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고 보는 배우’로 성장한 이제훈이 이번엔 1990년대 말, IMF라는 격변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소주전쟁’에서 또 한 번 깊은 인상을 남긴다. 자본주의의 그림자 아래에서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닌 두 남자의 대립을 그린 이 작품은 단순한 금융 영화를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영화 속 이제훈은 성공을 향한 욕망이 넘치는 금융 컨설턴트 ‘최인범’ 역을 맡아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인터뷰에서 그는 작품에 대한 애정은 물론 배우로서 살아가는 태도, 그리고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꿈까지 차분한 목소리로 풀어냈다. 무대 밖에서는 ‘낭만을 좇는 시네필’로, 무대 위에서는 ‘진화하는 연기자’로 살아가는 그의 이야기엔 한 인간의 진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소주전쟁’이 남긴 것
영화 ‘소주전쟁’ 개봉 소감이 궁금합니다.영화가 개봉한 후에 실시간으로 관람객들의 영화 후기를 찾아보고 있어요. 표종록(유해진)과 최인범(이제훈) 중 어떤 캐릭터에 더 공감했는지, 어떤 삶의 태도가 더 옳은지 이야기를 나눠주시더라고요. 더 많은 분이 ‘소주전쟁’을 보고 함께 고민의 결과를 나눠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관객으로서 종록과 인범 중 어떤 캐릭터에 더 몰입해서 봤나요.
제가 지금 매니지먼트사를 운영 중이거든요. 그래서 회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종록의 입장에 더 공감이 갔습니다. 매니지먼트사를 운영하기 전에는 배우로서 일과 삶의 경계가 명확했어요. 하지만 오너의 자리에 있으니 쉼이 확실히 많이 사라졌어요. 무언가를 결정하고 위기 상황에도 대비해야 해서 정신없이 하루하루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지 컨설팅을 받아야 하는 상황인 것 같아요(웃음).
인범의 입장에서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다면요.
시나리오를 처음 보고 인범이 요즘 세대에 더 부합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젊은 세대는 아무래도 자신과 일을 철저히 구분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저도 회사를 운영하기 전에는 온·오프가 확실한 사람이었죠. 쉴 때는 일과 관련한 연락도 받기 싫어했거든요.
종록을 향한 혼란스러운 감정은 어떻게 표현했나요.
유해진 선배와 연기하면서 혼란스러운 감정의 인범에게 몰입할 수 있었어요. 회사에 충성을 다하는 종록의 모습을 보면서 인범이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거든요. 종록을 답답해하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하죠. 다만 영화에서는 인범의 아버지를 떠올리는 개인적인 스토리가 많이 편집돼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인범은 성공을 향한 욕심이 엄청난 캐릭터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친구이기도 하고요. 위기에 빠진 한국 기업을 ‘선진 금융 기술’로 이용할 생각뿐이니까요. 이런 계략을 숨기고 종록과 친해진 것이고요. 그렇지만 종록을 위로해주고 싶다는 이중적인 마음이 생기면서 내적 갈등이 일어나죠. 관객분들은 인범이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눈여겨봐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인범은 이후 어떤 삶을 살게 됐을까요.
인범이 물적 가치만을 끊임없이 욕망하면서 원치 않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 이후에는 삶의 가치관을 재정립할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선진 금융 기술 같은 반칙은 쓰지 않고 올바르게 살지 않을까요.

이제훈은 성공과 돈을 향한 욕망이 강한 컨설턴트 ‘최인범’으로 분해 날카로운 연기를 펼친다.
소주의 매력은 낭만
주연으로서 ‘소주전쟁’에 담긴 사회적 의미를 설명해주신다면요.IMF 시대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피땀이 섞인 노력으로 부채를 빠르게 갚고 성장을 이루었다고 생각해요. 외국자본을 받아들이면서 많은 발전을 이룬 때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 빈틈을 타서 탐욕스러운 사람들의 모럴해저드(도덕적해이)가 많이 발생했습니다. ‘소주전쟁’은 그런 모럴해저드와 관련한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한 영화예요. 수많은 불법적인 요소를 교묘하게 피해가면서 결과적으로는 여러 사람이 노력한 결과를 송두리째 빼앗아가는 모습을 그렸죠. 요즘 뉴스를 보면서 모럴해저드가 더 심해졌다고 느낍니다. 저희 영화를 통해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해보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영화에서는 ‘컨설턴트’로서 어려운 영어 대사를 소화하는 장면이 많아요.
어려운 금융 용어를 구사하는 장면이 많아서 부담스러운 부분도 컸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코치도 받고 크게, 작게, 빠르게, 느리게 등 여러 버전으로 대사를 소화하면서 녹음도 해보고 다양한 노력을 했어요. 관객분들을 영화에 몰입시키려면 프로페셔널한 모습이 필요했기 때문에요. 영어를 잘 못하는데도 극복하기 위해 밤새워 공부했죠.
금융 전문가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따로 준비한 것이 있을까요.
‘소주전쟁’ 전에도 금융 소재의 할리우드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봐왔고 좋아했어요. 그래서 금융 범죄물에 나오는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가 어느 정도 있는 상태였죠. 배우로 살면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많이 관찰하게 됐고, 뉴스를 통해서 금융업계 관련 이야기도 많이 접했고요. 그래서인지 컨설턴트라는 직업을 소화할 때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다.
