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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나도 인기스타

굵직한 시민행사 도맡아 진행하는 ‘거리의 인기 MC’ 최광기 주부

“평소에는 조용한 편인데 무대에만 오르면 ‘광끼’가 나오네요”

■ 기획·최미선 기자 ■ 글·박진숙 ■ 사진·정경택 기자

2003. 05. 14

최근 ‘살아있는 성불’이라 불리며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고 있는 틱낫한 스님이 한국을 방문해 ‘전국민평화염원대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이 행사를 진행한 사람은 유명 MC가 아닌, 옆집 아줌마처럼 털털한 모습의 주부 최광기씨. 저돌적이면서도 재치 있는 말솜씨를 자랑하며 시민운동 전문 사회자로 인기를 끄는 그를 만났다.

굵직한 시민행사 도맡아 진행하는 ‘거리의 인기 MC’ 최광기 주부

수많은 축제나 거리의 행사에서 광기(?)를 발휘하며 무대의 흥을 돋우는 아줌마 사회자 최광기씨(34)는 겉모습부터 여느 사회자와는 달랐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헐렁한 티셔츠를 걸친, 조금은 펑퍼짐한 ‘아줌마’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런 그가 무대 위에만 서면 우렁찬 목소리로 “죽여, 좋아, 한곡 더!”를 외치며 “아흔아홉번 쓰러져도 단 한번의 승리를 위해 일어나듯이 우리는 일어나고 승리할 것”이라며 관객들에게 희망을 북돋우고, 마치 전사처럼, 혹은 밤무대의 진행자처럼 웃기고 울리면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는 사실이 그의 모습만 봐서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유명 연예인들을 쩔쩔매게 만드는 ‘아줌마’ 사회자
“제가 무대에 올라가면 관객들은 두번 놀라요. 이름은 남자 같은데 알고보니 여자라서 놀라고, 보기에는 수더분하고 평범한데 무대에만 올라가면 광기를 발휘하며 관중을 휘어잡아 또 놀라죠(웃음).”
최씨는 공중파를 탄 적은 없지만 ‘월경페스티벌’ ‘안티미스코리아’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등 굵직굵직한 시민행사를 10년 동안 진행한 베테랑 사회자다. 그 바닥(?)에서는 이미 캐스팅 0순위로 꼽히는 ‘인기스타’. 지난 3월, ‘3·8여성대회’에서는 연극배우이자 탤런트인 권해효씨와 함께 사회를 봤고, 지난 3월22일 진행된 ‘틱낫한 스님 초청 전국민평화염원대회’에서는 탤런트 유인촌씨와 진행해 재야에서 대중 곁으로 한결 가까이 다가왔다.
“공중파 방송을 일부러 꺼리는 것은 아니에요. 안 불러주니까 못하는 거죠(웃음). 그러나 특별한 신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행사를 고르는 기준은 있어요. 행사의 의미와 취지가 명확하고, 제 삶의 원칙과 크게 어긋나지 않아야 해요.”
아무리 작은 무대라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면 ‘노 개런티’를 감수하고 달려간다. 지금까지 그는 여성단체, 노동단체, 장애인단체, 환경단체 할 것 없이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은 열일을 제치고 달려가 사회를 맡았다. 매니저도 없이 그저 똘똘 뭉친 건강한 ‘끼’ 하나만으로 무대를 지켜왔다.
최씨는 특히 무대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해 많은 ‘전설’을 남기기도 했다. 2000년 7월, 금융노동자 총파업 행사 때는 임신 2개월의 몸으로 밤 10시부터 다음날 아침 10시까지 장장 12시간 동안 꼬박 사회를 봤다. 2001년 4월엔 출산 예정일을 10일 앞둔 몸으로 서약서까지 써가며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 행사에 다녀왔다. 그의 ‘독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난해 11월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에서는 행사가 시작되자마자 높은 무대에서 떨어져 팔꿈치 골절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무대를 지켰다. 그는 이 사고로 두 차례나 수술을 받았고, 아직까지도 팔이 완전하게 펴지지 않는다고 했다.
최씨가 이토록 몸을 불사르며 무대를 지켜내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곳(무대)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죠. 저는 평소에는 말도 적게 하고 재미도 없는 사람인데 이상하게도 무대에 올라가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신이 나요. 전 참석한 분들이 최대한 재미나게, 의미 있게 즐길 수 있도록 ‘관객 제일주의’로 사회를 봐요. 그러면서 배고픈 사람의 심정, 가난한 사람의 입장을 최대한 잘 전달하려고 애쓰죠. 그들이 가려워하는 곳을 팍팍 긁어준다거나 감성과 이성이 조화를 이룬 이야기를 하니까 관객들은 ‘말 잘한다, 속이 시원하다’며 칭찬을 해줘요. 그럴 때 정말 뿌듯하고 기분이 좋아요.”
평소엔 굵고 탁한 목소리가 마이크를 대면 낭랑하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변하는 것도 그렇고, 자원 봉사하는 마음으로 시민단체 행사를 찾은 유명 연예인들을 쩔쩔매게 만드는 거침없는 말솜씨를 보면 그는 영락없는 무대 체질이다. 그 앞에서는 누구도 몸을 뺄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특히 ‘비싼 몸값’을 치른 인기 가수일수록 예정된 곡보다 한두 곡 더 부르고 가야 한다. 무대를 휘어잡는 그의 말솜씨에 당해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굵직한 시민행사 도맡아 진행하는 ‘거리의 인기 MC’ 최광기 주부

