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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이 부부가 사는 법

정치계 잉꼬 커플 안상수 의원·전희정 부부

“집안도 나라도 소통이 잘 돼야죠”

글 김명희 기자 사진 조영철 기자

2010. 07. 16

한나라당 안상수 의원은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의 전형이다. 학비를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던 학창시절을 이야기할 때도 가슴 설레는 연애담을 말할 때도 담담했다. 안 의원이 정치권에서 강성으로 분류되는 이유도 이런 성격이 한몫하지 않았나 싶다. 그는 원칙을 지키려다 보니 그렇게 보인 측면이 있다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소통에 좀 더 방점을 찍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한나라당 안상수 의원(64·경기도 과천-의왕)의 경기도 의왕 집은 오랜만에 찾은 친정집 같다. 구형인데다가 베란다 확장을 하지 않은 아파트는 실평수(32평)보다 작아 보였고 소파와 가구는 족히 20년 이상은 돼 보였다. 4선 의원의 집치곤 소박한 편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안 의원의 아내 전희정씨(63)는 “부부만 사는 집이라 이 정도면 족하다”고 말했다. 안 의원 부부는 슬하에 2남1녀를 두고 있는데 첫딸과 큰아들은 결혼해 각자 가정을 꾸리고 있고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막내아들도 얼마 전 학교 근처에 원룸을 얻어 독립을 했다고 한다.

아들 학교 보내려 통사정하는 어머니 보며 이 악물고 공부

정치계 잉꼬 커플 안상수 의원·전희정 부부


안 의원의 경력만 보면 무척 화려하다. 서울대 법대 출신에 사시 합격 후 검사, 변호사 등을 거쳐 96년 정계에 입문한 뒤 지금까지 4번 내리 지역구 의원에 당선됐다. 얼핏 보면 엘리트 코스만 밟아온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어린 시절 누구보다 뼈저린 가난을 경험한 것. 그의 아버지는 경남 마산에서 꽤 큰 기와공장을 운영했으나 안 의원이 일곱 살 되던 해 남도를 휩쓴 돌림병으로 돌아가셨다. 7남매를 키우는 건 오로지 어머니 몫이 됐다. 하지만 아버지의 유산으로 남았던 기와공장은 사기를 당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고 안 의원의 손아래 동생 둘도 홍역으로 일찍 세상을 떴다. 설상가상으로 남은 5남매 모두 장티푸스에 걸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치료약도 변변치 못할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남은 5남매까지 죽는 건 차마 못 보겠다며 어느 날 밤 철길을 베고 누웠는데 하늘에 아버지 모습이 보이더랍니다. 당신 지금 뭐 하고 있느냐,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할 거냐며 호통을 치시더랍니다. 어머니의 지극한 간호 덕에 저희 5남매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죠.”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먹고살 길은 여전히 막막했다. 어머니는 공사판 막노동부터 좌판까지 손발이 부르트도록 일했고 누나도 공장에 다니며 살림에 보탰지만 좀처럼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 시절엔 누구나 다 그랬기에, 특별히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중학교 입학할 때 전교 1등을 하면 등록금을 면제해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그만 13등을 하고 말았어요. 어머니가 며칠 동안 학교로 찾아가 입학금을 깎고, 불쌍하다고 주변에서 도와주고 해서 겨우 학교에 다니게 됐죠.”
학교에 다니게 된 건 큰 행운이었지만 어머니가 선생님에게 통사정을 하는 모습을 본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의 원래 꿈은 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 백일장에 나가 수상한 적도 여러 번.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시인의 꿈을 접고 힘센 사람이 돼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마산고를 거쳐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대학시절 그는 학과 공부보다 정치 현실에 더 관심이 많았다. 한·일 회담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느라 정학을 받고, 사카린 밀수사건 규탄 데모 등으로 집시법을 위반해 전과자 신세가 되기도 했다. 고시공부에 전념하기 시작한 건 아내를 만나고 나서부터. 안 의원이 대학 4학년, 전씨가 2학년(적십자간호대학) 때였다. 안 의원은 친구들과 단체로 바닷가에 놀러갔다가 일행 중 한명이던 전씨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고 한다.
“단아하고 덕이 있어 보였어요. 한눈에 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여행에서 돌아와 한 달쯤 됐을 때 안 의원이 전씨의 기숙사를 찾아갔다.
“눈빛이 맑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저한테 마음이 있는 줄은 몰랐기 때문에 좀 놀랐죠.”

정치계 잉꼬 커플 안상수 의원·전희정 부부




이후 안 의원은 3개월, 6개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전씨를 찾아갔다. 전씨 입장에선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긴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매일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만나면 차도 마시고, 데이트도 해야 하는데 그땐 돈이 없어서 칫솔 하나 들고 친구집을 전전하고 버스도 못 타고 걸어다니던 때니까…가정교사라도 해서 용돈이 생기면 그때 한 번씩 찾아가곤 했죠.”
이렇게 사랑을 이어가던 중, 전씨가 파독 간호사로 독일행을 택하면서 두 사람은 2년간 떨어져 지냈다. 그때 안 의원은 절절한 편지로 전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원래 문학청년이라 편지를 굉장히 잘써요. 간간이 시도 적어 보내고…그렇게 떨어져 지내다 보니 사랑이 더 깊어진 것 같아요.”
전씨가 독일에서 돌아온 73년 두 사람은 결혼했다. 당시 안 의원은 고향 마산에서 야간학교를 하다가 청산하고 직장생활을 잠시 했으나 이내 공부를 다시 시작한 터라 수중에 돈 한 푼 있을 리 없었다. 생활은 간호사인 전씨가 책임졌다. 안 의원은 공부에만 전념하기 위해 경기도 광주 시골마을로 들어갔다. 당시는 지금 같은 고시촌이 없어 절이나 시골마을에서 방 한칸 얻어 조용히 공부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때는 고시 준비생을 낭인 취급했어요. 일년에 20~30명 뽑을 때라 합격하기도 어렵고, 낙방하면 취직하기도 힘들었거든요. 결혼할 엄두도 내지 못하던 나를 잡아준 아내가 고맙고, 고생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해서 죽기 살기로 공부했어요.”

