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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어머니와 딸

가야금 명가 문재숙 이슬기 이하늬 모녀

어머니는 안길수록 더 큰 산

글·정혜연 기자 사진·이기욱 기자, 스톰프 뮤직 제공

2011. 06. 16

이 모녀, 미국 카네기홀 무대에 두 번이나 올랐다. 중요무형문화재 23호 문재숙 교수와 가야금 연주자 이슬기, 미스코리아 이하늬. 세 사람 모두 서울대 국악과에서 가야금을 전공한 뒤 꾸준히 한국 전통문화를 알리고 있다. 닮은 듯 닮지 않은 듯한 문재숙·이슬기 모녀와 만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가야금 명가 문재숙 이슬기 이하늬 모녀


웅장한 오케스트라 협연 속에서도 가야금 소리가 명료하게 울려 퍼진다. 지난 4월 방송된 tvN ‘오페라스타’의 최종회 오프닝 무대에 교향악과 국악이 어우러진 공연이 펼쳐져 많은 이의 귀를 즐겁게 했다. 이날 연주는 MC인 미스코리아 이하늬(28)와 그의 어머니이자 가야금 중요무형문화재 23호인 문재숙 이화여대 한국음악과 교수(58), 언니이자 가야금 연주자인 이슬기씨(30)가 함께했다. 공연 전 무대 뒤 대기실을 찾았을 때 세 사람은 화음을 맞추느라 여념이 없었다. 생방송인 데다 무대 규모 또한 작지 않은 터라 긴장될 것 같은데 문 교수는 “평생 연주를 해왔고 딸들이 어릴 때부터 함께 공연봉사를 다녀서인지 떨리진 않는다”며 미소를 지었다.
“이 무대가 끝나면 중국에서 공연이 있어 곧장 떠나야 해요. 다른 연주자들은 벌써 가 있는데 저는 오늘 밤 이 연주 때문에 홀로 한국에 남아 있어 신경이 조금 쓰이네요. 그래도 두 딸과 함께 가야금 연주 무대에 오르는 건 참 오랜만이라 설레고 또 감회도 새로워요.”
세 사람은 얼핏 봐선 모녀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스타일이 다르다. 문 교수는 넉넉하고 인심 좋은 이웃집 아주머니 같고, 언니 이슬기씨는 마른 몸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형. 글래머러스하고 섹시한 이미지의 이하늬와도 거리가 있다. 세 사람의 이미지가 너무 다르다고 하자 문 교수는 “하나도 안 닮았죠? 주워왔어요~”라며 농을 건넨다. 그러나 찬찬히 뜯어보니 이하늬는 문 교수를, 이슬기씨는 아버지(이상업 전 국정원 제2차장)를 닮았다.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스타일도 달라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가야금을 켰지만 이하늬는 미스코리아 당선 이후 연예 활동을 하고, 이슬기씨는 전공을 살려 연주자로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무형문화재 문재숙 만든 오빠 문희상
문재숙 교수에게 2006년은 잊을 수 없는 해다. 중요무형문화재 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보유자로 지정되며 40여 년간 우리 문화를 계승 발전시켜온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문화재청에서 심사를 받는 것은 물론 오디션까지 치르는 과정이 녹록지 않았고 주변의 시기도 많았지만 지나고 나니 문화재가 되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며 하루아침에 지정된 것이 아님을 암시했다.
이제는 삶의 전부가 된 가야금과 문 교수가 인연을 맺은 것은 오빠인 문희상 국회의원의 조언 덕분이다. 한국전쟁 이후 국가적으로 전 국민이 경제성장에 몰두할 때 문희상 국회의원은 동생들에게 “우리나라가 잘살게 되면 족보를 찾는 날이 올 것이니 우리의 것을 배워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오빠는 국가를 위하는 일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우리 문화를 발전시켜 세계에 알리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다고 강조했어요. 그 말은 사실 현재 노래 강사를 하고 있는 언니(문인숙)에게 한 것이었는데 정작 언니는 귀담아듣지 않고 잊어버렸지만 제 마음속에 박혀 싹을 틔웠죠. 그때 언니가 가야금을 배우고 있었는데 저도 졸라서 같이 배우며 발을 들이게 됐어요. 언니는 노래며 가야금이며 다방면에 재주가 많았던 터라 ‘가야금만큼은 언니보다 잘해야지’ 하는 어린 마음으로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웃음).”
문 교수 자신은 우리 문화에 대한 애착 때문에 가야금을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녀들에게까지 시킬 생각은 없었다. 각자 자신의 재능을 살리길 바랄 뿐이었는데 집에 놓인 가야금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두 딸은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전공으로 선택했다. 이슬기씨는 “집에 다른 장난감이 없었다”며 웃음 지었다.
“엄마는 한 번도 가야금을 해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당신께서 워낙 사랑하셨으니까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저희들까지 가야금을 좋아하게 된 거죠. 집에는 늘 국악이 흘렀는데 그걸 듣고 자란 저와 하늬는 어려서부터 국악 동요제나 국악 무대에 자주 섰어요. 그렇게 놀이처럼 여기다가 초등학교 졸업할 무렵 국악중학교가 생긴다는 거예요. 왠지 운명 같아서 시험을 봤는데 합격했고 그때서야 ‘이제부턴 가야금과 운명을 같이하게 되는 거구나’ 싶었죠.”

