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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column

반전과 인권 운동의 아이콘, 존 바에즈

성지연 에세이스트, 국문학 박사

입력 2022.10.18 10:00:02

‘포크의 전설’ ‘노래하는 인권운동가’ ‘밥 딜런의 연인’…. 수많은 수식어가 뒤따르는 존 바에즈의 인생은 현재진행형이다.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현장에 서 있었던 기억과 자신의 분투를 담은 그의 자서전을 다시 읽었다.
1963년 미국 워싱턴 행진에서 노래하는 존 바에즈.

1963년 미국 워싱턴 행진에서 노래하는 존 바에즈.

연예인의 삶은 어떨까. 유명 가수의 삶은 화려할까. 내게 익숙한 것은 노래다. 노래는 어디에나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다음 날 시험인데 밤늦도록 라디오로 듣는 노래가 참 좋았다. 젊은 날에는 친구들과 같은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함께 모여 노래를 불렀다. 쓸쓸한 날에는 혼자 누군가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미국 가수 존 바에즈(81)의 노래를 그때 어디선가 들었다. 청아하면서도 구슬펐다. 청승맞다고 할까. ‘Donna Donna(도나 도나)’ ‘The River In The Pines(솔밭 사이로 흐르는 강)’ ‘Diamonds And Rust(다이아몬드와 녹부스러기)’ 등이다. 밥 딜런이 작곡한 ‘Blowing in the wind(바람만이 아는 대답)’나 ‘Forever Young(영원한 젊음을)’도 그의 목소리로 자주 들었다.

바에즈가 1987년에 출간한 ‘존 바에즈 자서전: 평화와 인권을 노래하다’를 보니 딜런은 한때 바에즈의 연인이었다. ‘다이아몬드와 녹부스러기’는 딜런과의 추억에서 나온 곡이었다. 영어 노래 가사를 그대로 알아들을 리 없었고 드문드문 단어들만 귀에 들어왔다. 추억에는 보석 같은 순간과 마음 시린 순간이 있다는 정도로 알아들었던 것 같다.

바에즈 자서전을 읽으며 다른 노래들도 찾아 들었다. 옛날에는 음반을 사야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이제는 인터넷으로 온갖 노래를 다 들을 수 있고 친절하게 번역된 가사들까지 붙어 있다. 그런데 기억과는 좀 달랐다. 바에즈는 서정적인 노랫말 사이에 절대 잃어버릴 수 없는 것, 절대 지켜야 하는 것,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것들을 놓아뒀다. 바에즈의 삶이 궁금해졌다.

‘길 위의 스타’와 ‘신의 종’

“나는 음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음악에서 그러하듯 전쟁터에서도 생명의 편을 들지 않는다면, 그 모든 소리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소용없죠.”
1970년, 책의 서문을 쓴 음악평론가 앤서니 드커티스와의 인터뷰에서 바에즈는 이렇게 말했다. 바에즈는 자신의 음악도 생명의 편에 있지 않다면 의미가 없다고 얘기했다. 바에즈는 열여섯 살이 되기 전 ‘비폭력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마하트마 간디가 세계에 소개하고 마틴 루서 킹이 미국에 들여온 급진적인 비폭력 개념이다.



1963년 마틴 루서 킹이 미국 워싱턴 DC에서 ‘내겐 꿈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을 때 바에즈는 그 자리에 있었다. 이미 성공적인 가수였던 바에즈는 35만 명의 군중을 이끌며 ‘We Shall Overcome(우리 승리하리라)’을 선창했다. 바에즈는 자신의 마음에 걸린 훈장 중 하나는 그날 그 자리에서 노래했다는 이유로 스스로에게 수여한 것이라고 돌아봤다. 바에즈는 오랫동안 흑인 인권운동에 참여했고, 베트남전쟁이 시작되자 반전운동으로 나아갔다.

바에즈 자서전이 투사 가수가 탄생한 이야기냐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바에즈가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인간이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누구의 삶도 그렇게 쉽지 않다. 바에즈는 ‘길 위의 스타’와 ‘신의 종’이라는 두 역할 사이에서 늘 동요했다고 밝혔다. 개인적 성공과 공적인 가치, 즐기는 인생과 자신의 소명 사이 갈등이었다.

자서전에는 바에즈 자신이 저격당한 일화도 등장한다. 한 만화가가 ‘조애니 포애니’라는 인물을 그렸다. 리무진을 타고 비싼 순회공연을 다니며 가난과 굶주림에 반대하는 노래를 부르는 인물이다. 바에즈는 항의했지만 만화가는 조애니 포애니는 존 바에즈가 아니라고 부인했다. 바에즈 스스로도 부와 명성으로 혼란을 겪었다. 버는 돈의 많은 부분을 기부하면서도 돈이 많다는 죄의식에 시달렸다. 바에즈는 파리에 가서 값비싼 드레스를 입어보고 스스로를 여왕처럼 느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울기 시작한다.

