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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essay

‘트알못’에서 ‘트잘알’로 셀프 과외 성공한 썰

박윤진 대홍기획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입력 2022.04.18 10:30:01

광고인에게 트렌드 따라잡기는 숙명이다. ‘플렉스(flex)’를 보고 오타라고 지적해 후배에게 눈총을 받은 뒤, 어쩔티비를 ‘어쩔시크릿쥬쥬리미티드에디션’으로 받아치기까지의 눈물겨운 스토리.
‘이거… 오타인가?’ 카피라이터 후배들이 써온 카피를 함께 보며 의견을 나누는 자리, 초면으로 보이는 낯선 단어 하나가 눈에 띄었다.

“플…렉…스? 강 대리, 이거 오타 아니야? 플렉서블(flexible)을 잘못 쓴 건가?”

아차, 후배의 눈빛이 긴장에서 한심으로 바뀐다.

“팀장님, 이거 플렉스라고 요즘 힙합에서 많이 쓰는 단어예요.”

“그래? 요즘 많이 쓴다고? 김 카피도 이 단어 아니?”



나만 모르는 게 아니라고, 아니 일반적으로 모르는 게 당연한 거라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른 팀원에게 SOS를 쳤으나 돌아오는 답은 내가 원하는 반응이 아니었다.

“네, 알죠. 쇼미더머니에 나오는데….”

하아, 모르면 그냥 검색을 해볼걸. 혹시나 영어 단어를 잘못 쓴 게 아닐까 굳이 친절하게 지적해주려던 ‘꼰대 마인드’가 내 발등을 찍었다. 돈으로 자기 능력을 과시한다는 뜻의 플렉스(flex). 지금이야 일상어처럼 자주 쓰는 익숙한 말이 됐지만 몇 년 전 내게는 그야말로 생경한 단어였다. 당시 나는 비교적 낮은 연차의 팀장이었고 일을 거절 못 해 매일 업무의 쓰나미 속에서 허우적대는 중이었다. TV나 유튜브를 보는 건 일상의 사치였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면 TV나 유튜브 볼 시간이 있으면 책을 한 자 더 보겠다는 지적 허영에 빠져 있던 때이기도 했다. 그러니 플렉스를 내가 아는 플렉서블이나 콤플렉스(complex)의 오타일 거라고 파워당당 추론했던 것이다.

“아… 결국 내가 이런 선배가 됐다니.”

요즘 말을 모른다는 부끄러움도 잠시, 그토록 되고 싶지 않았고 행여 될까 두려워했던 ‘올드한’ 선배 대열에 들어섰다는 충격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광고인에게 업그레이드는 생명이다. 주기적으로 업그레이드해야 쌩쌩 돌아가는 컴퓨터처럼 광고인도 최신 트렌드로 쉼 없이 업그레이드돼야 살아남을 수 있다.
예전엔 이게 나름 쉬웠다. 시청률 1위를 찍고 있다는 TV 드라마를 찾아보거나, 주말 하루 날 잡고 ‘무한도전’과 ‘개그콘서트’만 시청해줘도 어느 정도는 트렌드 진도를 뽑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시절은 끝난 지 오래. 넷플릭스, 왓챠, 웨이브, 디즈니플러스, 유튜브의 셀 수 없는 채널들에 틱톡과 트위터까지. 사람들이 열광하는 콘텐츠는 지금 이 순간에도 미친 듯이 세상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5초 만에 끝나는 승패

카피라이터는 카피만 잘 쓰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랬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일 잘하는 카피라이터는 카피를 잘 쓰는 카피라이터가 맞다. 다만 그 잘 썼다는 카피의 기준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을 뿐.

