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감정에 각인되는 니치 향수

최근 몇 년 사이 니치 향수 수요가 급격히 늘었습니다. 니치 향수란 과연 무엇일까요. ‘니치(niche)’는 틈새라는 뜻입니다. 샤넬, 디올 등 대형 패션 하우스와 에스티로더, 랑콤 같은 거대한 화장품 회사가 지배적인 향수 시장에서, 차별화되는 제품을 만들려는 조향사들이 작은 틈새에서 탄생시켜 명맥을 이어온 향수를 칭합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작은 브랜드에서 생산되는 향수를 다 니치 향수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향수는 본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문명에서 제례용으로 쓰였습니다. 그리스·로마 시대에 위생과 치장을 위해 왕족과 귀족들이 누린 고유의 산물인 셈입니다. 여전히 향수를 만드는 프랑스의 겔랑, 영국의 크리드·펜할리곤스·그로스미스 같은 브랜드는 원래 왕가의 향수를 만들던 곳이었습니다. 과학의 발전과 산업혁명으로 경제 성장이 이뤄지면서 신분에 상관없이 향수를 소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향수 업계는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20세기 초반 프랑스 출신의 사업가이자 조향사인 프랑수아 코티는 특권 계층이 즐기던 향수의 양을 줄이고, 좀 더 저렴한 병에 향수를 담아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1911년에는 패션 디자이너 폴 푸아레가 최초로 패션 디자이너 브랜드 향수를 출시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21년 코코 샤넬이 출시한 ‘넘버5’가 대대적인 히트를 기록하면서 패션 디자인 하우스의 향수 전성시대가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6년에는 에스티 로더가 자신의 이름을 딴 화장품 회사 에스티로더를 설립했고, 1953년 첫 번째 향수를 출시했습니다. 이후 화장품 회사들이 잇달아 향수를 출시하기에 이릅니다.

특권층 전유물에서 패션 하우스로

왕실에 향수를 납품하지 않았고, 패션 하우스도 화장품 회사도 아니었던 첫 니치 향수 브랜드 ‘라티잔 파퓨메’(왼쪽). 편집 숍, 딥티크의 초창기 모습.

이처럼 대형 패션 하우스와 화장품 기업들이 향수를 내놓는 가운데 거인들 틈새에서 니치 향수라 불릴 만한 제품을 처음으로 선보인 브랜드가 있으니 바로 1970년대 화학자 장 라포르테가 설립한 라티잔 파퓨메(L’Artisan Parfumeur)입니다. 라티잔 파퓨메는 왕실에 향수를 납품하지 않았고, 패션 하우스도 화장품 회사도 아니었습니다. 영화 ‘미 비포 유’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루브르박물관 맞은편에 자리한 퍼퓨머리(향수 제조소)로 1978년 이곳에서 출시한 뮈르 에 뮈스크(Mure et Musc)는 현재까지도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기분 좋게 산뜻한 블랙베리와 머스크 향이 청명하게 등장하는 향수입니다. 비슷한 시기, 딥티크가 1961년 디자인 편집 숍으로 시작해 기존의 틀을 깨는 방식으로 1968년 첫 향수 ‘오 드 퍼퓸 로’를 출시했습니다.

니치 향수의 선구자 구딸과 니콜리아

패션모델 출신 아닉 구딸(왼쪽)과 장 폴 겔랑의 조카 파트리샤 드 니콜라이는 니치 향수를 대중의 뇌리에 각인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니치 향수를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시킨 브랜드로는 구딸과 파퓸 드 니콜라이(Parfums de Nicolai)를 꼽을 수 있습니다. 패션모델이었던 아닉 구딸은 향수의 도시 그라스를 방문했을 당시 향수에 대한 새로운 열정을 갖게 됩니다. 당시에는 드물었던 여성 창업자인 구딸은 1981년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에서 ‘오 드 아드리앙’을 출시하고 파리에 첫 번째 부티크를 오픈합니다. 오 드 아드리앙은 상큼한 시칠리안 레몬과 자몽에 일랑일랑, 사이프러스가 조화를 이룬 다채로운 향을 가진 시트러스 계열 향수입니다.



