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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안타까운 사연

폐결핵으로 건강 악화된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 석방 구명운동 벌이는 아내 이영숙

“휠체어와 산소호흡기에 생명 의지하는 남편, 제발 가정에서 돌보게 해주세요”

■ 글·최호열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2004. 10. 11

지난 98년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씨와 옥중결혼해 화제를 모았던 이영숙씨가 휠체어와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살고 있는 남편의 출소를 위해 눈물겨운 구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10월3일 형기가 끝나지만 보호감호란 이름으로 감호소에서 7년을 더 살아야 하기 때문. 그의 애끊는 심경과 남다른 부부사랑을 들어보았다.

폐결핵으로 건강 악화된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 석방 구명운동 벌이는 아내 이영숙

70~80년대 한국 주먹계를 휩쓸었던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씨(57)의 석방을 위해 아내 이영숙씨(56)가 눈물겨운 구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현재 청송교도소에 수감 중인 김씨는 오는 10월3일로 형기가 끝나지만 보호감호 7년이 따라붙어 있어 출소가 불가능한 상황.
“법에서 정한 형을 다 살고 죗값을 치른 남편을 보호감호라는 이름으로 또다시 감옥에 가둔다는 것은 너무나도 잔인한 인권유린이에요. 같은 죄로 이중처벌을 하는 거잖아요.”
그는 남편의 보호감호 재심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미 재판부에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세계침례교회 총회장 김장환 목사 등 종교계와 정치인 등 각계 인사들의 탄원서를 받아 제출한 상태다.
“밖에 있는 제가 열심히 뛰어야죠. 아픈 사람을 7년 동안 더 감옥에 가둔다는 건 죽은 다음에 나오라는 말이나 마찬가지거든요. 이번에 못 나오면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를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예요.”
이씨는 지난 9월14일 처음 열린 재판에서 판사가 “그 몸으로 재판을 받을 수 있겠냐”고 물었을 정도로 김씨의 건강상태가 최악이라고 말한다. 움직일 때는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고,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가빠와 산소호흡기를 껴야 한다는 것.
“지난해 봄까지는 아무리 사정을 해도 환기가 잘 안 되는 독방에 가두어두었는데 지금은 환기가 되는 방으로 옮겨주고 다른 죄수와 함께 지내도록 하고 있어요. 혼자 두었다가는 언제 위급한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김씨의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것은 89년. 당시 교도소에 복역 중이던 그는 폐암말기 진단을 받아 왼쪽 폐를 완전히 절개하는 대수술을 받고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하지만 90년 ‘범죄와의 전쟁’으로 또다시 구속돼 징역 10년(형 집행정지 4년 포함 14년)에 보호감호 7년이라는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던 중 2001년 4월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은 데 이어, 2002년 12월 폐기능과 간기능이 위험수위에 이르렀다는 진단을 받았다. 지난 7월에 다시 검사를 받았을 때도 폐활량이 정상인의 43%밖에 안 되고, 폐결핵과 심한 제한성 환기장해를 앓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더욱이 폐암이 언제 재발될지 모르는 상태.
“폐가 하나밖에 없어 폐결핵에 자주 걸려요. 젊은 사람도 힘든 병인데 벌써 환갑이 가까운 나이고, 교도소라 음식도 변변찮은데다 의료시설도 열악해 상태가 점점 악화되고 있어요.”
그는 면회를 할 때마다 남편이 휠체어를 타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면회실에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 ‘차라리 내가 저 아픔을 대신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미어진다고 한다. 그런 남편이 또다시 청송감호소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그로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라고.
“남편은 몸도 몸이지만 이제 법이 정해준 형기를 다 채웠으니 죗값을 치른 셈이에요. 나이도 있어 또다시 죄를 지을 가능성도 없고요. 감옥에서 청춘을 다 보낸 사람이에요. 뒤늦게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린 남편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김씨 역시 보호감호 재심청구서에 “만약 나에게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이 있었다면 청춘을 범죄 속에 방황하며 허송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혼자 몸일 때는 범죄를 쉽게 저질렀지만 이제 사랑하는 아내와 장성한 아들을 얻었기에 한 가장으로서 늦게나마 행복을 찾고 싶다”며 사회에 나가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다는 의지를 강하게 피력했다.

폐결핵으로 건강 악화된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 석방 구명운동 벌이는 아내 이영숙

