 강의지만 40분만 하고 나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렇게 40분을 앉아 기다렸는데 어느새 가만히 다가와 저를 꽉 껴안은 뒤 ‘My soul is dark(내 영혼은 어둡다)’라고 외쳤어요. 그게 선생님의 프러포즈였죠. 그날 집에 못 들어갔어요. 그 다음 날 저는 다시 방에 갇혔어요. 그때부터 선생님이 돈암동 우리 집 창가로 찾아와 휘파람으로 베토벤 ‘운명’을 불었죠. 집에서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랐지만 저는 몰래 빠져나가 데이트를 했죠. 그렇게 몇 번 하니까 어느 날 선생님의 어머님이 금가락지를 준비해 저희 집으로 찾아와서 제 어머니를 설득했어요. ‘이제 어떡하겠습니까? 벌써 도장이 찍히지 않았습니까’라고요.”
1949년 두 사람은 돈암동의 방 두 칸짜리 월세집에서 동거에 들어갔다. 살림살이는 김현경이 친정을 오가며 이부자리와 살림도구, 책 등을 가져와 마련했다.
“아버지는 그때까지 전혀 모르셨어요. 결국 들통이 나자 ‘너희들은 남들처럼 결혼식은 못한다’라시며 결혼 비용을 마련해줬죠.”
하지만 일이 터졌다. 김수영이 양쪽 집에서 탄 결혼 비용을 들고 아침 일찍 ‘볼일이 있다’며 집을 나섰다가 이틀 만에 돌아온 것이다. 밀선을 타기 위해 마산으로 갔다가 돈만 몽땅 사기를 당하고 빈털터리로 올라왔으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영원한 시인의 아내 김현경

화단에서는 안목 높은 수집가로 알려진 김현경 여사.



영원한 시인의 아내 김현경

“새로운 생명이 꿈틀거리는 봄이 와서 그런지 선생님이 많이 보고 싶다”고 말하는 시인의 아내.



인민군에게 끌려갔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돌아온 사연
1950년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했다. 그해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미처 피란을 가지 못한 시인은 8월 중순께 길에서 인민군에게 붙잡혀 의용군으로 징집돼 아내만 남겨두고 평남 개천으로 끌려갔다.
“10월 20일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했어요. 선생님은 그 혼전 속에 낙오됐는데 이리 가면 소련군이 있고, 저리 가면 국군이 있으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겠지요. 군복과 민간인 옷을 번갈아 입으며 숨어 다니다 민가 부엌으로 들어가 솥 안에 삶은 옥수수가 있어 허겁지겁 먹은 뒤 덤불에서 자기도 하고, 그렇게 죽을 고비를 몇 차례나 넘기면서 서울에 왔는데 충무로4가 파출소 뒤에 있는 설렁탕 집 앞에서 경찰에 붙잡힌 거죠. 그때 경찰이 ‘빨갱이 새끼 나와라’ 하더니 다짜고짜 의자로 두들겨 팼대요. 어찌나 심하게 맞았던지 며칠 지나자 상처에서 구더기가 나왔다고 하더군요. 그 뒤 경찰이 ‘의용군으로 잡혀갔다 온 놈은 다 나와라’ 하더래요.”
김수영이 끌려간 곳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였다. 이곳에서 그는 미군 야전병원의 통역관으로 일하다 미 군의관들을 따라 부산 거제리(거제동) 수용소로 옮겼고 1953년 겨울 석방됐다.
“선생님은 포로수용소에서 ‘목숨이란 것을 지키기가 참 힘들다’고 생각하고 그 고통을 이기기 위해 생니를 마구 흔들어서 뺐대요. 그런 그에게 미 야전병원 원장이 틀니를 해줬어요. 의치란 것을 상상도 못할 때였으니 정말 귀한 물건이었죠.”
김현경은 “그때부터 선생님은 술만 마시면 틀니를 빼서 손수건에 싼 뒤 주머니에 넣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의 주머니에서 그토록 아끼던 틀니가 없어졌다. 아내는 조마조마한 마음에 다음 날 아침 씹지 않아도 되는 조미음(좁쌀미음)을 끓여내며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죽을 후루룩 마시던 김수영은 “이! 내 주머니에 없었어?” 하더니 화를 벌컥 냈다.
“자신의 실수인데 책임은 제게 물었죠. 그 순간 그를 달래서 어제 간 곳이 어디어디인지 물어 그 집을 찾아갔어요. 그가 갔던 술집들 중 마지막 집에서 주모가 술통을 휘휘 젓는데 떨걱떨걱 소리가 나는 거예요. 틀니가 술통에 빠진 거죠. 선생님은 그제야 ‘휴~ 나, 살았다’며 한시름을 놓았죠.”
김수영의 술버릇과 버럭증은 전쟁의 상흔인 듯하다.
“전쟁 뒤 성격이 많이 거칠어졌어요, 부부싸움은 괜한 화풀이죠. 시가 잘 쓰이지 않거나 무슨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술을 마시고 집으로 들어와 벼락을 쳤죠. 방문을 다 부수고, 재떨이 등 살림살이가 닥치는 대로 날아다니곤 했어요. 그렇게 난리를 쳐도 가슴 한켠은 따뜻한 남편이었어요. 그때는 빨래를 마포(서강) 나루터에서 했는데, 빨래를 삶아주기도 하고, 빨래를 머리에 이고 돌아오면 마중을 나왔지요.”
옷 짓는 솜씨가 좋았던 김현경은 남편의 한복을 직접 만들었다. 김수영은 집에서 한복을 즐겨 입었고, 양말은 반드시 검정색을 신고, 봄가을이면 트렌치코트를 입고, 구두는 미제 라인디를 신는 멋쟁이였다. 시 한 편을 마무리하면 그는 “야! 난산이다”라고 소리치며 아내를 불러 “이거 베껴라, 2부씩”이라고 했다.
“혹 제가 잘못 베껴 쓰면 ‘한 칸 띄워야 되는데?’라며 새로 쓰게 했지요. 글자를 틀리게 써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냥 교정부호만 표시해도 될 것을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한 편의 시가 완성되면 저는 밥때와 관계없이 서재로 달려가 옮겨 적어야 했죠.”