신경증을 가진 반전 가수

평화와 인권을 노래하다

평화와 인권을 노래하다

1960년대 미국에서 베트남전쟁은 뜨거운 주제였다. 바에즈는 징집 반대를 위한 데모에 참여했고, 이로 인해 두 번이나 구치소에 수감됐다. 국방세 납부를 거부했고, 동료들과 ‘비폭력연구소’를 열었다. 여기서 비폭력에 대한 공부와 묵상과 기도 등 영적인 수행을 했다. 1972년 바에즈는 ‘국회의사당을 에워싼 인간 띠’라고 불린 시위를 조직했다. 베트남 여성 및 아이들과 연대하겠다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1972년 바에즈는 미국 전투기 B-52가 폭격을 퍼붓는 베트남 하노이를 13일간 방문했다. 미국 민간단체가 베트남 국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북베트남으로 방문객을 보내고 있었다. 바에즈의 일행은 전쟁포로들에게 크리스마스 우편물을 전달하기 위해 떠났다.

그때 바에즈는 온갖 신경증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먹기 두려운 음식을 먹어야 하고, 밤 여행을 해야 하고, 낯선 사람들과 동행해야 했다. 머릿속 걱정으로 온몸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여행은 의미가 있었지만, 바에즈는 미국으로 돌아오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여행 사흘째 되는 날 밤 미국의 폭격이 시작됐다. 방공호로 대피한 바에즈는 두려움을 겪어야 했다. 하노이를 방문한 13일 중 11일 동안 ‘크리스마스 폭격’이 쏟아졌다. 죽음은 도처에 있었다. 돌아가려고 했으나 비행기가 없었다. 활주로를 유일하게 이용한 것은 중국 비행기였다. 중국 대사관에 가서 사정을 한 후에야 하노이를 벗어날 수 있었다.

바에즈는 미국으로 돌아와 베트남에서 녹음한 소리들을 넣어 앨범 ‘Where Are You Now, My Son?(아들아, 넌 지금 어디 있니?)’을 만들었다. 베트남 국민들에게 보내는 선물이자 살아남은 것에 대한 고마움의 기도였다.

가수들의 삶은 각각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싱어송라이터들의 삶은 어떤 식으로든 노래와 연결된다. 살면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행동한 모든 것이 자신의 노래에 담겨 있기 마련이다. 바에즈는 쉽지 않은 삶을 선택하고, 쉽지 않은 길을 걸어가며 노래를 불렀다.

쉽지 않은 것은 가정생활도 마찬가지였다. 1967년 바에즈는 징집을 거부한 젊은이들을 지원하다 어머니와 함께 수감됐다. 면회 온 데이비드 해리스 역시 징병 거부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바에즈는 1968년 해리스와 결혼했다. 바에즈는 좋은 아내가 되려고 애썼다. 그는 스스로를 여왕에서 아내로 변화시키고자 정신과 진료실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고 고백했다. 바에즈는 남편과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아내 노릇을 제대로 해낼 때는 무척 행복했다.

거기까지였다. 감옥에 갇혔던 남편이 돌아온 후 바에즈는 이혼했다. 시사주간지 ‘타임’이 “세기의 결혼”이라고 말한 그 결혼이 끝을 맺었다. 둘 사이엔 아이도 있었다. 바에즈는 이혼의 이유를 자신이 숨을 쉴 수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아내가 되기 위해 애쓸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아내 노릇을 제대로 해낼 수 없었을 때 느끼는 실패감보다 외로움을 택하겠다는 거였다.

바에즈는 이혼 과정을 허세 없이 밝혔다. 이혼은 남들처럼 싸우고 울고, 양육권을 놓고 협상하고 무너지는 과정이었다. 바에즈는 당시를 어리석고 소유욕 강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로서 각자 최선을 다했다고 돌아봤다. 참 솔직한 가수다.

노래하는 기쁨

“나는 기쁘다. 걱정도 무대공포증도 없이, 오직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기분 좋은 느낌. 그리고 나의 기운과 목소리를, 투쟁 속에 살고 특별한 방식으로 나의 진가를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빌려주고 싶은 욕망만이 존재할 뿐이다.”

