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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긍정의 힘

아름다운 우리집

글·김용택‘시인’

2007. 11. 12

그집은 동네의 가운데쯤에 있습니다. 나즈막한 뒷산에는 밤나무가 있고 솔숲이 있습니다. 그 집 앞에 있는 고추밭, 무밭, 그리고 고추밭에 강냉이 잎은 여름과 가을을 정확하게 알려줍니다. 달이 뜬 여름밤 강냉이 잎에 바람이 불면 넓적한 강냉이 잎에 떨어진 달빛이 은가루처럼 잎을 흘러내립니다. 집 앞 고추밭을 지나면 큰길이 있고, 그 아래 강변, 다음에 강입니다. 강 언덕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두 그루 있습니다. 그 집 마루에서는 앉거나 눕거나 서거나 간에 강물이 보입니다. 그 마루에서는 안 보이는 게 없습니다. 산도 물도 강물로 떨어지는 눈송이도, 강물로 날려오는 앞산 꽃잎이나 단풍 물든 낙엽들도 다 보입니다. 강변에는 꽃들이 피고 눈들이 쌓이고 아이들이 놉니다.
그 집에는 방이 셋, 부엌, 키 작은 내가 세로로 누우면 내 키하고 딱 맞는 마루와 엉덩이 폭만 한 툇마루가 있습니다. 툇마루는 일터에서 돌아오신 아버지께서 잠깐 앉아 땀을 식히며 앞산의 단풍과 꽃과 강물을 바라보던 곳입니다. 툇마루에서도 흘러가는 강 물결이 보인다는 뜻입니다. 어머니는 부엌문을 열고 허드렛물을 버리시며, 앞산의 단풍과 봄과 눈 오는 것을 알리곤 하셨습니다. “하따나, 저 새잎 피는 것 좀 봐라. 꽃보다 더 이쁘다인” 하시거나 “하이고, 눈도 곱게도 오신다” 하시곤 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얼른 방문을 열고 꽃보다 고운 앞산의 새잎이나 강물로 사라지는 꽃잎 같은 눈송이들을 보다가 문을 닫곤 했습니다.
그 집 방 중에 한 칸은 내 방이었습니다. 내 방엔 창호지 문이 여섯 짝이나 있었습니다. 추석이나 설에 새로 문을 바르고 누워 있으면 참으로 방이 환했습니다. 나는 그 방에서 평생을 보냈습니다. 나의 어떤 시 구절처럼 나는 그 방에서 “기뻤고 슬펐고 사랑의 외로움에 두 어깨를 들먹였습니다.” 세월이 가며 그 방에는 책들이 쌓여가고 내 생각이 자라나 밖으로 나갔습니다. 달이 뜬 밤에는 불을 끄고 창호지 문으로 들어온 달빛에 괴로워했고 잠 못 들어했고 그리워했고 간절하게 무엇인가를 원했습니다. 달빛에 견디지 못하면 툇마루에 나가 앉아 달을 보거나 강변에 나가 헤매거나 징검다리를 건너며 물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떨 때 소쩍새까지 울어대면 참으로 혼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숱한 밤을 그렇게 나는 그 방에서 지냈습니다. 달빛으로 시를 쓰고 겨울 밤 앞산 뒷산 밤바람 소리로 나는 자랐습니다.
내 방에서도 문을 열면 아침 강물이 보였고 봄과 여름 햇빛과 가을바람과 겨울 흰 눈이 다 보였습니다. 그 좁은 방은 알이었습니다. 내가 세상의 햇살을 눈부시게 바라볼 수 있는 세상 밖으로 나올 때까지 그 방은 내게 두꺼운 껍질로 둘러싸여 있는 알이었습니다. 나는 어느 날 그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 방에서 문을 열어도 앞산과 강물의 여울이 보입니다. 벗들이 그 방 앞에다가 ‘觀瀾軒(관란헌)’이란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작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우리 가족에겐 세상 어느 곳보다 소중한 보금자리
내가 세상에 나가자 사람들이 그 집에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그 집을 소중하고 귀하게 여겼으므로 많은 사람들도 그 집을 모두 좋아하고 아꼈습니다. 동생들이 다 커서 객지로 가고 아버지는 그 집 아버지의 방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셨던 그 방, 내가 어쩌다 새벽까지 자지 않고 책을 보고 있으면 새벽에 깨신 아버지 어머니는 도란도란 이 이야기 저 이야기로 날을 밝히시곤 했습니다. 자식 걱정, 강 건너 밭의 곡식 걱정, 때론 웃으시고 어떨 땐 근심어린 목소리가 내 방을 찾아오기도 했지요.