연극배우겸 탤런트로 활동하고 있는 권해효씨와 함께 한국여성단체에서 주최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최씨.


“사람들이 공연을 한번 보러 온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그렇게 귀한 시간을 내서 온 관객들에게 최대한 본전을 뽑아드리려는 거죠(웃음). 최근엔 시민공연에서도 연예인을 초청하는 일이 늘고 있어요. 저도 유명인들과 같이 사회를 본 사람입니다(웃음). 홍석천씨는 보는 그대로 발랄하게 진행을 하고, 권해효씨는 마음이 따뜻해요. 홍석천씨는 ‘안티 미스코리아’를 함께 진행하면서 친해져 지금도 가깝게 지내죠. 연예인이 많이 출연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공연을 보러 오는 장점은 있어요. 하지만 때론 행사의 취지에 맞지 않은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것을 보면 걱정이 되기도 해요.”
10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시민공연 전문 사회자로 활동해온 최씨. 지금껏 그 어떤 무대도 소중하지 않았던 것이 없다. 그러나 요즘은 세월의 흐름에 맞춰 변화하는 공연문화가 아쉽게 느껴질 때도 있다고 한다. 비록 화려하고 세련되지는 못해도 순수함과 풋풋함이 묻어있는 시민공연의 색깔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끔은 책임감과 함께 부담감을 느낄 때도 있다.
“처음 사회를 볼 때는 거친 모습 그대로 ‘끼’를 발산했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었던 것 같아요. 공연은 원래 짜여진 연출, 음향, 반주와의 약속인데 전 제 마음대로 무대를 쥐고 흔드니까 스태프들이 당황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죠. 지금은 저도 세련된 사회를 보고 타협도 많이 해요(웃음). 사실 그래서 고민도 많이 해요. 시민공연은 함께 놀고, 함께 문제를 푸는 나눔의 문화예요. 그런데 요즘은 시민공연들도 전문화하고, 동참하는 사람들도 자기 것만 고집하는 이기적인 모습들이 보여져서 안타까워요. 그래서 앞으로는 더욱더 초심으로 돌아가 변치 않는 모습으로 자리를 지켜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합니다.”
‘거리의 사회자’로 명성을 얻은 최씨는 이미 어려서부터 그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그는 ‘시시한 학급 학예회’가 아닌 군부대 위문공연이나 전체 학교 행사들의 사회를 도맡아 해왔던 것. 당시 그는 어린아이들이 흔히 꿈꾸는 아나운서보다 쇼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전문 MC’가 되길 희망했다.
그러나 대학(덕성여대)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세상을 알게 되었고, ‘나 혼자만 잘살면 안되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쇼 전문 MC의 꿈을 접었다. 졸업 무렵 여성운동이냐, 언론운동이냐, 아니면 노동현장으로 들어갈 것이냐를 두고 고민하던 중 선배의 권유로 상계동에서 빈민층 아이들을 위한 어린이 공부방 교사로 일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이의 어머니가 최씨의 소매를 잡아끌며 “사실은 나도 글을 모르거든. 나 같은 아줌마를 모아올 테니 처녀가 좀 가르쳐달라”며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에 내심 놀랐다고 한다. 생각보다 열악한 환경에 놓인 그들의 실상을 안 최씨는 90년 10월, 6개월 과정의 ‘어머니학교’를 열면서 본격적으로 빈민운동에 팔을 걷어붙였다. 몇년 뒤에는 교장까지 맡아 학교 운영을 돌봤다. 이렇게 가난한 이웃과 함께 살아가던 그에게 사회자가 되고 싶었던 자신의 꿈을 실현할 기회가 우연찮게 다가왔다.
“93년이었을 겁니다. 지역에서 열린 ‘도시빈민 문화제 민들레 합창’ 공연의 사회를 봤어요. 그때 연출을 하셨던 민예총의 박인배 선생에게 전격적으로 스카우트당했죠(웃음). 그리고 바로 민주노총 창립 공연에서 사회자로 나섰는데, 그 공연에서 한마디로 떴어요. 그때 이후 스타가 돼서 전국을 누비고 다녔죠.”