프랑스 왕실에 향수를 납품한 겔랑의 최고 조향사 장 폴 겔랑의 조카로 태어난 파트리샤 드 니콜라이는 ISIPCA(프랑스 조향사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조향사로 일하면서 1989년 자신의 브랜드 파퓸 드 니콜라이를 오픈합니다. 한국에서 만났을 때 그는 니치 향수의 시대를 열게 된 계기에 대해서 “1980년대 말, 저는 향수 업계에 창조 정신이 매우 결여되어 있다고 느꼈습니다. 니치 향수는 향수 업계에 새로운 돌풍을 가져왔고, 제가 이 돌풍의 선구자 중 1명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니콜라이의 인상 깊은 향수는 ‘휘그티’로 상큼한 과일 향을 가진 오스만투스 앱솔루트와 달콤함과 우아함을 가진 재스민 에센스의 조화로움이 느껴집니다. 향을 맡으면 니콜라이와 마테차 한 잔을 마시는 것 같은 장면이 연상됩니다. 두 브랜드는 대기업이 아닌 개인이 창업한 향수 브랜드로 이례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2000년대 들어 다양한 니치 향수 브랜드가 탄생했다. 대표적으로 농구선수였던 벤 고햄(왼쪽)이 만든 바이레도, 천재 조향사 프랑시스 커정이 만든 메종 프란시스 커정이 있다.

1990년 영국 런던에서는 피부 관리사였던 조 말론이 조말론런던을 설립합니다. 그 시초는 조 말론이 평소 친했던 고객들에게 향이 나는 로션과 보디 오일을 개발해 선물로 주면서였습니다. 이때 조 말론이 고객들에게 건넨 향이 잔잔하면서도 매력적인 너트멕(육두구)과 진저(생강)가 배합된 ‘너트멕 앤드 진저’입니다. 1999년 조 말론은 에스티로더에 향수 회사를 매각하고 2011년 조러브스라는 또 다른 향수 브랜드를 론칭합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다양한 니치 향수 브랜드가 본격적으로 탄생합니다. 2000년 프레데릭 말은 모든 사람이 똑같은 향수를 뿌리는 세태에 불만을 느낍니다. 향이 아닌 마케팅과 패키징에 더 신경을 쓴 향수에 싫증을 느낀 그는 마스터 조향사들이 향을 만드는 향수 브랜드, 에디션 드 파퓸 프레데릭 말(Editions de Parfums Frederic Malle)을 만듭니다.

이어 2006년 농구선수 출신 벤 고햄은 자신이 지닌 후각적 기억을 향수로 만들어낸 바이레도를 설립합니다. 2007년에는 LVMH의 상속자인 킬리안 헤네시가 모방을 거듭해 천편일률적인 글로벌 브랜드 향수와는 차별화되는, 럭셔리의 본질에 집중한 ‘바이 킬리안’을 출시합니다. 2009년 실비 간터와 크리스토프 세르바셀은 시트러스 계열 향수가 지속력이 떨어진다는 단점을 극복하고자 지속력이 긴 시트러스 계열 ‘오 드 코롱’을 만듭니다. 이들이 설립한 브랜드가 아틀리에 코롱(Atelier Cologne)입니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향수계의 오스카상인 ‘코티상’을 수상해 천재 조향사로 불렸던 프란시스 커정은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 메종 프란시스 커정(Maison Francis Kurkdjian)을 세웁니다.

지금은 결코 니치(틈새)하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많은 조향사와 창립자에 의해 다양한 니치 향수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미 잘 팔리고 있는 향수를 모방하는 것이 아닌 조향사의 세계관을 온전히 담아낸 향수, 시장에서의 반응과 인기보단 만드는 사람의 정체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향수, 마케팅과 광고가 아닌 향수의 본질에 집중하는 조향사들이 만든 향수가 이른바 틈새 향수인 니치 향수입니다. 향수는 사람들의 기억과 감정에 영향을 끼치는 존재입니다. 글로벌 디자이너 브랜드의 향수든, 화장품 회사의 향수든, 니치 향수든 좋은 감정으로 오래 기억되고 싶은 사람으로 만드는 향수를 만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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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사진 게티이미지 사진제공 홈페이지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