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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

art

‘그들만의 리그’ 미술계에서 젊은 작가들이 살아남는 법

글 오홍석 기자

2022. 03. 22

역대 가장 큰 성장세를 보인 2021년 한국 미술시장, 그러나 신진 작가들에게는 여전히 기회의 문이 좁기만 하다. 소수 슈퍼스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젊은 작가들이 살아남을 방법은 무엇일까. 

“한국에서는 어디를 가나 명화 프린트가 벽에 걸려 있어요. 인쇄 품질도 좋지 않고 모작인 걸 누구나 다 아는데 왜 굳이 걸어놓는 걸까 싶죠. 무명 작가 작품이라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림을 구매하는 문화가 생기면 좋겠어요. 그러면 개인은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는 재미를 얻게 되고, 사회적으로 보면 신인 작가들이 성장하면서 미술계 전체가 발전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니까요.”

얼마 전 서울 홍대 근처 한 카페에 걸려 있는 에드워드 호퍼의 ‘밤샘하는 사람들’ 모작을 보며 미술계 종사자와 나눈 얘기다.

시장 3배 성장에도 작가 소득은 하락

최근 미술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특히 2021년은 한국 미술계의 기념비적인 해였다. 예술경영지원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미술시장 거래 규모는 9223억원으로 전년 대비 3배 가까이 성장했다. 대체불가토큰(NFT) 제작이 돌풍을 일으키며 미술의 디지털 세계 진출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장의 과실은 소수 유명 작가와 대형 경매사 및 화랑에만 돌아갔다. 2021년 미술품 낙찰액의 55.8%가 상위 10개 작품에서 발생했다. 낙찰액 기준 상위에 이름을 올린 작가는 이우환, 쿠사마 야요이, 김환기, 김창열 등 하나같이 ‘거장’들이다. 최근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자)가 미술 투자에 뛰어들며 저가 작품에 대한 수요가 늘었다고 하지만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삶은 여전히 어렵다. 문화체육관광부가 공개한 ‘2021 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미술업계 종사자의 연간 수입은 487만원으로 2018년 조사 때보다 오히려 382만원이 줄었다.

소수가 수익 대부분을 가져가는 건 세계 미술계의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하지만 한국은 문제가 유난히 심각하다. 미국 노동통계국의 2020년 자료에 따르면 미국 작가 연평균 수입은 6만5020달러(약 7775만원)다.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작가들이 1인당 GDP(국내총생산) 평균 정도의 수입을 벌어들인다. 유독 어려운 환경에서 우리 젊은 작가들은 예술 활동을 이어나가려고 어떤 방법을 택하고 있을까.



그림 렌털, 전시 기회 제공과 임대 수익

그림 렌털 서비스는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새로운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림 렌털 서비스는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새로운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

“솔직히 돈만 있으면 제 작품을 대중 앞에 전시하고 싶죠. 하지만 작품이 팔리지 않으면 작가가 모든 손실을 떠안는 구조라 망설이게 되더군요.”

전업 작가 정연재(30) 씨 얘기다. 정 씨는 색의 대비를 강조하는 실험적인 추상화를 주로 그린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4년 전 귀국해 전시회를 열고자 뛰어다녔지만 기회를 찾기 어려웠다. 일부 상업 화랑은 자체 공모전을 통해 전시 작가를 선정하고도 대관료와 홍보비를 작가에게 부담시켰다. 대관료를 받지 않는 화랑도 있었지만, 그 수가 많지 않았다. 현재 정 씨는 그림 렌털 기업 ‘오픈갤러리’에 그림을 대여해 대중에게 작품을 알리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

오픈갤러리는 전시를 하고 싶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 작가들과, 작품을 구매하고 싶지만 가격이 부담스러워 망설이는 소비자를 연결해주는 플랫폼이다.

 현재 작가 1500여 명의 작품 4만여 점을 보유하고 있다. 오픈갤러리 ‘그림 구독’ 서비스에 가입하면 3개월 단위로 새로운 그림을 빌려 내 집에 걸고 감상할 수 있다. 해당 작가에게는 소정의 임대료가 지급된다. 오픈갤러리에 따르면 임대 작품의 구매 전환율은 약 3%. 집에 건 그림이 마음에 들 경우 구매에 나서는 소비자가 적지 않다는 의미다. 오픈갤러리 창업자인 박의규 대표는 “한국 미술시장이 소수 화랑과 몇몇 유명 작가 중심으로 돌아가는 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새로운 사업 모델을 구상한 것”이라며 “이 플랫폼을 통해 신인 작가들이 자기 작품을 알리고 수입도 얻을 수 있게 된 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홍보의 장으로 활용하는 작가도 늘고 있다. 인스타그램, 유튜브에 자신의 작품과 작업 과정을 꾸준히 업로드하는 권태훈(32) 작가는 지난해 8월 영국 유명 화랑인 사치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권 작가 SNS를 본 사치갤러리 관계자가 전시를 제안해온 덕분이다. 해외에 연고가 전혀 없는 그는 올해 9월 파리 루브르박물관 전시도 앞두고 있다. 권 작가는 “작품 활동을 하면서 SNS까지 관리하는 게 쉽지는 않다. 하지만 작가는 ‘1인기업’이고 내 작품을 세상에 알리려면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은 작가라고 작업실에서 작품에만 몰두하며 세상이 나를 알아봐주기를 기다리는 시대는 아니다”라고 부연했다.

SNS는 유명 작가와 화랑 위주로 공고히 짜여 있는 미술계 네트워크를 극복할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이의 주목을 받고 있다. 2012년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은 추상미술이 부상한 1910년부터 1925년 사이 시기를 조명한 특별전을 열었다. 당시 전시 기획자들은 당대 활동한 작가의 개인적 친분을 점과 선으로 표현한 네트워크 맵을 제작했는데, 지도 한가운데에는 당대 최고로 이름을 날린 파블로 피카소와 바실리 칸딘스키가 위치했다. 폴 잉그램 컬럼비아대 경영학과 교수는 후속 연구를 통해 “작가의 성공에는 창의적인 역량과 작품의 퀄리티보다 인맥이 중요하다”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 소장은 “한국 미술시장이 최근 수치상으로는 크게 성장했지만, 그 과정에서 미술이 재테크 수단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며 “화랑들이 상업성보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신진 작가 양성에 공을 들이며 아트페어에도 적극적으로 소개해야 우리나라에도 미술을 생활 속에서 향유하는 문화가 정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연재 #권태훈 #오픈갤러리 #여성동아

사진 동아DB
사진제공 오픈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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