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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한국인 추기경으로 서임된 정진석 추기경

“가정을 회복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창조주 하느님의 뜻이지요”

글·윤정국‘동아일보 문화전문기자’ / 사진ㆍ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06. 04. 12

한국 가톨릭계가 큰 경사를 맞았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겸 평양교구 서리인 정진석 대주교가 2월 말 한국의 두 번째 추기경으로 서임된 것. “민족의 화해와 복음 전파에 힘쓰겠다”고 밝힌 정진석 추기경을 만나 가족사부터 신앙, 지도자론까지 솔직한 이야기를 들었다.

두 번째 한국인 추기경으로 서임된 정진석 추기경

지난 2월22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겸 평양교구 서리인 정진석 대주교(75·니콜라오)가 한국의 두 번째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이는 김수환 추기경 서임 이후 37년 만의 경사다. 1961년 사제 서품을 받은 정 추기경은 68년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대학에서 교회법 석사를 받은 ‘교회법의 대가’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생명’이 가진 의미를 환기시키는 데 공헌하고 남북 화해에 깊은 관심을 가진 지도자이기도 하다.
3월4일 오전 서울 명동성당 주교관 집무실에서 만난 정 추기경은 자신의 가족사는 물론 신앙, 북한, 지도자론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에 관한 솔직한 얘기를 털어놓았다.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정 추기경은 흡사 ‘우리 민족의 산타클로스’처럼 느껴졌다.
사실 기자는 2월22일 로마에서 교황 베네딕도 16세가 정 추기경 등 전 세계 신임 추기경 15명의 명단을 발표할 때 세계성지순례의 여정에 있던 한국 여성수도자들의 모임인 ‘삼소회’ 회원들과 함께 현장에서 가슴 떨리는 기쁨을 맛본 경험이 있어서 이날 인터뷰도 무척 감회가 깊었다.

월북해 북한에서 차관까지 지낸 아버지
“추기경님, 이 사진을 한번 보세요. 처음 보시는 건가요? 어떤 생각이 드세요?”
인터뷰는 정 추기경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출발했다. 미리 스크랩해온 신문 속 정 추기경 아버지의 사진을 들이밀자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우리 신부님들이 그 사진을 보더니 나와 붕어빵이래. 빼닮았다는 거야.”
정 추기경은 자신의 아버지 정원모씨의 얼굴을 얼마 전 신문에 난 1930년대 동아일보 사진으로 처음 접했다. 그전에는 아버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몰랐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사회주의운동을 하다가 3년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적이 있으며 광복 직후 월북해 북한의 공업성 차관까지 지냈다가 숙청당했다.
“저는 1931년 서울 수표동 외할아버지 집에서 태어나 자랐어요. 당시 아버지는 대학생 신분이었던 것 같고, 어머니(이복순·96년 작고)는 친정살이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외갓집에서 광복될 때까지 외삼촌, 이모들과 함께 살았지요. 제가 외할아버지 맏딸의 맏이로 처음 본 손자여서인지 외할아버지는 제게 아버지 역할을 대신 해주었어요. 저는 아버지에 대한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했고, 부정(父情)의 아쉬움도 못 느꼈어요. 외삼촌이나 이모들도 아버지 없이 자라는 저를 불쌍히 여겼는지 제가 마음 상할 이야기는 하지도 않았습니다.”
정 추기경의 외할아버지는 경대(鏡臺·화장대)를 만드는 공장을 운영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경대는 당시 여성들이 결혼할 때 가져가는 혼수품목 1호로 많은 사람들이 갖고 싶어한 물건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원목을 제재하는 공장 뿐 아니라 나무를 판자로 만들고 이를 경대로 만드는 공장까지 갖고 있었다. 이 공장들에는 20여 명의 일꾼들이 일했고 이들은 외갓집에서 점심식사를 했기에 항상 집안이 붐볐다. 정 추기경의 어머니는 부엌일을 거들어주면서 아들과 함께 친정에서 살았다고 한다. 외갓집은 대대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으며 외할아버지는 명동성당의 교우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어머니는 제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도 하시지 않았어요. 어릴 때는 아버지란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도 아버지 없이 어머니 혼자 아기를 낳을 수 있다고 우긴 적도 있어요. 그러나 철이 들 무렵 ‘내 아버지가 누굴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지요. 그때마다 어머니께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면 어머니에게 상처를 줄 것 같아 묻지 않았어요. 그 뒤 주위 친척들이 아버지가 북으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해줘 어렴풋이 알게 됐지요.”

