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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 척, 엄지원이라는 존재감

editor 조현주 〈텐아시아〉 기자

입력 2017.01.10 17:44:59

데뷔 15년 만에 충무로 대세 배우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엄지원. 그녀에게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날은, 지금이다.
엄지 척, 엄지원이라는 존재감
엄지원(40)과의 첫 만남은 강렬했다. 인사를 나눈 뒤 명함을 건네자 엄지원은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들더니 명함과 함께 기자의 얼굴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았다. “이렇게 해야지 기억에 남아서”라며 환하게 웃는 그녀에게서 친근감이 느껴졌다. 인터뷰어에 대한 존중이 전해짐과 동시에 왠지 모르게 오늘의 대화가 잘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예감은 적중했다. 그녀는 인터뷰 내내 삶의 문제를 연기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감,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해내야 하는 배우로서의 애환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의 흔적들을 소탈하게 내보였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미씽: 사라진 여자〉(이하 〈미씽〉)는 제작 전부터 좋은 시나리오라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투자로 이어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상업성이 떨어지는 여성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엄지원은 “이야기가 좋아도 투자를 받기가 어려웠다는 사실이 슬펐다”고 말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 잘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촬영에 임했다”고 눈을 반짝였다.

“시나리오가 너무 좋았어요. 여자 투 톱에 완성도 있는 대본이 저에게 온 것은 거의 처음이었죠. 그래서 꼭 해보고 싶었습니다. 대본을 읽고 덮으면서 눈물이 났어요. 그 후 매니저한테 전화해서 감독님께 ‘좋은 책 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해달라고 한 뒤 출연을 결정했어요. 호러물을 제외하곤 영화에서 여성이 극을 리드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그런 점에서 〈미씽〉은 신선했어요. 잘 만들어서 좋은 결과까지 내보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한국 영화계는 어느덧 티켓 파워를 지닌 남성 배우와 범죄, 액션 등 상업성 짙은 소재로 쏠리고 있다. 여성 역시 주체적이기보다 소모적으로 이용됐다. 그런 영화 현장에서 작업을 하는 엄지원은 자신의 역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작인 〈더 폰〉에서 제가 맡은 연수 역은 항상 놀라고 당하고 두려워하는, 연약한 여성이었어요. 감독님과 함께 연수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죠.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부분들은 캐릭터에 적용시켰어요. 늘 제가 맡은 캐릭터에 그런 작업을 해왔어요. 〈미씽〉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영화라서 더 반갑더라고요.”



〈미씽〉은 이 시대 여성들이 겪어내고 있는 현실에 대해 다룬다. 영화는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딸을 키우는 워킹맘 지선(엄지원)과 낯선 타국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중국인 보모 한매(공효진)의 삶을 조명한다. 지선이 가족보다 더 가깝고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한매가 자신의 딸을 데리고 사라지면서 스릴러로 흐르는데, 결국 두 여자가 연대함으로써 작품의 의미는 완성된다.   



배우, 여성을 이야기하다

엄지 척, 엄지원이라는 존재감
“2013년 개봉한 영화 〈소원〉에 출연했을 때는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주 깊은 상처를 지닌 엄마 역을 연기했어요. 출연 결정을 한 뒤에도 깊이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겁이 났죠. 그런데 〈미씽〉은 워킹 우먼으로 공감하는 바가 있었고, 주변 친구들이 일을 하면서 아이를 보모에게 맡기는 경우도 종종 봐왔기 때문에 꼭 제 주변의 이야기 같았죠.”

지선은 한매를 쫓으며 그녀의 사연을 접하게 되고, 자신이 얼마나 타인에게 무관심했는지 깨닫게 된다. 이는 엄지원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이야기다.