바에즈는 1980년대 초반 레흐 바웬사가 살고 있는 폴란드를 방문했다. 오랫동안 폴란드 연대자유노조를 이끌었고, 폴란드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몰락한 후 제2대 대통령에 취임한 바로 그 바웬사다. 당시 바웬사가 가택연금 상태였기에 바에즈는 그의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만났다. 바에즈는 바웬사를 세계 역사상 세 번째로 대중 비폭력 운동을 이끌고 있는 빛과 같은 존재로 평가한다. 폴란드 연대자유노조의 투쟁이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서 킹에 이어 바에즈 평생에 걸친 신념인 비폭력주의를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바웬사는 바에즈에게 읍내 200명의 사람에게,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엔 미사에서도 노래를 불러줄 수 있는지 물었다. 바에즈는 이곳 사람들에게 쓸모 있는 일을 하는 것이 큰 기쁨이라고 말했다. 바에즈는 바웬사와 그의 아내와 6명의 아이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러고 나서 200명의 사람 앞에서 기쁘게 노래를 불렀다. 다음 날 미사에서, 얼마 후 대학에서도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청한 사람들도 존 바에즈가 진짜 그곳에 왔다는 걸 믿지 못했다.

노래하는 기쁨이 방문하는 곳마다 흘러넘쳤다. 바에즈에게 기쁨이란 자기 노래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것이었다. 바에즈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곳에서는 또 하나의 정신이 창조된다고 말했다. 초대받은 교구 안마당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노래하고, 아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이웃을 돌봤다. 바에즈는 기쁜 마음으로 그런 장소에서 언제나 노래를 불렀다. 세계적인 가수에 걸맞은 보수나 음향 시설은 중요하지 않았다.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은 바에즈의 진가를 인정했다.

홍미로운 것은 1960~70년대 미국의 저항 가수를 대표했던 바에즈와 딜런의 차이다. 바에즈는 딜런의 사회적 참여가 노래 만들기로 한정돼 있다고 은근히 비판했다. 집회나 시위는 딜런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딜런이 말하길, 바에즈는 자신이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기 자신은 아무도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고 했다. 바에즈가 노래만이 아니라 운동을 통해 사회에 직접 개입했다면, 딜런은 노래를 통해서만 사회와 관계를 맺었다.

사회적 감동의 노래들

1980년대 후반 대학에 들어갔을 때 존 바에즈의 노래는 이미 앞선 세대의 것이었다. 선배들의 권유로 바에즈의 노래를 들어봤지만, 우리 세대의 정서와는 거리가 있었다. 바에즈의 자서전을 읽으며 그의 노래를 다시 들어봤다. 대개 20대까지 좋아했던 노래를 평생 듣게 된다는데, 뒤늦게 바에즈의 노래에 마음이 끌렸다.

“송아지들은 이유도 모르는 채 쉽게 잡혀 도살장으로 끌려가지 / 하지만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제비처럼 나는 법을 배웠지 / 바람은 어떻게 웃을까 / 온 힘을 다해 웃지 / 하루 종일과 절반의 여름밤에 웃고 웃지”

‘도나 도나’의 3절 가사다. 가스실로 끌려갔던 유대인의 운명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송아지에 빗대 부른 노래다. 바에즈의 한없이 청승맞은 목소리가 이 세상 약한 존재들에 대한 연민,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열망을 느끼게 한다. 동시에 무자비한 권력에 대한 당당한 저항을 생각하게 한다.

쉰 살이 넘어 20여 년 만에 바에즈를 다시 만나보니 그가 새롭게 보였다. 가사를 함께 음미하니 그의 노래는 인간이 누려야 할 존엄과 품위를 담고 있었다. 이름 붙이자면 ‘사회적 감동’이라고나 할까. 이 감동은 ‘감각적 감동’과는 다른 거다. 모든 노래가 사회적 감동을 담을 필요는 없을 거다. 노래는 일단 즐겁고 슬프고 공감을 불러일으켜야 하니까 말이다.

감각적 감동이 차고 넘치는 오늘날, 사회적 감동을 담은 노래를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음악이 전달하려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면, 사람이 다양하듯 그 마음도 다채로울 수밖에 없을 거다. 바에즈의 노래는 그 마음이 바에즈의 치열했던 삶과 중첩해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여름밤을 웃고 또 웃는 바람의 자유는 21세기 오늘날에도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초시간적 공감일 거다.

연예인의 삶은 여전히 나하고 거리가 멀다. 게다가 외국 유명 가수의 삶은 먼 나라 이야기다. 그런데도 자서전과 노래로 다시 만난 바에즈는 무척 친숙하게 느껴졌다. 바에즈가 노래로 전하려 했던 것, 삶으로 보여주려 했던 것은 내게 경의를 품게 했다. 앞으로 누군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냐고 물으면 다른 이를 고를 거다. 하지만 가장 존경하는 가수가 누구냐고 물으면 바에즈를 선택할 것 같다.

#존바에즈 #다시만난그녀들 #성지연 #여성동아


성지연의 다시 만난 그녀들
1970년 출생.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다양한 글쓰기를 하는 전업 에세이스트로 살아가고 있다.




사진 게티이미지 
사진제공 삼천리



여성동아 2022년 10월 7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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