두 번째 한국인 추기경으로 서임된 정진석 추기경

1960년 부제 서품을 받은 직후 어머니 이복순씨(정 추기경 오른쪽)와 함께 서울 명동성당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정 추기경이 아버지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광복 직후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하며 호적초본을 떼어보고서였다. 그때부터 추기경은 아버지 때문에 고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자신 때문에 처갓집이 망하는 것을 원치 않아 발길을 끊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유복한 외가에서 크도록 자신을 희생했을 것으로 추측돼요. 민족의 역사에 휘말려 우리 가족이 이렇게 된 것이지만 결코 개인적으로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유했던 외갓집은 한국전쟁 때 재산이 불타 없어지는 바람에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고 한다. 정 추기경은 이 때 ‘재산도 다 헛것이구나’ 하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고.
북한으로 올라간 아버지가 다시 결혼해 자녀들을 낳았다면 이복동생들이 있을 것인데 한번 만나보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에 정 추기경은 “때가 되면 방문해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서두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간을 가장 아깝게 생각하며 시간을 뜻 깊게 사용하는 것”이 삶의 모토
화제를 돌려 추기경의 신앙생활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추기경은 서울 명동의 계성초등학교를 나왔으며 독실한 가톨릭 집안인 외갓집에서 어릴 때부터 천주교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고 한다. 계성초등학교를 나와 중앙중 2학년(중·고교를 합친 6년제 중학교의 마지막 졸업생) 때 중앙중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에 간 선배가 당시 이념서클인 독서클럽을 조직해 추기경도 여기에 가입한 적이 있다.
그 선배가 하루는 후배 5, 6명을 모아놓고 변증법적 유물론을 설명하면서 “하느님은 없다” “영혼도 없다”라고 말했을 때 추기경은 그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던 그도 광복 후 혼란기에 이념문제로 방황한 적이 있었다. 그러던 중 47년 명동성당에서 윤형중 신부의 ‘종교의 근본문제’라는 강연을 듣고 크게 감동받아 신앙심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 강연이 끝나면 ‘한 많은 슬픔에’란 노래를 울면서 불렀는데 지금도 그 노래만 나오면 추기경은 조건반사적으로 눈물이 나온다고 한다.
명동은 이처럼 추기경이 태어나 자라고 교육받고 회심해 갈 길을 정한 터전이었다. 정 추기경은 70년부터 98년까지 청주교구장을 지냈을 때를 제외하고는 명동을 떠난 적이 없었다. 이를테면, ‘명동 키드’인 셈이다.
추기경에게 생활의 모토를 묻자 “모토대로 살지는 못하지만 시간을 가장 아깝게 생각하며 시간을 뜻 깊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 내가 의미 없이 보낸 시간은 ‘몇 분’인가 반성할 때가 많아요. 시간을 아까워하다 보니 가장 가치 있는 것에 시간을 사용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취미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게 아쉽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시간을 주어야 하는데 시간이 아까워 주지 못할 때 미안한 생각이 들어요. 사랑도 못 주고, 시간도 못 주고… 정성은 주는 척하는데 말이죠(웃음).”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을 묻자 추기경은 사제 서품 받을 때 선택한 구절이기도 하다며 예수님이 제자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말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란 질문이라고 말했다. 예수님이 위급한 순간에 얼마나 사랑을 갈구했으면 베드로에게 이같이 말했겠느냐는 게 추기경의 해석이다. 베드로는 이때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감히 말하지 못하고 “주님이 잘 아시잖아요?”라고 얼렁뚱땅 대답하고 넘어갔다며 자신도 베드로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했다.
정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으로서 행복한 가정을 위한 ‘가정 사목(司牧)’을 늘 강조해왔다. 오늘날 가족이 해체되는 위기상황에 대한 추기경의 생각은 남달랐다.
“가정을 회복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창조주 하느님의 뜻이지요. 가족이 깨지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하느님이 주신 평화와 행복을 가정에서부터 찾아야 합니다. 가정은 사랑을 실천하는 장소요, 하느님이 영광을 드러내는 성소이기도 합니다. 가족 구성원들은 의견이 달라도 서로 양보하면서 사랑하십시오.”