“할리우드에서 소재를 차용한 것이 아니라 한국적인 스릴러잖아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섬뜩하더라고요. 저 역시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집에 도우미 아주머님이 오셔서 청소를 해주거든요. 제가 그분을 편하게 대하는 것과 그 분이 저를 편하게 대하는 것에는 분명 온도 차가 있을 거예요. 그분이 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을 안 했거든요. 영화를 찍으면서 타인이 저를 바라보는 시선은 아주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엄지원은 영화에서 내내 파란 색깔의 원피스를 입고 한매를 추적한다. 원래는 셔츠와 바지를 입는 설정이었는데 그녀의 의견이 적극 반영됐다. 그녀는 “지선은 드라마 홍보대행사 실장이다. 아이가 없어진 날 드라마 제작발표회가 있었는데, 당연히 차려입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면서 “불편한 옷을 입고 아이를 찾는 모습이 지선의 감정을 더 섬세하게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3~4개월 동안 그 원피스 한 벌만 입고 촬영을 했어요. 찢어진 버전, 안 찢어진 버전 등 다양하게 옷을 구비해놓고 입었죠. 하루에 몇 번씩 갈아입기도 했어요. 시간이 지나니까 정말 지겹더라고요(웃음). 마지막 촬영 때 ‘이 옷도 마지막이구나!’라고 외쳤던 기억이 있네요.”

영화에 주어진 예산은 넉넉하지 않았다. 촬영 과정도 타이트했다. 그럴수록 엄지원은 지선의 감정을 놓치지 않기 위해 대본을 수십, 수백 번씩 읽어 내려갔다. 감정선에 맞춰 대본에 색깔별로 표시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선이 느끼는 감정의 농도까지 체크했다. 녹록지 않았던 환경에서 그녀는 함께 작업하는 공효진과 서로 의지하면서 신뢰를 쌓아갔다.

“여태까지 작업한 배우 중에 효진이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효진이가 출연했던 영화도 거의 다 봤고요. 동시대에 활동하는 배우라서 관심이 많았는데, 궁합이 잘 맞았어요. 성격이나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비슷했죠. 성향도 닮았더라고요. 같은 방향을 보면서 욕심내지 않고, 영화가 잘될 수 있게 하모니를 맞추려고 서로 노력했죠. 격려하고 칭찬하면서 아주 좋은 현장 분위기를 만들어나갔어요. 저에게는 효진이와의 촬영이 아주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아요.”

약 50회로 마무리된 〈미씽〉에서 엄지원은 단 2회 정도만 빼고 모든 촬영에 참여했는데, 아이를 찾아 헤매며 신체적 어려움은 물론 감정적으로 쉽지 않은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헝클어진 머리에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됐다. 거리를 질주하고 물에 빠지기도 했다.

“사실 육체적으로 힘든 건 각오했던 바예요. 대본에 명확히 나와 있어서 괜찮았어요. 평상시에도 하루에 두 시간씩 운동을 해서 기초 체력이 받쳐줬거든요.”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남녀의 시각 차이였다. 이언희 감독과 엄지원, 공효진을 제외한 스태프들은 대부분 남성이었다. 엄마가 아닌 여자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었던 여성들과 끝까지 아름다운 모성이길 바랐던 남성들이 싸우는 과정 역시 고됐다.

“남자 스태프들과 의견 충돌하는 일들이 생각보다 많았어요. 남녀의 시선 차가 크다는 걸 확실히 느꼈죠. 효진이와 저는 영화가 모성으로 시작하지만 여성으로 끝난다고 생각했거든요. 여성에 대한 보이지 않은 폭력도 풀어보고 싶었고요. 남자들은 끝까지 아름다운 모성이길 바라더라고요. 홀로 사건을 해결하려고 하는 지선을 비호감으로 느끼는 분들도 있었고요. 결국 화합하면서 좋은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들을 설득하는 것도 영화 작업에 포함됐죠.”

그럴 때 힘이 됐던 건 공효진이었다. “저는 우유분단한 면이 없지 않아 있는데 효진이는 투사 같은 면모가 있더라고요. 현장에서 아주 든든했죠(웃음).”