“우리 아이 낳지 말고 문학만 하자”
김현경 여사는 “선생님은 시인과 함께하는 삶이 어렵다는 것을 미리 양해라도 구하듯이 제게 ‘우리 아이 낳지 말고 문학만 하자’고 말했지만 슬하에 두 아들 준(儁, 1950년생)과 우(瑀, 1958년생)를 낳았다”고 한다. 마땅한 피임 방법도 없었지만 결혼한 여자가 일부러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시대였다.
“1949년 갓 살림을 따로 차렸을 때 먹고살기가 참 어려웠어요. 친정어머님과 시어머님께서 살림 뒷수발을 거의 다 해주셨는데, 나중에는 재봉틀과 금가락지까지 팔았죠. 한국전쟁 뒤에는 셋방살이를 접고 아예 친정으로 들어갔죠. 월세까지 내면서 어려운 살림을 꾸릴 필요가 없었거든요. 선생님은 시도 열심히 쓰고 번역도 해서 한 달 생활비는 겨우겨우 마련했지만 일정치 않았죠. 그때 제 바느질 품삯이 번역료보다 더 비쌌어요.”
살림이 어려웠던 탓인지 김수영은 현찰이 아니면 절대 원고를 내주지 않았다.
“하루는 제게 ‘픽션이 아니라 외설적인 소설을 하나 써라. 원고료가 세니까. 필명으로 하면 된다’고 해요. 제가 바느질하듯이 열심히 80장짜리 소설을 써서 선생님에게 보여줬죠. 그랬더니 ‘김현경이 다시 봐야겠다’라고 말하곤 잽싸게 나가더니 그 원고료로 몽땅 술을 마시고 집으로 와서 갖은 욕설을 퍼부었죠. ‘나 너하고 안 산다’고 그랬어요. 제가 막상 집을 나가려고 하니까 ‘너한테 그 따위 소설을 쓰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더니 ‘우리 원고료 신경 쓰지 말자’고 하더라고요. 원고료를 조금이라도 더 벌어 살림에 보태려고 저한테 그런 소설을 쓰게 한 게 미안했던가 봐요. 그때 시 한 편에 3백원씩 받았죠. 짜장면 한 그릇이 1백원도 채 안 할 때니까 꽤 높은 원고료였죠. 게다가 원고 청탁도 종종 오곤 했어요.”
하지만 그 원고료는 살림에 보태기보다 술로 탕진했다.
“선생님은 막걸리든 소주든 술을 가리지 않고 마셨다. ‘술맛으로 먹는 게 아니라 있으니까 그냥 마신다’가 선생님 주도였다”며 “그때 ‘신문학사’ 편집장을 맡고 있었던 신동문 시인을 참 좋아했지만 김지하 시인은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되짚었다.
“새로운 생명이 꿈틀거리는 봄이 와서 그런지 선생님이 많이 보고 싶다”며 그리움이 잔뜩 담긴 눈빛을 식어버린 찻잔에 떨구는 김현경 여사. “한 시대 뛰어난 시인과 함께한 삶이 가정적으로는 어렵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행복했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는 지금도 남편의 유품을 고이 간직하는 일이 아내의 도리라고 여긴다. 그는 ‘김수영문학관’ 건립과 관련해 “거창한 신전처럼 꾸미는 것은 싫다”며 “김수영 시인의 생애가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요즈음 이 세상을 떠난 시인이나 소설가를 기리는 문학관이 너무 많은 것도 또 한 가지 이유다.
“제가 그 사람 서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니까 그 사람의 에스프리 같은 온라인문학관을 만들고 싶어요. 작품이나 유품을 모셔놓는 번지르르한 문학관은 싫어요. 유품은 ‘김수영 서재’ 정도의 작은 공간 하나만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시인 김수영(金洙暎, 1921. 11. 27~1968. 6. 16)은 서울에서 태어나 4·19혁명을 기점으로 현실비판 의식과 저항 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여시를 썼다. 1945년 ‘예술부락(藝術部落)’에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한 뒤 마지막 시 ‘풀’에 이르기까지 2백여 편에 이르는 시와 시론을 발표했다. 1959년에는 시집 ‘달나라의 장난’으로 제1회 ‘시협상’을 받았고, 에머슨 논문집 ‘20세기 문학평론’ ‘카뮈의 사상과 문학’ ‘현대문학의 영역’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1968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시집 ‘거대한 뿌리’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와 산문집 ‘시여, 침을 뱉어라’ ‘퓨리턴의 초상’이 나왔다. 사후 1주기를 맞아 도봉산에 시비가 세워졌고(1969), 미완성 장편소설 ‘의용군’이 ‘월간문학’(1970)에 발표됐다. 민음사에서는 그가 남긴 업적을 기리기 위해 ‘김수영문학상’을 만들어 해마다 시상하고 있다. 2001년 10월 금관문화훈장이 주어졌다.


여성동아 2012년 5월 5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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