가야금 명가 문재숙 이슬기 이하늬 모녀


보통 자매는 절친한 친구이기도 하지만 한 가지를 놓고 경쟁을 벌이는 라이벌이기도 하다. 가야금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자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상황이 적지 않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슬기씨는 “경쟁자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각자 부담을 느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우선 저는 문재숙 교수의 딸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하늬는 문재숙 교수의 딸이자 이슬기의 동생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늘 주변의 기대를 받았죠. 지금 생각해보면 제 부담감보다는 하늬의 부담감이 더 컸을 것 같아요. 전 가야금 전공자로서 정규코스를 또박또박 걸어갔는데 동생도 그랬으면 했어요. 그래서 하늬에게 ‘대학교 3학년이니 콩쿠르에 나가야 하지 않겠니’ ‘이제는 독주회를 해야 하지 않겠니’라며 잔소리를 하는 바람에 하늬가 좀 힘들어 했죠(웃음).”



어느 순간 뒤바뀐 타이틀, ‘미스코리아 이하늬 가족’
세 사람은 모두 서울대 국악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그 때문에 이슬기·이하늬 자매는 어딜 가나 ‘문재숙의 딸’로 불렸다. 하지만 2006년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이하늬가 미스코리아 대회에서 진으로 뽑히고 이듬해 미스월드 4위에 오르며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두 번째 가야금 앨범을 내고 EBS ‘스페이스 공감’에서 독주하기로 예정돼 있던 이슬기씨는 마음이 상해 연습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국내외 가리지 않고 설 수 있는 무대라면 다 올라가 가야금을 연주하며 국악을 알리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하늬가 미스코리아에 뽑힌 건 제 노력을 무색게 할 정도로 파급력이 크더라고요. 가야금을 전공했다는 것이 화제가 되면서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지는 걸 느꼈거든요. 공연 날짜는 다가오는데 다 그만두고 싶었어요. 한편 ‘내가 유명해지려고 음악을 했던가?’라는 의문이 들면서 그건 아니라는 답이 나왔고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죠.”
문 교수도 “어딜 가나 ‘미스코리아 이하늬의 엄마’라고 불리는 것이 신기했다. 심지어 평생 정치를 한 오빠까지 ‘이하늬의 외삼촌’이라 불렸을 정도”라며 웃었다. 지금은 웃을 수 있지만 이하늬가 연예계에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문 교수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대학 때 가수를 한다며 ‘YG패밀리 연습생이 됐으니 가겠다’는 거예요. 반대를 해도 몰래 가는 것 같아 따라갔는데 세상에 듣도 보도 못하는 곳에서 춤을 추고 있더라고요. 이상한 사람들이 딸아이에게 나쁜 물 들였다는 생각에 놀라서 얼마나 열심히 기도를 했는지 몰라요(웃음). 어느 날은 또 하늬와 미용실에 갔다가 원장이 미스코리아 대회에 내보내자고 하기에 안 한다고 했죠. 전화가 계속 걸려오는 통에 할 수 없이 나가보라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결과가 나왔어요.”
거침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인생을 개척해나갔던 이하늬와 달리 이슬기씨는 오로지 가야금이라는 지향점을 향해 걸었다. 성격도 이하늬는 털털하고 통이 큰 반면, 이슬기씨는 차분하고 세심한 편이다. 자매는 각자의 스타일을 인정하고 살지만 가끔 이슬기씨는 동생이 부러울 때가 있다고 했다.
“저희 가족은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고 나면 항상 집에서 함께 모여 밤을 보내는 전통이 있었어요. 대학생이었지만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친구들이 같이 보내자고 해도 ‘나는 안 될 것 같아’하며 집으로 오곤 했죠. 그런데 하늬는 ‘난 친구들과 놀러 갈게~ 언니, 안녕~’ 하면서 나가는 거예요. 속으로는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런 자유분방함이 부럽기도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전 장녀니까 부모님 말씀에 책임감을 느끼지만 하늬는 동생이라 그런 부분에서 자유로운 것 같아요.”
그런 자유로움의 결과로 이하늬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국악이 아닌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만약 문재숙 교수와 이슬기씨에게도 다른 선택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할까. 문 교수는 주저 없이 “소설가가 됐을 것”이라고 답했다.

