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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유인경의 Happy Talk

잡스러운 행복을 추구하자

2005. 03. 03

사람들은 항상 지나친 엄숙주의에 빠져 고상하고 우아한 것만 찾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와 나누는 잡담, 매일 생명을 유지해 주는 살림이라는 잡일, 이것저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생겨나는 잡념 등 잡다하고 사소한 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유쾌하고 아기자기하게 만든다. 잡스러운 일은 몸과 마음의 여유 없이는 하기 힘들다. 나이와 명예를 잊고 소박하고 겸허하게 살면서 잡스러운 행복에 충실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관대해지고, 다른 일도 신나게 해서 효율도 높아진다.

잡스러운 행복을 추구하자

얼마전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얼굴이나 보자고 해서 모인 저녁식사 자리. 가수 조영남씨와 고위직 공무원, 몇몇 신문사 간부들이 참석했다. 평균 연령이 거의 50세로 나이를 다 합하면 3백 살이 넘는 ‘고려장’ 수준의 자리였다. 나를 제외하고는, 지성인이라고 칭해주지 않으면 화를 낼 만한 수준의 사람들이 모여서 처음엔 고상하고 우아하게 한일문제, 와인 등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프랑스 보르도 지방 등 유명한 와인산지 이야기를 시작으로, 혀를 왼쪽으로 굴렸을 때와 오른쪽으로 굴렸을 때 다른 맛을 낸다는 샤토디켐의 고아한 향미를 논하고, 광복 60주년 기념사업에 관한 거국적인 이야기도 나눴다. 참 유익한 대화였건만 별로 기억에 남지 않는다.
거의 식사가 끝날 무렵, 한 40대 후반의 독신 남성이 진지한 표정으로 조영남씨에게 물었다.
“제가 지금 내복을 입고 있거든요. 아마 국군의 날에 입기 시작해서 식목일쯤 벗을 거예요. 그런데 내복을 입는다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더라고요. 내복 입는 게 무슨 문제인가요?”
너무도 엄숙하게 질문을 해서인지 조영남씨의 표정도 숙연했다.
“당신이 내복 입는 게 뭐가 문제겠어. 남들에게도 입으라고 강제로 권하는 것도 아니고 남들 내복 빼앗아 입는 것도 아닌데…. 다만 4월까지 입는다면 그건 좀 문제지. 봄의 입장을 생각해봐. 겨울이 가고 기껏 봄이 찾아왔는데 악착같이 내복을 입고 있는 당신을 보면 얼마나 섭섭하겠어. 그건 봄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내복에 얽힌 이야기를 하며 비로소 화기애애해진 저녁식사 자리
스물스물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기 시작했다. 여전히 진지한 그 내복남(?)은 질문을 이어갔다.
“여자들은 내복을 입는 남자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여자 만나고 사귀는 데 내복이 걸림돌이 되려나?”
불행히도 그 자리에 그 질문에 대답해줄 젊은 여성이 없었기에 내가 30대 독신녀에게 휴대전화로 내복 입은 남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그녀의 답은 명쾌했다.
“에너지 절약 차원에서 내복을 입는다면 훌륭한 분이네요. 뭐, 내복 입는 남자, 상관없어요. 나랑 소개팅할 남자만 아니라면요.”
그 말에 사람들은 뒤집어졌다. 그리곤 무장해제가 되어 2시간여 동안 내복에 얽힌 추억과 각종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다들 너무 웃어서 허리와 어깨까지 아플 정도였고 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웃어 번진 화장을 고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느끼한 고기를 먹고 좁은 방에서 수다를 떨었건만 마치 함께 등산이라도 한 듯 개운한 몸과 마음으로 헤어져 돌아왔다. 만약 줄곧 진지한 대화만 이어졌다면 소화도 잘 안 되었을 테고 서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며 대화에서 소외되지 않으려고 머리를 굴리느라 엄청 피곤했을 게다.
우리는 항상 인생에 대해 지나친 엄숙주의에 빠져 있는 경향이 있다. 말도 고상하고 우아하게, 대화 주제도 형이상학적인 것이어야 이야기할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와 나눈 유쾌한 이야기도 잡담으로 분류되고 시험이나 취직 등 실질적인 이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공부는 잡학이라고 폄하된다.

잡스러운 행복을 추구하자

매일 우리의 생명을 유지해 주는 밥짓기, 빨래, 청소 등의 살림 역시 잡일로 분류된다. 직장에서도 자료정리 등의 일은 잡무로 나눠 쓸데없는 일로 여긴다. 신문보다 훨씬 심도 깊고 유익한 정보를 담아도 생활기사로 채워지면 ‘잡지’가 된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한 가지 주제로 심오한 명상을 하는 게 아니라 마음 가는 대로 이것저것 떠올리면 `’잡념’이라고 생각해 “아,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라면서 자기를 책망하게 된다.
하지만 잡담, 잡일, 잡화, 잡지, 잡념 등 잡다하고 번잡한 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얼마나 재미있고 아기자기하게 만드는가. 그런 잡스러움 없이 숭고한 일로만 이어지는 생활은 얼마나 숨막힐까. 문화인류학자이며 ‘슬로 라이프’의 저자인 쓰지 신이치는 이렇게 말한다.
“잡스러움의 재생을 위해 여성들이 얼마나 중요할지 상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여성들은 지금껏 남자들이 성가셔하는 잡일을 담당해 오면서 경제산업의 직접적인 시간과는 동떨어진 여유롭고 느긋한 시간을 살아내는 기술을 몸에 익혀왔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관용적이고 참을성도 많다. 21세기를 ‘여성의 세기’라 부르는 이유를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봄날’ 조인성의 눈물에 덩달아 울고, 코미디 프로 보며 자지러지게 웃으면서 살고 싶어
평소에도 충분히 잡스러운 일로 내 삶을 채워 왔지만 앞으로도 계속 잡일을 즐기며 잡담을 나누고 잡다한 일에 호기심을 갖고 살 예정이다. 잡스러운 일은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이는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뭔가 대단한 일, 위대한 업적을 이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소박하고 겸허한 삶을 살아야겠다. 대의명분을 내세워 개인적인 삶과 행복을 희생하는 훌륭한 이들의 노력 덕분에 세상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지만, 난 나의 잡스러운 행복에 치중하고 싶다. 내가 행복하고 만족스러워야 타인에게도 관대해지며 다른 일을 할 때도 신나게 해서 효율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나잇값을 해야 한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나이에 걸맞은 높은 자리를 탐내며 욕구불만에 시달리기보다 내 나이가 몇 살인지는 잊어버리고 드라마 ‘봄날’에 나오는 조인성의 눈물에 가슴이 메어져 덩달아 울고, 코미디 프로에 자지러지게 웃고, 철학책이 아니라 만화책을 보면서 언제나 이 꽃 저 꽃이 피어나는 ‘봄날의 정원’처럼 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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