정치계 잉꼬 커플 안상수 의원·전희정 부부

안상수 의원의 아내 전희정씨는 안 의원이 ‘고시 낭인’ 시절 경제를 책임지며 남편을 뒷바라지했다.



“남편이 고시에 합격하리라고 기대하고 결혼한 건 아니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게끔 밀어줘야 한다고 생각했죠. 한달에 한 번씩 제가 광주로 찾아갔는데 공부한 시간을 그래프로 그려놓은 걸 보니 하루 서너 시간 자면서 무섭게 공부하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면서 믿음이 생겼어요.”
안 의원은 결혼 1년 반 만에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대학시절의 시위 경력 때문에 발령을 받지 못할 뻔하다가 겨우 전주지방검찰청에서 검사로 첫 출발했다. 그리고 87년 고 박종철의 부검을 지휘,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면서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당시 서슬 퍼런 군부 권력에 맞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에 관해 안 의원은 “초임 검사 시절 한 학생의 사망 사건 수사를 맡았는데 당시 비상계엄 상황이라 사건이 흐지부지됐다. 검사 시절 내내 그 일이 마음에 상처가 됐고 정의에 반해 비굴하게 사느니 명예롭게 물러나겠다는 각오로 박종철 사건을 수사했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안기부에 끌려가 부단한 협박과 회유를 받았다. 신변의 위협까지 느꼈지만 가족에게도 내색하지 않고 소신에 따라 사건을 수사, 타살이라는 사실을 밝혀냈고 이는 6월 민주화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저는 엄청난 용기를 지닌 사람도 아니고, 그저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했을 뿐입니다. 국회의원에 재선될 때마다 신문 프로필에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라는 평이 오르내리는데 제가 대중적이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기본적인 원칙을 양보하면서까지 인기를 얻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박종철 사건이 계기가 돼 그는 검사직에서 물러났고 변호사를 거쳐 96년 정치에 입문했다. 정치에 뛰어든 이유는 변호사 시절 박군처럼 반인륜적 고문으로 희생되는 비극이 없도록 하기 위해 당직변호사제도를 만들고, 외국인 노동자 법률사무소를 여는 등 약자들의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했으나 한계를 느꼈고 제도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려면 국회의원이 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가 정치에 입문한다고 했을 때 아내 전씨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라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제가 본 남편은 세상살이에는 크게 신경 안 쓰고 큰일을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언젠가는 정치를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할까 말까 망설이는 눈치더라고요. 그래서 할 거면 빨리 하라고, 그리고 이왕 할 거면 좀 더 멀리 많은 사람을 보듬는 정치인이 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여야 의원 아우르는 ‘목욕당’ 당수, 소통하는 정치인 되고 싶어

정치계 잉꼬 커플 안상수 의원·전희정 부부


정치에 발을 디딘 지 15년, 그는 4선 의원이 됐고 원내 대표를 두 번 역임했다. 안 의원은 정치인으로 큰 굴곡 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로 아내의 내조를 들었다.
“아내가 잔소리를 많이 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주민이 원하는 바에 관한 모니터링을 해 쓴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을 반듯하게 잘 키워준 것도 고맙고요.”
자녀교육에 관해선 부부의 의견이 엇갈린다. 안 의원은 “아이들과 많이 놀아준 자상한 아버지였다”고 주장하는 반면 전씨는 “남편이 아이들에겐 엄격한 편”이었다며 “그래도 엄한 아버지가 뒤에 버티고 있어 아이들이 엇나가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안 의원은 어린 시절 잘 먹지 못해서 고등학교 1학년 때 키가 145cm에 불과했다고 한다. 지금도 큰 키에 건장한 체구는 아니다. 그는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으로 건강을 유지한다. 그의 아침은 오전 5시에 시작된다. 일찌감치 일어나 아내가 만들어주는 낫토와 올리브유에 구운 토마토로 아침을 대신하고 6시면 의원회관으로 출근, 그곳에서 운동을 하고 업무를 시작한다. 의원회관 목욕탕을 애용하는 여야 의원들이 모여 ‘목욕당’이라는 친목모임을 만들었는데 그가 당수다.
“여야가 보통 때는 회의장에선 좀 싸우더라도 목욕탕에서 만나면 전혀 싸우는 일이 없죠. 터놓고 이야기를 하다 보면 상대 입장을 이해할 수도 있고…. 말하자면 물밑 대화를 하는 거죠. 서로 당도 걱정하고 나라도 걱정하고 그렇게 하면서 우리 국회가 잘되기 위해서 같이 노력해나가려고 합니다.”
요즘 안 의원은 더 바빠졌다. 지난 6·2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고전한 이유를 분석하고 극복방안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가장 큰 패인으로 20`30대 젊은 층과의 소통 부족, 디지털 세계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한 점 등을 꼽았다. 원칙과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대중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그가 요즘 가장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다. 큰 숙제를 앞에 둔 남편의 손을 아내가 꼭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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