어느 해 봄 그 집에 한 여자가 찾아왔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딱 일년이 되던 날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그 집에서 살기로 작정을 했는지 그 집으로 자기의 인생을 옮겼습니다. 그녀는 그 집 가난한 방과 부엌에서 살았습니다. 부엌에서는 불을 때서 밥을 했습니다. 부엌에 연기가 캄캄하게 날 때면 그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밖으로 나와 바람을 쏘였습니다. 날이 가물면 나는 강가에 있는 샘에서 물을 길어왔습니다. 퇴근 길 아내가 강에서 빨래를 하고 있으면 나는 얼른 달려가 빨아놓은 빨래를 내 머리에 이고 돌아와 빨랫줄에 널었습니다. 그 여자는 내 아내가 돼갔고 촌사람이 돼갔습니다. 촌사람이 돼가면서 아내는 그가 살아온 그 어떤 것들을 버리고 튼튼한 그 어떤 것들을 새로 터득하고 몸에 익히며 배워갔습니다. 아내는 점점 건강한 생활을 하며 동네 어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갔습니다. 그 특유의 침착함과 낙천성은 더욱더 힘을 얻어갔습니다. 아내는 동네 나이 든 할머니들의 며느리였습니다.
어느 해 민세가 태어났고, 또 몇 년 있다가 민해가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무척 행복해했습니다. 손자를 얻어 날마다 안아주고 업어줄 수 있었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시골 어머니들은 손자를 안고 업고 키우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으니까요. 들에 갔다 오시면 어머니는 얼른 민해를 업고 다른 일을 하거나 마실을 다니곤 하셨습니다. 겨울철이면 늘 어머니는 아이들을 보셨고 아이들은 할머니 방에서 할머니의 쭈굴쭈굴한 젖을 만지며 잤습니다. 이따금 “너그 아부지가 다 뜯어 먹어서 이렇게 생겼다” 그러시면 민세나 민해의 “뜯어먹어” 하는 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새어나오곤 했습니다.
나는 그 집에서 가까운 조그마한 초등학교 선생이었기 때문에 도시락을 싸 들고 학교에 다녔습니다. 자전거를 가지고 학교에 다닐 때는 자전거 뒤에서 밥이 어찌나 흔들리던지 반찬이 엉망이 될 때도 있었고 빈 도시락을 싣고 집에 올 때는 시끄러운 소리가 집에까지 따라왔습니다. 어쩌다 아내가 민해를 업고 민세 손을 잡고 마을에서 훨씬 벗어나 들 가에 있는 느티나무 아래까지 마중을 나올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민세를 업고 들길을 걷곤 했습니다. 어쩌다가는 민세와 민해가 코를 이만큼 코에 물고 훌쩍훌쩍 울며 마중을 나올 때도 있었습니다.
비가 오면 아내는 꼭 우산을 가지고 마중을 나왔습니다. 집에 오면 나는 아이 둘을 보았습니다. 민해는 업고 민세는 손잡고 강변에 나가 강변 꽃밭에서 뒹굴며 놀거나 물가에서 놀다가 집에 와서 씻겨서 밥 먹여 잠을 재웠습니다. 민세는 업어 재우곤 했습니다. 민세를 업고 들에서 늦게 돌아오시는 어머니 마중을 나가면 어머니는 민세를 받아 업으시기도 했습니다. 민세는 업고 길을 걸으며 “호랑이 온다. 호랑이와” 그러면 내 등에 딱 붙으며 잠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을 씻겨 밥 먹여 재우고 나서 아내와 나는 빨래도 개고 책도 보고 오래오래 이야기도 하다가 어머니가 마실에서 돌아오시면 아내는 또 얼른 어머니와 이야기를 오래오래 어머니 방에서 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또 아내가 얼른 우리 방에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내가 신문을 보거나 내가 글을 써야 할 눈치를 보이면 아내는 얼른 아이들을 데리고 자리를 피해주곤 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그 집에서 살았습니다. 내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 내가 돌아가 몸과 마음을 뉘고 순결하고 순수했던 초심을 찾아 다시 세상으로 나가는 곳, 내 영혼의 쉼터인 그 집이 지금도 강 언덕에 그대로 있습니다. 아, 지금 티 없이 고운 하늘 아래 단풍 물든 산 속에 묻힌 집, 아름다운 그 집, 우리 집. 그 집은 나무와 풀과 흙으로 된 아주 작은 집입니다.
김용택 시인은…
아름다운 우리집
1948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다. 82년 등단한 뒤 시집 ‘맑은 날’ 등을 펴내 86년 김수영 문학상, 87년 소월시문학상 등을 받았다. 산문집 ‘김용택의 교단일기’ 장편동화 ‘옥이야 진메야’ 동시집 ‘콩, 너는 죽었다’ 등을 펴내며 다양한 분야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운암초등학교 마암분교 교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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