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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낭창낭창 휘적휘적 가고 싶은 길

가녀린 자작나무 백만 그루 사이를 걷다

인제 수산리~어론리 19km

글 | 김화성 동아일보 전문기자 사진 | 서영수 동아일보 전문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12. 01. 05

강원도 인제군 남면 수산리 응봉산 골짜기는 스무 살 안팎의 젊은 자작나무가 빼곡히 자라고 있다. 북풍한설이 치는 이맘때쯤 가녀린 나무들이 한데 어울려 백색공화국을 만들고, 초봄엔 여린 풀빛의 자작나무가 여행객을 반긴다.

가녀린 자작나무 백만 그루 사이를 걷다


설악산 수렴동 들어가면
별 만드는 나무들이 있다
단풍나무에서는 단풍별이
떡갈나무에선 떡갈나무 이파리만 한 별이
올라가
어떤 별은 삶처럼 빛나고
또 어떤 별은 죽음처럼 반짝이다가
생을 마치고 떨어지면
나무들이 그 별을 다시 받아내는데
별만큼 나무가 많은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산에서 자본 사람은 알겠지만
밤에도 숲이 물결처럼 술렁이는 건
나무들이 별 수리하느라 그러는 것이다
-이상국의 ‘별 만드는 나무들’에서

자작나무는 샛별이다. 신새벽 초롱초롱 반짝이는 계명성이다. 자작나무 이파리가 하늘에 올라가면 샛별이 되고, 그 별이 늙어 떨어지면 자작나무 품에서 잠이 든다. 자작나무는 정갈하다. 겨울 자작나무는 더욱 그렇다. 문득 지상에 대설주의보가 내리면 마음은 자작나무 숲으로 달려간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연인을 감싸던 ‘순백의 정령’들이 보고 싶어진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자작나무 숲은 몽환적이다. 뽀얀 살결의 자작나무에 하얀 눈이 촉촉이 젖어든다. 시베리아 자작나무는 ‘새벽 강물에 머리를 헹군 여인’이다. 기품 있고 고결하다. 귀티가 넘쳐흐른다. 우윳빛 피부가 성스러운 느낌을 준다. 그런 귀부인들이 시베리아 횡단열차 뒤로 끝없이 펼쳐진다. 노르웨이나 핀란드 숲도 마찬가지다.

하얗고 긴 종아리가 슬픈 자작나무

가녀린 자작나무 백만 그루 사이를 걷다

겨울 숲을 지키는 ‘하얀 정령’ 자작나무. 잔가시 많은 흰 생선뼈처럼 산비탈에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다.





남한 땅에도 자작나무 숲이 있다. 강원도 인제군 남면 수산리 자작나무 숲은 1백만 그루가 넘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자작나무 숲이다. 제지회사인 동해펄프(현 무림P·P)가 1986년부터 1995년까지 10년 동안 600ha(1백81만5천 평) 땅에 심었다. 길게는 25년, 짧게는 16년 정도 나이를 먹었다. 아직 어리다. 큰 것이 밑동 지름 20cm, 키 15m쯤 될까. 하나같이 ‘빼빼로’다.
김운기 인제군산림녹지계장(49)은 “당시 고급 펄프로 쓰려고 1평에 한 그루씩 모두 1백80만여 그루를 심었습니다. 그중 60%만 살았다고 해도 1백만 그루가 넘는다고 봐야죠. 겨울 자작나무 숲도 아름답지만 초봄 여린 풀빛의 자작나무 숲도 일품입니다”라고 말한다.
심성흠 수산리 이장(56)은 “응봉산은 모두 12골짜기나 됩니다. 옛날에는 절이 많아 절골로 불리는 곳도 있지만, 지금은 그 골짜기마다 자작나무가 빼곡합니다. 한때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았는데, 요즘엔 관광버스 단체여행객들도 오신다”고 말한다.
수산리 자작나무 숲은 소녀 티가 물씬 난다. 아직 여리여리하고 가냘프다. 수줍음을 탄다. 목이 긴 하얀 사슴 같다.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펜화다. ‘하얗고 긴 종아리가 슬픈 여자(최창균 시인)’ 닮았다. 그래서 더욱 애틋하다. ‘자작나무 숲의 벗은 몸들이/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고은 시인)’.

천마도는 왜 자작나무 껍질에 그렸을까

가녀린 자작나무 백만 그루 사이를 걷다

자작나무 껍질을 47겹이나 덧붙인 판 위에 그린 천마도.

