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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film

의리의 ‘밀정’ 감독을 구하다

editor 김지영 기자

2016. 10. 18

외신으로부터 ‘1온스의 군더더기도 없는 완벽한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흥행 가도를 질주하고 있는 영화 〈밀정〉. 그 중심에는 배수진을 치고 과감하게 변신한 김지운 감독이 있었다.

“시작은 스파이 영화에 대한 끌림이었어요. 적의 한가운데서 암약하는 이중 첩자 혹은 이중 스파이가 가지는 분열적 정체성과, 혼돈의 시대에 국가의 경계선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그 아슬아슬함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서구의 냉전 시대가 스파이를 소재로 한 수많은 걸작들을 만들어냈어요. 우리나라의 질곡의 근대사를 소재로 한 스파이 영화를 만드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죠.”

개봉 12일 만에 6백만 관객을 불러 모으며 무서운 기세로 흥행몰이 중인 영화 〈밀정〉은 김지운 감독의 이런 생각에서 출발했다. 김 감독은 할리우드 진출작인 〈라스트 스탠드〉(2013) 촬영을 마치고 미국에서 두 번째 영화를 준비 중일 때 워너브라더스로부터 〈밀정〉의 연출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인 워너브라더스가 한국 영화를 제작한 것은 이번이 처음. 이후 시나리오는 김 감독의 각색을 거치며 다양한 오락적 요소를 지닌 지금의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로 거듭났다. 영화는 1923년 실제로 벌어진 ‘황옥 경부 폭탄 사건’과 당시 무장 독립운동 단체 의열단에서 활약한 실존 인물들을 모티프로 했다.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은 경기도 경찰부 소속 황옥 경부가 총독부를 비롯한 일본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려고 했던 의열단의 계획을 돕다 실패로 끝난 사건이다.

〈밀정〉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 이정출(송강호)과 의열단의 새 리더 김우진(공유)을 주축으로, 이들 사이에서 펼쳐지는 회유와 암투, 교란 작전을 그렸다. 개봉을 앞두고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 감독은 “내 스타일이나 자의식을 고집하지 않고 이야기가 흐르는 대로 따라간 첫 작품”이라며 “〈밀정〉은 단순히 스파이를 쫓는 첩보물이 아니라, 누구나 밀정이 될 수 있었던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치열한 삶에 대한 이야기”라고 밝혔다.



▼감독 데뷔작인 〈조용한 가족〉(1988)을 시작으로 〈반칙왕〉(2000),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그리고 〈밀정〉까지 네 작품을 송강호 씨와 함께했습니다. 송강호 씨를 유독 많이 주연으로 기용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송강호 씨는 한 번도 퇴보하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계속 깨나가는 배우예요. 그렇기 때문에 어떤 역이든 믿고 맡길 수 있는 거고요. 〈밀정〉을 만드는 과정에서 제가 한계를 느껴 참담해하고 있을 때도 송강호 씨는 시대가 만들어낸 캐릭터의 복합적인 심리 변화를 심도 깊이 풀어나가더군요. ‘저 사람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인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감동적인 열연을 펼쳤죠. 제가 시대적인 배경 때문에 애초에 생각했던 연출 스타일을 접고 영화가 흐르는 대로 내버려둘 수 있었던 것도, 어떤 작품에서든 그 중심에는 그만의 인간적 매력을  창출해내는 송강호라는 배우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특별 출연한 이병헌 씨의 카리스마가 압도적이었다는 평이 많습니다. 이병헌 씨를 캐스팅한 배경이 궁금해요.

이병헌 씨와도 작품을 많이 했어요. 〈달콤한 인생〉(2005)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 이어 이번 작품이 세 번째 만남인데, 의열단장인 김원봉 선생 역에 누가 어울릴까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이병헌 씨예요. 김원봉 선생의 카리스마와 냉정함, 인간적인 면모를 모두 고려했을 때 이병헌 씨만 한 적임자가 없더라고요. 마침 제작사에서도 같은 의견을 내놔서 카메오 출연 제의를 했는데, 이병헌 씨가 바쁜 와중에도 캐릭터를 멋지게 살려 좋은 연기까지 보여줘서 개인적으로도 무척 고마워요.

▼위험해 보이는 추격 신, 총격 신이 많던데 다친 사람은 없나요.

지붕과 지붕 사이를 이어주는 세트를 설치하고, 기와가 미끄러운 한겨울에는 촬영을 자제하는 식으로 안전에 만전을 기했어요. 그 덕분에 다친 사람은 없지만 액션 배우들이 뛰어다니면서 기왓장을 하도 많이 깨서 예상치 못한 손실을 봤죠(웃음).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을 극화하는 과정에서 어떤 점에 중점을 뒀습니까.

촬영에 들어가기 전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이라는 책을 많이 참고했고, 그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불끈불끈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때 느꼈던, 죽음 앞에서 초연했던 선열들의 위엄과 기개를 영화에 온전히 담아내려고 했습니다. 나라를 걱정하고 생각하는 영화를 앞으로 또 만들지는 모르겠지만, 더할 나위 없이 유익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죠.

▼〈밀정〉을 민족주의를 찬양하는 ‘국뽕(국가와 히로뽕을 더한 신조어로 과도한 애국주의를 비꼬는 말)’ 영화로 보는 시선도 있더군요.

죽음도 불사하고 조국을 위해 싸웠던 의열단의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영화가 점점 더 뜨거워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건 인물들의 감정이 달아올라서 그랬던 것이지 애국심에 호소하기 위한 장치는 아니에요.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경계했던 점도 국뽕이나 ‘신파’로 비치는 거였고요. 〈밀정〉은 결코 국뽕 영화가 아니라 눈뽕 영화예요. 배우들의 연기와 미술, 미장센 등을 통해 보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 영화죠.



〈밀정〉은 해외에서도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9월 23일부터 미국 로스앤젤레스·뉴욕·시카고·워싱턴 DC, 캐나다 토론토·밴쿠버 등 북미 40여 도시에서 개봉되고 베니스·토론토·시체스국제영화제와 런던아시아영화제 등에 공식 초청됐다. 뿐만 아니라 내년 2월 열리는 제89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외국어 부문에 한국 대표작으로 출품된다. 특히 지난 9월 3일(현지 시각) 열린 베니스영화제에서는 외신들로부터 ‘1온스의 군더더기도 없는 완벽한 작품’ ‘훌륭한 필름 메이킹의 모범 사례’ 등의 극찬을 받았다. 2010년 〈악마를 보았다〉 이후 힘든 시간을 보낸 김 감독에게 이보다 큰 위로와 보상이 있을까.

김 감독은 〈악마를 보았다〉를 만들면서 악의 본성과 악마에게 타격을 줄 방법을 끊임없이 상상한 탓에 한동안 우울증 약을 먹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었다. 이후 할리우드로 건너가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연의 〈라스트 스탠드〉라는 액션물을 만든 것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어둠의 장막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영화는 국내에서 흥행에 실패했고, 이후 그가 미국에서 준비하던 또 다른 영화는 캐스팅 난항을 겪었다.

그런 와중에 만난 단비 같은 영화 〈밀정〉으로 국내외의 호평과 상업적인 성공까지 다시 거머쥔 김 감독은 “당장의 흥행에 연연하지 않는다”면서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기억에 남는 영화를 만들고 싶을 뿐”이라고 소박한 소망을 밝혔다.

사진 동아일보 사진DB파트
디자인 조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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