혹시 요즘 신문 전면에 걸쳐 구구절절 기업의 철학을 이야기하거나 브랜드의 신념을 펼치는 인쇄광고를 본 적이 있는가. 카피라이터 ‘막냉이’ 시절 삼성생명의 ‘딸의 인생은 길다’를 열심히 필사했다. “왜 넘어진 아이를 일으키십니까?”로 시작하던 SK텔레콤의 ‘사람을 향합니다’도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이처럼 심금을 울리고 가슴을 후벼 파는 카피는 이제 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 옛날 능력 있는 카피라이터는 자신만의 언어를 가진 사람이었다. 새로운 생각을 쓰는 사람이었다. 시인이자 작가였다. 유행어 따위 몰라도 상관없었다. 왜냐, 잘 쓴 카피가 곧 유행어가 되는 시대였으니까.

지금은? 큰일 날 소리. 시대가 바뀌었고 사람이 달라졌다. TV에서 디지털로 콘텐츠 주도권이 넘어가면서 사람들은 더 조급해졌고 참을성을 잃었다. 긴 호흡 문장을 기다려주는 사람은 없다. ‘빨리빨리’의 민족은 2배속 빨리빨리를 외치는 초스피드 민족이 됐다.

흔히 디지털 미디어는 시간을 빼앗는 싸움이라고 한다. 보고픈 콘텐츠는 넘쳐나고 봐야 할 채널도 늘었지만, 이용자의 가용시간에는 변화가 없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싸움은 작은 사각형 섬네일 속에서, 타이틀의 어그로 속에서 펼쳐진다. 주어진 시간은 5초. 그 이내에 이 영상을 계속 봐야 할 의미를 주지 못한다면…. 그 싸움은 패배다. “잠시만요, 고객님. 10초만 더요, 딱 1분만요~” 애걸복걸하는 심정으로 오늘도 카피라이터들은 고군분투 중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우리가 찾은 새로운 방법은 바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콘텐츠로 먼저 접근해 관심을 유도하는 것. 한동안 “사달러~”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는가” “무대를 뒤집어 놓으셨다” 같은 온라인상의 인기 밈(meme)이 광고에 등장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지금 유행하는 키워드가 무엇인지, 사람들이 혹하는 트렌드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건 피 튀기는 마케팅 전쟁터에서 강력한 무기 하나를 잃은 것과 같다.

‘트잘알’과 스냅백 쓴 부장님 사이에서

아, 그래서 나는 어떻게 됐냐고? 그날의 사건 이후, 이대로 트렌드를 포기한 ‘트포자’가 될 수는 없다는 결연한 의지로 나는 나름대로 강력한 돌파구를 찾았다. 바로 인생의 낭비라 여겼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시작한 것이다. 그중에서 내가 주목한 건 인스타툰이었다. 소소한 일상을 몇 컷의 그림으로 올리는 인스타툰을 시작하며 나는 자신의 일상을 그려 올리는 수많은 작가와 친구가 됐다. 나의 인친들은 10대부터 60대까지 나이대도 다 다르고 중고등학생, 직장 초년생, 아티스트, 의사, 디자이너, 서점 직원, 변호사 등 직업도 다채롭다. 사는 곳도 서울·대전·대구·부산·제주는 물론 일본·영국·캐나다·미국·과테말라까지 지구촌 곳곳에 포진해 있다.

인스타그래머블한 스폿을 찍어 올리며 인생의 하이라이트만 박제하는 인플루언서 계정과 달리 인스타툰에는 좀처럼 자기 자랑을 올리는 사람이 없다. 직접 겪은 재미있는 사건이나 공감 가는 이야기, 요즘 생각하는 것들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그림으로 공유한다. 그리고 그 속에는 요즘 가장 인기 높은 생생한 언어와 주제들이 살아 있다. 요즘은 진짜 MBTI에 진심이구나. 해맑은 ENFP를 ‘대가리 꽃밭’이라고 부르는구나. 깻잎 논쟁과 새우 껍질 논쟁은 아직 안 끝났구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라면 먹고 싶다’ 이런 표현도 쓰는구나.