1973년 경주 천마총이 발굴됐을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바로 ‘혀를 빼어 물고 하늘을 나는 동물 그림’ 때문이었다. 가로 75cm 세로 53cm. 도대체 이 동물이 뭘까. 어느 학자는 백마(白馬)라고 했고, 어떤 이는 머리에 뿔을 보니 ‘상상 속의 동물 기린’이 틀림없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이름은 ‘천마도(天馬圖)’로 붙여졌다. 뿔이 아니라 ‘말 상투’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 그림이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졌다는 것이다. 도대체 5~6세기(추정) 경주에서 자작나무 껍질을 어떻게 구했을까. 어떻게 1천5백여 년 동안이나 썩지 않았을까. 그림판은 자작나무 껍질을 무려 47겹이나 덧붙였다. 잠자리나 매미 날개를 수십 겹 붙여놓았다고나 할까. 그러려면 최소 50년이 넘는 자작나무 껍질을 벗겨야 가능하다. 도대체 어디서 구했을까. 그리고 왜 하필 자작나무 껍질인가. 자작나무 유물은 천마도뿐만이 아니었다. 임금의 모자인 듯한 ‘세모꼴 자작나무 껍질 모자’도 있었다.
자작나무는 북위 45도 위쪽 추운 지방에서 잘 자란다. 기름기가 많아 탈 때 ‘자작자작’ 소리를 낸다고 해서 자작나무다. 우리나라에선 백두산 개마고원 일대(북위 42도)가 빽빽하다. 백두산 일대에서 자라는 자작나무는 대부분 사스레나무다. 껍질은 시베리아 자작나무와 같이 하얗고 종이처럼 얇게 벗겨진다. 하지만 껍질이 매끈하지 않고 거칠다. 곧지 않고 약간 구불구불하게 자란다. 경주는 북위 35.8도에 불과하다. 아예 자작나무가 자랄 수 없다.
학자들은 그 무덤의 주인공이 북방 기마민족 후예임이 틀림없다고 말한다. 북방 유목민들은 자작나무를 ‘하늘로 가는 사다리’라고 생각했다. ‘우주목(宇宙木)’이라며 떠받들었다. ‘천마가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로 실어 나른다’면 자작나무는 그 영혼이 숨쉬는 곳인 셈이다. 어느 학자는 천마총이 적석목곽분이라는 점을 들어 그 주인공이 흉노족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적석목곽분은 기원전 4~2세기 중앙아시아 흉노족의 고유 무덤양식이라는 것이다.


두 발로 느릿느릿 뚜벅뚜벅 6시간
수산리 자작나무 숲은 응봉산(800.3m) 자락에 있다. 수산리~어론리 19km 임도를 따라 걷는 게 최고다. 느릿느릿 걸어도 6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임도는 해발 450~580m에 걸쳐 있다. 대체로 평탄하지만 겨울철 승용차 드라이브는 무리다. 먹고 마실 것과 아이젠 준비는 필수다.
수산리에서 6.7km쯤 가면 전망대가 나온다. 이곳에선 발아래 한반도 모양의 자작나무 숲을 볼 수 있다. 햇살이 언뜻언뜻 구름 사이로 비춰주면 그 모습이 더 황홀하다. 우듬지 잔가시에 걸러진 햇살이 아슴아슴하다. 푸른 잣나무, 황갈색 낙엽송, 하얀 자작나무의 어우러짐도 볼만하다. 12.1km 지점 빙골삼거리에서부터 어론리에 이르는 길은 자작나무를 바로 코앞에서 볼 수 있다. 흰 몸뚱어리에 무수한 검버섯 상처 자국이 뜻밖이다. 그렇다. 이 세상 상처 없이 크는 생명이 어디 있던가!

살아가노라면/가슴 아픈 일 한두 가지겠는가//깊은 곳에 뿌리를 감추고/흔들리지 않는 자기를 사는 나무처럼/그걸 사는 거다
-조병화의 ‘나무의 철학’에서

‘자작나무의 영혼’ 차가버섯

가녀린 자작나무 백만 그루 사이를 걷다
1968년 옛 소련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1918~2008)은 ‘암병동’이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소설은 ‘솔제니친 자신이 1950년 말에 위암 말기 진단을 받었는데 차가버섯을 먹고 나았다’는 자전적 내용이었다. 차가버섯이 도대체 어떻게 생긴 것일까. 서방에선 반신반의하면서도 ‘암 치료’라는 데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당시 솔제니친은 노벨상(1970년 수상)을 받기 전이라 그리 이름이 나진 않았다.
‘이 병원에 오는 (시베리아) 농민 중에는 암 환자가 거의 없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농민들이 평소 ‘차가’라는 버섯을 끓여 마시는 데 있었다. 그것은 자작나무 버섯이었다. 그 농부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차가를 마시면서 수백 년 동안 암에서 구제된 것이다.’
차가버섯은 자작나무의 수액을 빨아먹고 산다. 무려 15~20년 동안 자란다. 두께가 10cm가 넘어야 하며, 15년 이하는 약효가 없다고 알려져 있다. 러시아에서는 오래전부터 민간 약용 버섯으로 쓰였다. 러시아의 인삼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솔제니친은 90세까지 장수를 누렸다.
자작나무에는 뽕나무에서 잘 자란다는 상황버섯도 큰다. 한국의 자작나무 숲에는 현재까지 차가버섯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날씨가 맞지 않거나, 자작나무 숲이 시베리아처럼 오래되지 않아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 일본에선 자작나무가 치아에 좋다며 이쑤시개로 많이 쓴다.