디테일이 닮은 부부

엄지원은 2년 열애 끝에 2014년 건축가이자 〈나한테 미안해서 비행기를 탔다〉 〈그래도 나는 서울이 좋다〉 등을 펴낸 작가 오영욱 씨와 결혼했다. 스페인으로 한 달간 신혼여행을 다녀온 이들 부부는 요즘도 인스타그램에 종종 화보 같은 여행 사진을 올려 부러움을 사고 있다. 남편이 쓴 여행 일러스트 책들을 열심히 읽었다고 하자 “은근히 남편 팬들이 많다”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남편과 시부모님을 만났어요. 아직은 아기를 낳으라는 무언의 압박도 없으시고요(웃음). 저도 앞으로 엄마가 되고 육아를 해야 할 텐데 이번에 너무 많은 걸 경험해서 고민이 많아졌어요. 다행히 남편은 제가 배우로서 커리어를 쌓아갈 수 있도록 응원하고 항상 기뻐해줘서 고마울 따름이죠.”

엄지원과 오영욱은 어딘가 닮아 있었다. 오영욱은 밑그림을 그리고 설계를 하고 건물을 올리는 건축가고, 엄지원은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의 감정 레벨·농도·변화를 디테일하게 설계하는 배우다. 그녀는 “그러고 보니 흡사하다”며 웃어 보였다.

엄지원은 지난 12월 21일 개봉한 영화 〈마스터〉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솔직하고 쿨한 매력의 지능범죄수사대 소속 신젬마 경위로 김재명 역의 강동원과 환상의 호흡을 보여준다. 그리고 오달수와 러브 라인까지 선보이며 극의 재미를 더한다. 파워풀하고 터프한 매력의 엄지원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실제 그녀는 건강미를 위해 17번 정도의 태닝까지 하며 신젬마 역에 녹아들었다.

“아주 괜찮은 캐릭터예요. 뭔가 있으니까 제가 출연했겠죠?(웃음) 〈미씽〉에 출연했을 때는 정말 혼자서 외롭게 촬영했어요. 그런데 〈마스터〉는 남자 출연진들이 많아서 오히려 심심하더라고요.”

2016년 한 해만 두 작품을 선보인 그녀는 흥행에 대한 걱정도 드러냈다. “수확을 하는 느낌이에요. 그런데 관객 수라는 숙제가 남아 있네요. 시험을 치르고 난 뒤 결과를 보고 싶지 않듯이 흥행 성적표를 받아들고 싶지는 않은데, 그럴 수 없겠죠? 웃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미씽〉은 이혼한 워킹맘, 다문화 가정 등 사회 약자 이야기를 그리잖아요. 영화 속 내용이 이슈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관객 숫자가 받쳐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엄지원에게 작품 선정 기준을 물어봤다. 그녀는 기존에 했던 것과 비슷한 성격의 작품은 피한다. 출연 비중이 작더라도 확장시킬 수 있고, 재미있게 풀어낼 수 있는 역이면 선택한다. 주·조연에 자신의 배역을 한정시키지 않는다. “주인공이라도 매력 없으면 안 한다”고 자신의 소신을 드러냈다. 이렇듯 엄지원의 시선은 항상 깨어 있다.

“제작비 5억원 미만의 작은 영화들에도 관심이 많아요. 캐릭터가 재미있다면 언제든 마음이 열려 있죠. 실제로도 몇 작품은 출연을 고려해보고 있고요. 다양성 영화(예술성이 뛰어난 소규모 영화)들은 캐릭터적인 면에서 유니크하고 흥미로운 지점들이 많아요. 배우로서는 식상한 캐릭터를 안 해서 좋고, 영화는 상업성을 지닌 배우가 붙으면서 탄력을 받을 수 있잖아요. 배우로서 제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에 감사함을 느껴요. 앞으로도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준비해서 공감할 수 있는 연기를 선보이고 싶어요.”

기획 여성동아
사진 제공 메가박스 플러스엠
디자인 김영화




여성동아 2017년 1월 6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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