굵직한 시민행사 도맡아 진행하는 ‘거리의 인기 MC’ 최광기 주부

최씨는 무대 위에서 관객들과 함께 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하지만 사회를 보는 일이 돈 되는 일은 아니었다. 정 때문에, 신념 때문에 도와주는 공연이 더 많았고 출연료라고 해봐야 고작 차비 수준이었다. 어쩌다 한번 출연료로 1백만원이라는 거금을 받은 적도 있지만 ‘어머니학교’의 월세를 내고 나니 달랑 3만원이 남았다고 한다. 최씨는 돈을 손에 쥐게 되는 큰 공연에 다녀오면 어김없이 ‘어머니학교’에 바쳤다. 이렇게 그는 사회자 일을 부업으로, ‘어머니학교’ 교장을 본업으로 하면서 무대 위에서 번 돈을 고스란히 학교 운영자금으로 사용했다.
“어머니학교는 제게 고향 같은 곳이에요. 어렵고 힘들 때마다 힘과 에너지를 충전받았던 곳이죠. 아줌마의 질긴 힘, 생명력이 제게 큰 힘을 주었거든요. 10년 동안 일하면서 1천명 정도의 졸업생을 배출했어요. 거의 대부분 ‘어머니학교’를 통해서 비로소 삶의 이유를 찾아가는 그런 아줌마들이었죠. 가진 것 하나 없는데도 다른 사람과 나누려 하고, 남편에게 허구한 날 맞고 살면서도 행복하게 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한글을 배워서 살맛 난다’며 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가졌던 강한 아줌마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 한켠이 저려와요.”
최씨는 여성계 공연이나 주부들을 위한 공연에는 맨발로 뛰어나갈 정도로 애정이 간다고 말했다. 20대에 주부들을 만났고, 30대엔 스스로 주부들의 삶을 살면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40대엔 ‘아줌마 부흥사’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사회자의 꿈을 이룬 지금, 그가 다시 꿈꾸는 것은 주부들이 신나게 춤도 추고, 놀면서 자신감을 얻고 정체성을 발견하는 긍정적인 의미의 ‘묻지마’ 공연을 만드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아줌마를 좋아하는 진짜 아줌마 최씨는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다.
“지역운동을 하던 남편을 만나 97년에 결혼했어요. 그 당시엔 제 또래도 없었고,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많이 떠나서 참 힘든 시기였는데 남편이 많은 위안이 되어주었어요. 지금은 연구소에서 일하느라 얼굴 보기도 어렵지만요(웃음). 그러다보니 육아는 온전히 제 책임이 되었죠.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아이를 낳고는 공연에 지각을 두번이나 했고, 언제나 일 끝나면 헐레벌떡 집에 돌아가기 바빴죠. 아이가 어릴 때는 슬리퍼 차림으로 도망치듯이 집을 나와 공연장으로 달려가곤 했어요. 아이를 키우나 보니 제 활동 범위가 반으로 팍 줄더라고요. 언제나 집에 빨리 들어가야 해서 사람들과 이야기조차 편하게 하지 못하니까 뒤처진다는 생각에 예전에 비해 많이 위축되기도 했고요.”
사실 ‘어머니학교’ 교장과 사회자, 그리고 엄마 노릇까지 1인 3역을 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결국 그는 ‘어머니학교’를 그만두고 친정어머니 곁으로 이사를 했다. 다섯살, 세살배기 아이를 키우면서 지방 공연이나 밤 공연에 가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대천에서 공연이 있었는데 하룻밤을 자고 와야 했어요. 둘째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서 젖을 짜도 자꾸 줄줄 새서 애를 먹었죠. 다음날 새벽, 서울역에 도착했는데 한 후배가 기다리고 있더군요. 예쁜 옷을 입은 단정한 모습의 후배를 보니 그날 따라 젖이 새서 옷은 엉망이고, 부스스한 내 모습이 처량해 보여 결국 울고 말았죠.”
그래도 일을 놓을 수는 없었다. 엄마가 되고 나니 아이들에게 좋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한 사명감이 더욱 깊어져 예전보다 열심히 뛰게 된다고. 이처럼 어렵게 키운 아이들은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엄마, 가장 무서운 사람도 ‘엄마’라고 답한다. 비교적 부담 없는 공연에는 큰아들 남규를 어릴 때부터 데리고 다녀서인지 남규는 엄마가 일을 하러 갈 때면 “엄마, 마이크 잡으러 가?”하며 오히려 파이팅을 외쳐준다고 한다.
그러나 아들 자랑을 하며 활짝 웃어보이는 그의 얼굴에는 그리 녹록하지 않을 또 다른 삶의 애환이 서려있다. 일하는 엄마로서의 삶, 시민 공연을 지키는 사회자로서의 삶 이외에 또 다른 삶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소리 없이 찾아온 병이었다.
평소 두통이 심하고 시력이 자꾸 떨어져서 안경을 자주 바꿨는데 병원에 가보니 ‘녹내장 말기’라는 진단이 나온 것이다. 이미 손을 쓰기에는 늦은 때였다. 녹내장은 신경이 죽는 병이라 특별한 치료가 없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안압이 올라가면 자칫 실명의 위험이 올 수도 있어 레이저 수술을 받고 안압을 조절하는 약물치료를 받았다. 최씨는 “아마 평생토록 짊어지고 가야 할 병인 듯싶다”면서도 자신은 큰일이 닥칠수록 대범해진다며 담담하게 웃는다.

