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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뜨거운 심장을 지닌 여자, 연극배우 김지숙

기획 · 김지영 기자 | 글 · 김지은 자유기고가 | 사진 · 김도균 | 디자인 · 김영화

2016. 06. 15

데뷔 40년 차 연극배우 김지숙은 여전히 소녀처럼 예민하고 청춘처럼 뜨거웠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가 삶을 얼마나 풍부하게 만드는지에 대해 말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배우 김지숙이 또다시 사랑에 빠지는 이유다.

연극배우 김지숙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휴대전화로 인터넷 중고서점을 뒤져 급히 책 두 권을 주문했다. 그녀가 1993년 출간한 〈대통령도 창녀도 될 뻔한 여자〉와 1996년에 낸 〈셰익스피어는 그녀를 자유라 불렀다〉다. 이미 절판된 지 오래인 에세이집을 어렵게 구해 읽다보니 그녀가 인터뷰 말미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마감 끝나고, 우리 꼭 ‘쏘주’ 한잔해요.”

인사치레 같지 않았던 그 말에 화답하기 위해서라도 그녀를 좀 더 내밀하게 진득하니 알아내고 싶었다. 다음번 그녀를 만날 때는 짧은 인터뷰와 TV 토크쇼를 통해서만 막연하게 알아왔던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진 여배우’ 말고, 진짜 이야기 잘 통하는 언니와 밤새 깔깔깔 수다삼매경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노라 말해보고 싶었다. 인터뷰하며 지켜본 김지숙은 생각보다 더 담백하고, 쾌활했으며, 소녀처럼 날카로웠다. 그러니까, 이제는 무뎌질 법도 한 내면의 칼날이 여전히 선득한 데다 그것을 숨길 방법도 알지 못했다. 문득 이 여자처럼 심장을 펄떡이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쏘주’ 한잔 하고 싶은 센 언니

젊은 세대는 그녀를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오스카(윤상현) 엄마 정도로만 기억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1977년 현대극단 입단 후 신인상을 비롯해 연극배우에게 주어지는 상이란 상을 모조리 휩쓸었던 데뷔 40년 차의 베테랑 연극배우이자 45~70세 배우들로 구성된 중견연극인창작집단(중창단)의 대표다. 중창단에는 송강호, 최민식, 설경구, 예지원 등 젊은 배우들도 특별회원 자격으로 힘을 보태고 있다.

연극 〈장수상회〉가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그녀는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연출한 안톤 체호프의 연극 〈바냐 아저씨〉에서 20대의 젊고 매력적인 주인공, 팜파탈 ‘엘레나’를 연기했다. 그녀가 영화 〈달콤한 인생〉 〈장화, 홍련〉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등을 연출한 영화감독 김지운과 IBF 세계챔피언 김지원의 누나라는 것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연극 〈장수상회〉와 〈바냐 아저씨〉, 두 작품을 모두 본 사람이라면 〈장수상회〉의 ‘임금님’과 〈바냐 아저씨〉의 ‘엘레나’를 연기한 사람이 정말 같은 배우가 맞나 어리둥절해져 한참 공연장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일지 모른다. 〈장수상회〉 객석에 앉아 죽음을 목전에 두고 절절한 가족애에 눈시울 붉히는 60대의 임금님 여사에 빠져든 직후 무대 밖에서 군살 하나 없는 몸매를 날렵하게 드러낸, 섹시한 아우라의 김지숙과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도 그에 못지않았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며 다소곳한 말투, 한 템포 느릿한 몸짓이 무대가 끝나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어땠어요?”

기자와 마주하자 그녀는 다짜고짜 공연에 대한 감상부터 캐물었다. 40년 연기 인생 최초의 더블 캐스팅에다 상대 배우와 실전에서 호흡을 맞춘 지 며칠 안 돼 내심 예민해져 있던 터였노라 털어놓으면서 말이다. 연극 〈장수상회〉는 그녀와 배우 양금석이 임금님 역을 나눠 맡고 배우 백일섭과 이호재가 임금님의 남편 ‘김성칠’ 역에 더블 캐스팅돼 서로 번갈아가며 무대를 이끈다. 동명의 영화에서는 윤여정과 박근형이 주연을 맡아 호평을 받은 바 있다. 김지숙을 만난 날은 마침 그녀가 연극 무대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백일섭과 호흡을 맞춘 날이었다.