이씨가 김씨와 인연을 맺은 것은 96년 12월. 평소 봉사활동을 함께 하던 교회 선배로부터 “청송교도소에 김태촌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교화해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70년대 가수로 활동하며 ‘그림자’ ‘꽃목걸이’ ‘가을이 오기 전에’ ‘아카시아 이별’ 등의 히트곡을 남겼고 영화 ‘7인의 신부’에 출연하기도 했던 그는 연예계 은퇴 후 교도소, 고아원, 양로원 등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씨는 다른 재소자들에게 하듯 김씨에게 편지를 보냈고, 답장이 왔다.
“처음엔 조직세계에 몸담고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언론에 오르내리는 거물급이라는 사실은 몰랐어요. 그런데 답장을 읽어보니 ‘누가 이 사람을 폭력배라고 했을까’ 싶을 정도로 영혼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었어요. 조직폭력배 하면 잔인한 사람일 거라 생각하는데 어린아이처럼 순박했어요.”
두 사람은 서신왕래를 계속했고, 늘어나는 편지만큼 애틋한 감정도 커져갔다.
“남편은 편지를 통해 부모님 이야기, 조직세계에 발을 딛게 된 계기 등 다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를 진솔하게 들려주었어요. 지금은 과거를 후회하고 있고 출소하면 새 삶을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했죠.”
연민은 우정으로, 다시 사랑으로 발전했다. 그가 2004년 10월까지 복역을 해야 한다는 것도, 그 후에도 보호감호로 7년을 더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암투병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98년 11월 면회를 통해 만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부부의 연을 맺기로 합의했다. 그 소식을 듣고 이씨의 집에선 극심한 반대를 했지만 그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사실 두 사람은 가정적으로 매우 불행한 편이었다. 밤의 황제였던 김씨는 밤무대 가수와 10여 년의 열애 끝에 결혼한 남다른 러브스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92년 청송교도소로 이감되자 아내가 당시 수억원의 재산을 가지고 미국으로 도피, 현지법원에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폐암이라는 시한부 생명으로 수감생활을 하던 그에게 이혼소송은 큰 충격을 주었다. 이씨 역시 20대 후반에 사랑에 빠졌다가 아들 하나를 낳고 이별한 뒤 혼자 몸으로 아이를 길러왔다.
“처음엔 결혼 약속만 하고 남편이 출소하면 그때 식을 올리고 부부가 되려고 했어요. 그런데 직계가족이 아니면 면회 자체가 어려웠어요. 결국 혼인신고를 먼저 하고 결혼식은 출소 후에 하기로 했죠.”
이씨는 99년 3월31일자로 직접 혼인신고를 했다. 두 사람은 옥중 결혼식을 하려고 했지만 교도당국의 불허로 무산돼 현재까지 식도 못 올린 채 부부의 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매주 한 번씩 청송교도소로 향한다. 8시간 걸려 도착해 또다시 2∼3시간 가량 기다리지만 남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은 고작 10분 내외. 그마나 특별면회라도 되면 남편 손이라도 잡아보련만 이마저도 금지돼 투명 아크릴판 너머로 남편의 얼굴만 바라보아야 한다.
“하고 싶은 말은 정말 많은데 정작 면회를 할 때는 하고 싶은 말을 못해요. 교도관이 옆에서 다 듣고 있는데 어떻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요. 그래서 더 마음 아프죠. 그런데 남편은 자신이 아픈데도 늘 저를 걱정해요. ‘내가 아무리 연약한 병자이지만 언젠가 좋은 가정 이루고 살 것이니까 기다리라’고 격려를 하고요.”
비록 지금까지 손 한번 못 잡아보고 마음 놓고 이야기해본 적도 없지만 그는 80년을 산 부부보다도 서로의 속마음을 더 잘 안다고 자신한다. 눈빛만 보고도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는 것.
그에겐 아들이 있다. 아들은 김태촌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같이 면회도 가고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한다. 설에는 면회를 가서 무릎 꿇고 세배도 드린다고.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의 정을 못 받고 자랐잖아요. 그래서 아버지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하더라고요. 출소하면 모시겠다는 말도 하고요.”

폐결핵으로 건강 악화된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 석방 구명운동 벌이는 아내 이영숙

70~80년대 암흑가를 주름잡았던 김태촌씨는 지금 폐결핵으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라고 한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남편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든 적이 없었냐고 하자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이 사람이랑 살 것이고, 다시 태어나도 이 사람하고 살 거예요. 식물인간이 되더라도 부부의 길을 갈 겁니다. 그 생각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어요. 남편이 있기에 제가 있고, 또 제가 있기에 지금 남편이 살아 있으니까요.”
김태촌씨 역시 이씨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모양이다.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같은 땐 종이학을 접어 보내는가 하면, 지금까지 보내온 편지만 벌써 1천 통 가까이 된다.
“남편은 지금도 산소호흡기를 끼고서라도 편지를 써요. 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죠. 한밤중에 벨소리만 울려도 깜짝 놀라요. 교도소에서 나쁜 일로 연락이 온 게 아닐까 싶어 불안하고요. 그런 제 마음을 아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늘 편지를 보내요.”
두 사람은 지금 출소 후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우선 요양을 하며 건강을 추스른 후 서예학원을 차리겠다고 한다. 이씨에 따르면 김씨는 교도소에서 틈틈이 서예를 배웠는데 각종 서예대회에서 입상을 할 정도의 실력이라고 한다. 최근에도 한국현대미술인협회가 주는 상을 수상했다고. 또한 한문 서예를 하기 위해 한자도 열심히 배워 한자 5급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고.
이씨도 오는 12월쯤에 암환자를 위한 콘서트를 열 계획이다. 여전히 자신을 찾는 라이브 무대가 많다는 그는 남편이 건강을 회복하는 대로 가수로 컴백할 욕심도 가지고 있다.
“모든 게 남편이 나온 후의 이야기죠. 그럴 리가 없지만 만약 이번 재판에 지면 항소를 해서라도 남편을 석방시킬 거예요. 남편이 더 병들기 전에 가정으로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마음이에요.”
그의 목소리엔 간절함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이씨의 꿈은 10월3일 남편이 꼭 출소해 한 이부자리에서 자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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