굵직한 시민행사 도맡아 진행하는 ‘거리의 인기 MC’ 최광기 주부

지난해 ‘안티 미스코리아’ 행사를 진행하던 최광기씨. 올해는 5월10일 남대문 메사 팝콘홀에서 열릴 예정이다.


“처음 진단을 받고는 당황했죠. 특별한 원인은 없고 ‘어머니학교’를 운영하면서 신경을 많이 써서 그랬나 봐요. 녹내장은 시력과 상관없이 시야가 좁아져요. 그래서 오른쪽 눈은 사과를 한입 먹었을 때 크기만큼, 왼쪽 눈은 사과 반쪽 크기만큼 보이죠. 안압만 조절하면 실명하지는 않는대요. 하지만 불편한 점이 많아요. 컴퓨터를 오랫동안 볼 수가 없어서 정보를 얻는 것이 늦어요. 운전도 못하니까 차비도 많이 들고요. 높은 무대에서 서다보니 늘 사고의 위험이 따르죠. 그래도 괜찮아요.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했던 사람도 있는데…. 전 그동안 많이 봤잖아요. 실명하게 되면 부모님과 아이들이 마음에 걸리긴 해도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하면서 살아가려고 노력해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은데 육아와 병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아져서 안타깝다는 최씨. 이렇게 말하는 그의 모습은 결코 어떠한 싸움에서도 지지 않는 여성 투사 같았다. 그는 다가오는 5월에 열리는 ‘안티 미스코리아’ 행사를 개그우먼 김미화씨와 함께 진행할 예정이다.
3년 연속 그에게 마이크를 맡긴 ‘안티 미스코리아’ 사업팀장 박진창아씨는 최씨를 두고 “무대 장악력이 뛰어난 진행자”라고 표현했다. 또한 “최광기씨는 관객과 무대를 조화롭게 이끌어요. 그리고 관객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믿음직스러운 사회자죠. 여성이면서도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를 맡아왔기 때문에 3년 동안 내내 그를 찾게 만들어요”라고 말했다.
최씨를 찾는 곳, 그를 아끼는 곳, 최씨가 온전히 자기의 모습 그대로 숨쉴 수 있는 곳,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이유를 깨닫는 곳, 무대가 있는 한 우리는 최광기씨의 멋진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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