“오랜 세월 연극 무대에 섰던 사람과 브라운관에 익숙해진 사람은 무대에 섰을 때뿐만 아니라 자기 배역에 빠져드는 방법도 서로 달라요. 연극배우들이 반복, 반복, 상대 배역과 연습을 통해 끊임없이 부딪히면서 자기 캐릭터를 만들어나간다면 카메라에 익숙한 배우들은 오히려 자기 시간을 많이 필요로 하죠. 혼자서 그 캐릭터에 몰입하는 절대 시간이 필요하달까요. 그래서 조금 안달이 났었어요. 저는 함께하는 연습량을 늘리고 싶고, 백일섭 선배님은 혼자 배역에 녹아들 시간이 필요했을 테니까요. 준비하는 동안은 힘들었지만 덕분에 새로운 것을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 저에게는 여러 면에서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어쩌면 평생을 알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는 타인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보는 것, 그것은 배우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결혼을 해본 적도 없고, 아이도 남편도 없이 살아온 그녀가 지고지순한 가족애를 간직한 임금님 캐릭터를 선뜻 받아들인 것도 배우 특유의 도전 욕구가 끓어올랐기 때문이다.

“욕심이 났어요. 내가 이때 아니면 언제 이런 감정을 느껴볼 수 있을까, 싶었죠. 제가 실제로 임금님과 같은 처지였다면 어땠을까도 생각해보았어요. 아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일일드라마 출연 제의도 거절하고 무대에 섰죠.”

인생에서는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남편이 무대에서 한꺼번에 둘이나 생겨버린 것이다.




사람 잡는 눈빛을 가진 소녀에서 배우로



도대체 내가 결혼하지 않는 이유가 왜 그렇게 궁금한 것일까.

〈로젤〉 1막 공연을 끝내고 분장실로 들어서는데 누군가가 ‘저, 그런데요. 주인공 춘향이는 이 도령을 언제쯤 만나게 되나요?’라고 물을 때만큼이나 황망스럽다.

-〈대통령도 창녀도 될 뻔한 여자〉(김지숙 저, 법지사) 중



그녀가 기억하는 스물한 살의 김지숙은 자폐에 가까울 만큼 내성적이고 냉소적이었다. 세상은 온통 거짓으로 가득했고 그런 세상과 마주하는 것은 공포스러울 만큼 힘겨웠다. 학교생활에도, 공부에도 아무런 흥미가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느닷없이 “뭘 하고 싶으냐?”고 물어준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그의 은사이자 희곡 작가 이반 교수다.

“너무 갑작스러운 질문이라 얼결에 ‘연극이요’라고 대답했지만 지금도 그때 제 입에서 왜 그런 답이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다음 날 바로 저를 극단에 넣어주시더라고요. 지금은 많이 덜해졌지만 그때만 해도 제 눈빛이 뭐랄까, 좋게 말하면 반짝반짝 빛이 나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사람 잡을 눈처럼 보였죠. 그래서 눈을 못 쳐다볼 정도로 무섭다는 얘길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 눈빛을 교수님은 오히려 좋게 보셨대요.”

배우들을 만날 때면, 정말로 무언지 모를 강렬한 아우라에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지금은 많이 덜해졌다는, 그녀의 훅 빨려들 것만 같은 검은 눈동자와 동그랗게 큰 눈도 그런 아우라를 뿜어냈다. 그런 것이 배우의 싹수였을까. 아니면 그저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던 자신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낼 유일한 방법이 연극이라 여긴 것일까. 그녀는 “연극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스스로와 소통하는 법을 알게 됐다”고 털어놨다.

“무대에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자유롭고 당당해질 수 있죠.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는 나만의 세상이니까요. 무대는 저에게 결코 떠날 수 없는, 가장 세속적인 종교입니다.”

연극을 시작할 무렵, 그녀에게는 부모님이 정해주신 결혼 상대가 있었다. 촉망받는 고위직 공무원이던 그는 그녀가 연극을 그만두고 집에서 착실히 신부 수업을 받기를 바랐다. 당시 결혼 준비는 당사자인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양가 부모 누구도 그녀에게 의사를 묻지 않았다. 그녀는 막다른 선택을 해야 했다. 부모가 바라는 대로 유능한 남자의 아내로 사는 것이 행복한 여자의 전형적인 삶일지라도, 결혼하면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삶이 보장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잘나가는 남자의 아내가 아닌 배우의 삶을 택했다. 그녀에게 연극은 삶이자, 사랑이자, 결혼이자 밥이 되었다.