실제로는 술을 잘 못한다고 들었는데, 촬영하면서 ‘소주의 맛’을 알게 됐나요.
촬영할 때는 술을 마시지 않았고 영화 홍보차 예능 프로그램을 하면서 소주를 좀 마셨는데, 낯선 사람들과도 쉽게 가까워질 수 있는 마법 같은 힘을 느꼈어요(웃음). 술은 어색한 분위기도 달아오르게 하는 힘이 있잖아요. 그래서 저도 술을 마시는 영화 홍보 자리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형, 동생 하기도 하고 취하는 순간의 즐거움을 깨달았죠. ‘소주는 삶의 고통과 환희를 모두 아우르는,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술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최고의 안주는 무엇인가요.
신해철 님의 음악을 꼽고 싶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밴드 넥스트와 신해철 선배님의 음악을 들으며 영향을 많이 받은 세대예요. 그래서 친구들과 노래를 들으며 그때를 추억할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술안주가 없을 것 같아요.
이제훈에게 1990년대는 낭만의 시기였나요, 혼란의 시기였나요.
엄청난 낭만의 시기였어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의 영화들이 제 배우 인생의 원천이 되기도 했고요. 그 시절 한국 영화의 스토리와 영상미를 보면 ‘당시 창작자들이 정말 대단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한편으로는 그때와 지금 영화계를 비교하면서 제가 아직 부족하다는 반성도 하게 되고요. 저의 낭만은 당시 훌륭한 영화들로 충족이 됐었죠.
한편으로는 영화에서처럼 IMF 때문에 힘들었던 시기도 있었을 것 같아요.
당시 제 아버지를 떠올려보면 굉장히 괴로우셨을 것 같아요. 당시 저희 집도 가세가 기울고 하던 장사가 잘 안됐어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일용직 근로를 찾으려고 나가시는 모습을 봤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저는 ‘우리 집이 지금 힘들구나’라는 걱정만 했지,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지는 못했어요. 그래서 영화를 촬영하며 아버지에게 죄송스러운 마음이 많이 들었어요.
유해진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요.
유해진 선배님은 제가 배우의 꿈을 꿨던 1990년대와 2000년대 영화 속에서 너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계신 분이세요. 저는 선배님만큼 주변 사람들을 무장해제시키는 사람을 아직 못 만나본 것 같아요. 그래서 ‘나도 저렇게 편안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배우로서는 물론이고 인간적으로도 훌륭한 선배님과 호흡을 맞출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이제훈의 유튜브 채널 ‘제훈씨네’. 전국에 있는 영화관을 찾아가거나 배우들과 인터뷰를 나눈다.
요즘은 이동하면서 휴대폰이나 태블릿으로 영화를 시청하는 경우가 많아요. 영화를 보다가 자의적으로 멈추고 다른 일을 할 수도 있고, 이틀에 걸쳐 나눠 볼 수도 있죠. 하지만 제가 전국에 있는 독립영화관을 방문하면서 느낀 건, 영화관은 크건 작건 숭고함이 있다는 거예요. 좋은 사운드와 화면으로 2시간 동안 온전히 영화라는 경험에 오감을 맡길 수 있잖아요. 그런 감동과 기억을 줄 수 있는 장소로 극장만 한 곳이 없습니다.
상업영화 업계도 어려운 시기에 독립영화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극장의 존재가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로운 지금, 많은 대중의 응원과 관심이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상업적으로 재미를 줄 수 있는 영화도 좋지만, 저한테 ‘독립영화’는 꿈이었어요. 자본이 부족한 사람들도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창작 의지만 있다면 만들 수 있는 것이 독립영화라고 생각하고요. 저도 그런 작품들을 통해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화 업계 후배들 각자가 저처럼 꿈을 안고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많은 응원을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모범택시’나 ‘시그널’의 경우 많은 사랑을 받아서 시리즈로 연결되었다는 것이 영광이죠. 한편으로는 그 이전에 보여줬던 캐릭터보다 업그레이드된 퍼포먼스를 펼쳐야 한다는 부담감도 크게 있습니다. 시리즈가 이어졌을 때 기시감도 느낄 수 있겠지만, 연속해서 좋은 기회를 얻은 만큼 안주하지 않고 더 멋진 모습과 재미있는 스토리를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시그널’이 2026년 상반기에 시즌 2로 찾아오는데요.
‘시그널’이 tvN 창립 10주년 기념 작품인데,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2026년에 다음 시즌으로 찾아뵙게 됐어요. 사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는 다음 시리즈 없이 미완의 이야기로 끝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시즌 2는 첫 시즌의 마지막 회 이후 스토리로 바로 이어갈 예정입니다. 촬영은 60% 정도 진행된 상태고요. 지금도 현장에서 치열하게 촬영하고 있습니다. 작품에 대한 기대감은 상당히 높습니다. 감히 출연 배우들과 김은희 작가님의 마스터피스로 남을 작품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제훈 #소주전쟁 #여성동아
사진제공 쇼박스 사진출처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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