가야금 명가 문재숙 이슬기 이하늬 모녀


“어릴 때부터 가야금과 더불어 글쓰기를 좋아해 소설가가 되고 싶기도 했어요. 붓글씨 쓰는 것도 좋아해서 한동안 빠져 살았죠. 대학 때 김죽파 선생님께 붓글씨를 선물해드렸는데 거실에 걸어두셨나 봐요. 황병기 선생님께서 그걸 보시고는 마음에 들어 하셨고 저를 소개해달라고 하셨대요. 그 인연으로 제가 황병기 선생님의 책 ‘영목’의 표지 글씨를 써드렸죠. 지금도 서점에 가면 제 글씨를 보실 수 있을 거예요(웃음).”
이슬기씨는 가야금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선생님이 됐을 거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 반 친구들의 일기장을 일일이 검사하는 선생님이 너무도 부러워서 막연하게 꿈꾼 적이 있다고. 그런데 그는 현재 수원대와 중앙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니 반쯤 그 꿈을 이룬 셈이다.

‘예가회’ 통해 국악으로 봉사하는 기쁨 누려 행복
세 사람은 현재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서로에게 든든한 힘이 돼주고 있다. 서로가 바쁜 탓에 한자리에 모이는 일이 쉽지 않다. 하지만 20년 전 문 교수의 주도로 창설한 국악 봉사단체 ‘예가회’의 연주가 있을 때만큼은 함께한다. 국악 봉사를 하게 된 것은 문 교수의 막내아들 이권형씨(추계예술대 재학중·대금 전공)의 아픔 때문이다.
“결혼하고 12년 만에 낳은 아들이었기에 정말 기뻤어요. 얼마나 좋으면 아이를 재우는데 절로 자장가가 나오는 거예요. 그걸로 국립국악원 창작동요제에 출품했다가 상까지 받았죠(웃음).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심하게 아팠어요. 당시로서는 희귀한 병을 앓아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고 다른 데 신경을 쓸 수가 없었죠.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의 계산법은 다르니까 내 아이가 아플수록 낮은 곳으로 가서 더 힘든 사람들을 위해 봉사를 하면 내 기도를 들어주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방에 조그마한 교회를 찾아다니며 국악 봉사를 하기 시작했고 아이도 차츰 나아졌죠. 지금은 완치돼서 건강해요.”
그 일을 계기로 문 교수의 가족은 더 끈끈해졌고 단단해졌다. 곁에 있던 이슬기씨는 “봉사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음악을 단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더불어 이슬기씨는 지난해 11월 한 남자의 아내가 된 이후로 더욱 어머니를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저희 모녀가 워낙 가깝게 지냈기 때문인지 시집간다고 했을 때 어머니께서 우시더라고요(웃음). 결혼식 때 ‘소중한 내 딸아’라는 곡을 작곡해 가야금·대금·피리·장구 연주자들을 다 초대하시고는 노래까지 불러주셨죠. 도입부가 구슬퍼 깜짝 놀랐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신명이 나 안심했어요. 결혼하고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부모님이 쓸쓸해하시는 것 같아서 자주 친정을 찾아 대화를 많이 나누려고 해요.”
문재숙 교수가 걸어간 길을 따라 걷고 있는 이슬기씨는 최근 직접 작사·작곡한 다섯 번째 앨범 ‘그리고 그리다’를 발매했다. 국악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는 연주자답게 재즈와 가야금을 접목시켜 우리 민요 ‘밀양 아리랑’을 탱고풍으로 만드는 등 다양한 곡을 선보였다. 그는 “어머니라는 큰 산이 내 앞에 있는 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재산인 것 같다”며 문재숙 교수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연주하실 때는 어머니가 아니라 그 어떤 스승보다 더 크게 보여요. 어떻게 하면 어머니와 같은 소리를 낼 수 있을까 고민하며 수천 번을 연습해요. 직접 가르쳐주시면 좋을 텐데 어머니께서는 그저 ‘나보다 낫다’며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워주실 뿐이에요. 그게 어머니의 교육법인데 사실 어릴 때부터 그런 에너지를 받아서인지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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