그리고 또 사랑에 빠지다

김지숙의 대표작은 누가 뭐래도 모노드라마     〈로젤〉이다. 그녀가 직접 번안을 하고 연출과 연기까지 진행한 이 작품은 공연 횟수로만 3천 회에 달하고, 모두 1백7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국내에 여성학이 학문으로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할 무렵인 1990년대 초반, 여성학자들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파격적인 생각과 주장을 담은 에세이집을 출간해 세간을 놀라게 했던 그녀는 〈로젤〉을 통해 또 한 번, 억압당하고 짓밟힌 여성들의 삶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1991년 무렵 성폭력 문제가 큰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었어요. 당시 전국의 정신병원을 돌며 사이코드라마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용인과 순천에서 만났던 두 여성분들의 이야기를 합치면 딱 〈로젤〉이더라고요. 그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로젤〉을 국내 실정에 맞게 번안했죠. 그래서인지 관객이 더 큰 공감을 보여주셨던 것 같아요.”

대입 실패 등을 이유로 자살하는 아이들이 유독 많았던 2000년 무렵에는 고등학교를 찾아다니며 〈로젤〉을 선보였다. 그렇게 사비를 들여 공연을 올린 학교만도 1백여 곳이 넘었다. 그녀는 3년 동안 10만 명의 고등학생을 만났고, 그중 7천여 명이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어 열심히 답장을 썼어요. 연극 〈로젤〉이 제 삶의 고백이었다면 아이들은 편지를 통해 감춰놓았던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이죠. 그렇게 인연이 닿아 지금 저희 공연 스태프로 일하는 아이도 있어요. 이젠 성인이 되었으니 아이가 아니네요. 하하.”

5월 29일까지 대학로 동숭아트홀에서 공연하는 〈장수상회〉에 출연한 후 그녀는 다시 〈바냐 아저씨〉의 엘레나로 돌아간다. 그리고 올가을, 10여 년 만에 다시 〈로젤〉을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겨울이 오면 중창단이 내년에 할 작품을 준비해야 한다. 중창단에 대해 그녀는 할 말이 너무 많다. 뛰어난 연기력과 연륜을 갖춘 중견 연극인들은 많지만 그들이 설 수 있는 무대는 드물기 때문이다.

지난 3년간 고전을 면치 못하던 중창단이 처음으로 빛을 본 작품이 바로 〈바냐 아저씨〉다. 이 작품이 성공을 거두면서 중창단을 바라보는 연극계의 시선도 달라졌다. 가난과 고통 속에 길을 잃고 헤매던 연극인들로 하여금 다시 무대에 서고픈 욕심을 내게 만든 것이다. 김지숙은 중창단이 자리를 잡은 후에는 아이들을 위한 연극 교육 정착에 힘을 쏟고 싶다고 했다.

“연극은 모든 예술의 근간이 되는 기초 예술입니다. 아이들은 연극을 통해 공동체 의식과 책임감은 물론 예의, 감성,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는 능력까지 기를 수 있습니다. 연극은 결코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예술이니까요.”

숨 가쁘게 오가는 무대와 일상 속에서도 그녀는 늘 사랑을 꿈꾼다. 한 남자의 아내로서 죽는 순간까지 순정을 다하는 꽃집 여자, 임금님과 누구보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 싶어하는 배우 김지숙. 일면 극과 극을 달리듯 이율배반적인 두 사람의 삶을 나란히 관통하는 것 역시 ‘사랑’이다. 그녀는 대단한 섹스 예찬론자이기까지 하다.

“저는 섹스가 너무 좋아요. 섹스만큼 삶을 활력 있고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또 있을까요? 나이가 들었다고 사랑을, 섹스를 포기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에요. 단 한순간도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나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섹스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과 소통하는 것이 인생에 얼마나 큰 기쁨과 활력을 주는지, 눈동자를 빛내며 이야기하는 그녀를 보고 있노라니 나이 탓만 해온 것이 살짝 후회스러웠다. 그녀의 말이 맞다. 누구도, 그리고 단 한순간도 스스로 행복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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