글 쓰면서 연애감정 극복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하게 사는 것인가란 질문을 거듭 드리자 정 추기경은 “물질과 정보의 노예에서 벗어나 영성과 문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두 번째 한국인 추기경으로 서임된 정진석 추기경

정진석 추기경은 신자들을 위해 많은 신앙안내서를 펴냈다.


“안경이 필요한 사람에게 안경이 없으면 불행합니다. 그러나 안경이 없어도 되는 사람에게 안경은 쓸모없지요. 물질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진정 자유인입니다.”
특히 청소년들은 물질만능주의에서 벗어나 문화생활을 향유하며 자라야 한다면서 서울 명동성당 입구에 청소년 문화공간인 ‘주’를 세운 이유를 설명했다.
정 추기경에게 연애감정을 느낀 적이 없느냐고 좀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아이고…” 하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추기경은 자신의 청년 시절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들려주었다.
“6·25 전쟁 때 주위에서 너무 많은 죽음을 목격했고 나 자신도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겨 이후의 삶은 덤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하느님께 남은 인생을 바쳐야겠다고 마음을 정하고 신학교에 갔지요. 인생과 세상의 허무함을 깊이 느낀 탓인지, 그전에 서울대 공대에 입학했지만 새 과학기술을 발명해봐야 별 볼일 없겠구나 싶어 신학교로 옮긴 것이지요.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다면 절에 가서 스님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라고 왜 그런 연애감정이 없었겠어요? 그걸 어떻게 극복했느냐 하면… 글을 쓰는 것으로 이겨냈지요. 첫 번째 책을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인 53년에 냈는데 ‘성녀 마리아 꼬레띠’란 영어책을 번역한 것이었습니다.”
마리아 꼬레띠는 이탈리아 소작인 농부의 딸로 약간 모자란 소녀였다. 집 계단에서 옷을 깁고 있을 때 이웃집 청년 알렉산데르가 그를 침실로 데려가 겁탈하려 했다. 그러자 꼬레띠는 “안 됩니다. 그건 죄입니다”라며 반항했고, 알렉산데르는 분별력을 잃고 단도를 마구 찔러 꼬레띠를 살해했다. 순결 때문에 순교한 마리아 꼬레띠는 나중에 성인 반열에 올랐다.
추기경은 이 같은 책 내용을 들려주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순결을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이 이때 깊이 각인됐다”고 말했다. 추기경은 이때 사제에게 필요한 순명, 청빈, 정결의 3대 서원 중 정결의 맹세를 한 셈이었다.
추기경은 그 후 ‘경향’ 잡지 등에도 정기적으로 글을 쓰면서 문재(文才)를 인정받았고 신학교에 들어가서는 ‘작가가 왔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신학생 때는 자기 이름으로 책을 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 이상 책 내는 것을 단념했다. 그러다가 부제 때 ‘억만인의 신앙’이란 책을 번역했다. 이 책은 나중에 수녀원의 교리교과서가 됐다. 천주교 책이 다양하지 않을 때 추기경은 신자들을 위해 신앙안내서를 많이 펴냈던 것이다. 지금까지 추기경은 34권의 저서와 14권의 번역서를 냈다.
정 추기경에게 사회·정치적인 질문을 몇 가지 던졌다. 김수환 추기경은 69년 추기경 서임 이후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애써왔는데 앞으로 정 추기경은 자신의 몫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먼저 물었다. 정 추기경은 남북의 화해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제가 추기경이 된 후 첫 번째 취한 제스처는 ‘회개와 참회의 보속물(가톨릭에서 지은 죄 때문에 일어난 나쁜 결과를 보상하는 물건)’을 경기도 파주시 통일동산에 세우자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남북한이 서로 용서를 청하자는 것이지요. 남북이 마음을 닫고 의심만 하면 평화가 이뤄지겠습니까. 서로 마음을 열고 통하려면 전쟁 때 서로 저질렀던 잘못을 회개하고 상호 용서를 구해야겠지요. 얼마 전 이종석 통일부 장관이 왔기에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동의하더군요.
4월 중 착공해 2년 정도 공사한 뒤 2008년경 완공될 것 같습니다. 성당과 화해센터 2개 동으로 구성되는데 모두 전쟁 전 북한 교회의 모양을 본떠 짓는 것으로 설계했습니다. 앞으로 관광객들도 전쟁터 위에 세워진 판문점보다 이곳을 더 많이 찾아 남북한이 화해와 보속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제1보를 내딛고자 합니다.”