참신한 유행어는 암기과목처럼 외우기도 한다. 킹받드라슈, 갓벽, 갓생, 킹정. 요즘은 갓이랑 킹자 붙이는 걸 좋아하는구나. 키스는 ‘갈긴다’고 하고, 디저트는 ‘조진다’고 하는구나. 매일매일 틈틈이 눈물겨운 트렌드 특훈을 받으며 어느새 나는 어쩔티비를 어쩔시크릿쥬쥬리미티드에디션으로 받아치고 트렌드 능력고사에서 당당히 상위권에 랭크되는 본인피셜 트잘알로 거듭나는 수준에 이르렀다. 또한 간혹 모르는 신조어를 만나도 당황하지 않고 앞에선 잘 아는 듯 함께 웃다가 뒤돌아서 빠르게 검색하는 스킬도 생겼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내가 미니스커트를 입은 긴 생머리의 중년 여성이나, 유행 지난 스냅백을 쓴 부장님처럼 맞지 않는 옷을 착용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그걸 아는가. 속세를 떠나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 중엔 은근히 광고회사 출신이 많다는 것. 우연히 본 MBN ‘나는 자연인이다’ 속 출연자도, 산속에 작은 오두막집을 짓고 사는 사람도, 직접 사포질을 하며 핸드메이드 가구를 만들던 장인도 다 광고회사 출신이었다.

이런 예는 가까이에도 많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업무 속도와 끝없는 업그레이드의 압박에 지쳐 친애하는 나의 동료 몇몇도 회사를 등지고 업계를 떠났다. 바다 건너로 제빵 공부를 하러 가거나 글을 쓰며 파도를 타는 서퍼가 된 카피라이터도 있다. 바닷가에서 작은 출판사와 서점을 운영하거나 제주도에서 카페를 연 광고인도 있다. 나도 이리저리 업무에 치일 때마다 농담처럼 이런 말을 한다.

“진짜 나 일 그만두면, 개량한복 입고 홀치기염색 하면서 1990년대 노래 틀어놓고 뒷산에서 따다 말린 국화차 동동 띄워 마시면서 살 거야.”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면서, 진짜 이렇게 살아보라면 답답함에 울면서 뛰쳐나올 거면서 종종 이렇게 패기 넘치는 선언을 하는 것이다. 나에겐 작은 꿈이 있다. 언젠가는 세상의 흐름과 동떨어져 초연하게 사는 것. 마음이 흐르는 대로 나만의 시간을 쌓으며 사는 것. 세상의 변화에 쫓기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사는 것. 이것이 언젠가 이루고 싶은 나의 소박한 바람이다. 다른 나이가 되거나 다른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나답게 나대로 사는 삶. 어려운 일도 아니지만 트렌드의 최전선에 있어야 하는 광고인에겐 그렇게 쉬운 일도 아니다.

한숨과 함께 마음을 밀어 넣으며 나는 이내 모니터로 다시 눈을 돌린다. 새로 올라온 플레이리스트의 가수들을 점검하고, 서울 성수동에서 요즘 뜨는 힙한 곳은 어디인지 검색한다. 지난주 ‘SNL’에서 가장 높은 조회수를 받은 콘텐츠는 무엇인지 탐구하다 혼자 히죽대고 낄낄거린다. 거친 유속으로 흐르는 트렌드라는 물살 아래로 두 발을 아등바등 움직이며, 조금은 눈물겹게, 오늘도 나는 대한민국의 카피라이터로 살고 있다.

#일의기쁨과슬픔 #카피라이터 #트잘알 #여성동아


필자소개
광고인 경력 10년이 넘는 박윤진 대홍기획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28세 때 카피라이터로 광고업계에 입문했다. 카스 ‘살아 있는 이 순간’ 등의 카피를 만들었다. 세계 3대 광고제 중 하나인 뉴욕페스티벌과 부산국제광고제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지난해에는 롯데제과 자일리톨 ‘Bad Breath Mask’ 광고로 2021 대한민국광고대상 인쇄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성공한 광고인의 이면에 숨겨진 일상을 인스타그램 @seoulwriter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사진제공 대홍기획 사진출처 인스타그램 @seoulwriter



여성동아 2022년 4월 7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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