자작나무 껍질에 쓴 시인의 마음
겨울 자작나무는 희부연 알몸으로 떼 지어 서 있다. 자르면 하얀 젖이 콸콸 솟구쳐 나올 것 같다. 뭉치고 다지어 숨겨놓은 하얀 생명수. 북풍한설 최전선에 서서 겨우내 만들어낸 감로수.
겨울 자작나무는 이를 악문다. 쌩! 쌩! 칼바람에 몸이 아리다. 수십 수백만 그루가 집단 퍼포먼스를 한다. 꼿꼿하지만 여리다. 가녀린 나무들이 한데 모여 거대한 백색공화국을 만든다. 찬바람이 불면 가늘게 몸을 떤다. 생선 하얀 잔가시가 비탈에 무수히 박혀 있는 것 같다. 눈부신 옥양목 맨살 드러낸 채 ‘얼음 숲’을 밝힌다. 가끔 촘촘한 ‘참빗 가슴뼈’ 틈새로 햇살이 비껴 비친다.
1938년 4월18일 시인 오장환(1918~1951)은 일본의 한 온천에서 선배 이육사 시인(1904~1944)에게 엽서를 보냈다. 그것은 귀한 엽서였다. 다름 아닌 자작나무 껍질을 씌워 만들었던 것. 오장환은 말을 아꼈다. 단 3줄의 문장으로 대신했다. 마음을 이미 그 엽서에 모두 담았던 것이다. ‘백화 껍질이요. 이곳은 나무가 만소. 동무들에게 소식 전해주시오.’ 백화(白樺)는 한자말로 자작나무를 뜻한다. 오장환은 다짜고짜 ‘자작나무 껍질 엽서’인 것부터 뽐냈다. 그가 바로 순진무구한 ‘자작나무 소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자작나무는 북방의 여인이다. 여진족 추장의 딸이다. 말갈 흉노족 처녀들이다. 거란족 여인들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몽골 처자들의 말발굽 소리가 아련하다. 늑대와 승냥이 여우 울음소리도 울린다. 알타이 사람들의 사냥 소리가 귓전에 다가온다.

저 도시를 활보하는 인간들을 뽑아내고/거기에다 자작나무를 걸어가게 한다면/자작나무의 눈을 닮고/자작나무의 귀를 닮은/아이를 낳으리//봄이 오면 이마 위로/새순 소록소록 돋고
가을이면 겨드랑이 아래로/가랑잎 우수수 지리//그런데 만약에/저 숲을 이룬 자작나무를 베어내고/거기에다가 인간을 한 그루씩 옮겨 심는다면/지구가, 푸른 지구가 온통/공동묘지 되고 말겠지
-안도현의 ‘자작나무의 입장을 옹호하는 노래’ 전문

가녀린 자작나무 백만 그루 사이를 걷다

1 어론리 임도 입구의 표지석. 이 길을 따라가면 수산리가 나온다. 2 자작나무 숲길의 안내 표지판. 3 호젓한 숲길을 걸으며 ‘자작자작’ 소리 내며 탄다는 자작나무를 떠올리며 혼자서 싱긋 웃는다.



★ 자작나무 숲길
교통

▽승용차=서울양양고속도로→동홍천나들목→44번 국도(인제 방면)→신남삼거리(좌회전)→46번 국도(양구 방면)→1.5km→수산리 입구(좌회전), 어론리는 신남을 지나 44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어론 SK주유소를 끼고 좌회전
▽버스=동서울~인제행 신남 하차(2시간 소요), 서울 상봉동~인제행 신남 하차(2시간 소요), 신남→수산리행 버스 오전 7시35분(1회뿐), 신남→어론리 버스(오전 6시55분부터 1시간 간격)

먹을거리
▽고려관, 우리한우마을=남면 신남리, 쇠고기는 식육점에서 구입한 뒤 주변 식당에서 요리해 먹는 방식, 033-461-0704 ▽대흥식당=남면 부평리 44번 국도변, 붕어찜 매운탕, 033-461-2599 ▽세월낚기=남면 수산리, 붕어찜 매운탕, 033-461-1196 ▽하늘마당=남면 어론리 임도 진입로, 매운탕, 033-463-0705 ▽절골송어양식장=남면 수산리 절골, 033-462-6446 ▽정원식당=남면 신남리 소방서 앞, 두부전골, 033-461-5080

잠자리
▽민박=응봉산 아래 수산리는 67가구 1백7명이 산다. 한때 수백 호에 달하는 큰 동네였지만 소양호가 생기는 바람에 교통 오지가 됐다. 땅 이름 그대로 물과 산에 갇힌 ‘水山里(수산리)’가 된 것이다. ▽마을민박 심성흠 이장 033-461-6517, 010-6376-4777
▽캠핑장=▽인제자연학교(010-6376-4777 cafe.naver.com/injaecamping) ▽자작나무 캠핑장(010-7130-9537 cafe.daum.net/jajakcamp)
안내=인제군청산림녹지과 033-460-2071, 문화관광과 033-460-2082

가녀린 자작나무 백만 그루 사이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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