“지도자는 자신 돌보지 않고 오직 백성만 생각해야”
북한의 김정일을 믿을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어떻게 개인을 믿겠는가. 마음이 열려야 대화가 가능하기에 마음을 열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한다. 물질을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대화가 안 된다”며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도 있다”고 덧붙였다. 북한에 대한 일방적 퍼주기는 국민 감정에도 부합하지 않아 더 이상 어렵지 않겠느냐는 게 정 추기경의 생각인 듯했다. 서울대교구는 북한에 지난 10년 동안 매년 10억원씩 모두 1백억원을 지원해왔다.

두 번째 한국인 추기경으로 서임된 정진석 추기경

2월22일 추기경으로 임명된 정진석 서울대교구 대주교와 김수환 추기경(오른쪽)이 이날 저녁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손을 맞잡고 기쁨을 나누고 있다.


추기경은 “북한에 영접해줄 사제가 없어 교황이 북한을 방문하지 못한다면 정 추기경이 먼저 갈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에 “과거 정주영 회장이 큰 배포를 베풀어 같은 정씨인 나까지 영향을 받고 있다. 북한 가려면 트럭 5백 대에 뭘 가득 채우고 봉투도 마련해야 한다고 하는데…”라고 말해 북한 측이 정 추기경에게도 방북의 전제조건으로 큰 재정적 지원을 요청했음을 시사했다.
정치의 계절을 맞아 대권주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지도자론이 돌아왔다.
“구약시대의 모세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백성만 생각했어요. 지도자는 이처럼 오로지 백성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의 지도자는 어떤가요? 자기 생각은 반만 하고 나머지 반만이라도 백성을 생각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정 추기경에게 세례명이 니콜라오인 이유를 물었다.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제 생일이 산타클로스로 불리는 터키의 성인 니콜라오의 축일(12월6일)과 가깝기 때문이지요.”
그러고 보니 정 추기경은 흰 눈썹과 흰 머리카락에 인자한 웃음이 영락없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닮았다. ‘그가 우리 민족에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되어줄 것인가?’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마지막으로 로마 추기경 서임식에 참가해 붉은색의 추기경 주게토(빵모자)를 씌워주는 교황에게 무슨 말을 건넬 것인지 물어봤다.
“짧은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드릴 수는 없을 거고…. 내가 소임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기도해달라고 말하겠어요. 아마 교황님께서 평양교구장을 겸하고 있는 제게 평양 이야기도 좀 하시겠지요.”
현재 전 세계적으로 추기경이 2명 이상인 나라는 30여 개국이다. 한국도 이번에 추기경 2명을 냄으로써 30위권 안에 들게 된 것이다. 정 추기경은 이번 서임식에 참가하면 한국을 바라보는 로마의 시각이 달라져 있음을 느낄 것이다. 정 추기경은 3월24일 로마에서 열리는 신임 추기경 서임식과 이에 앞서 우르바노대학에서 개최되는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인터뷰 다음 날인 3월5일 로마로 출국했다. 3월 말 귀국하는 정 추기경이 김 추기경과 함께 어떻게 역할을 분담해 한국 가톨릭교회를 이끌고 나갈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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