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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

column

완판 부른 카니예 웨스트와 갭의 만남

#Not a Rebranding, But a Redirection

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엘 킴벡

2021. 08. 20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외관을 장식한 ‘이지-갭’ 푸퍼 라운드 재킷 홍보 영상.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외관을 장식한 ‘이지-갭’ 푸퍼 라운드 재킷 홍보 영상.

2021년 6월 초의 어느 날 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건물 벽 상단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영상이 하나 올라왔다. 마치 디지털 매핑처럼, 건물 벽에 특이한 하늘색 풍선 같은 이미지가 느린 속도로 360˚ 빙빙 돌며 비친 것. 풍선 같은 이미지 위에는 익숙한 네이비 컬러의 사각형 박스가 얹혀 있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패션 브랜드 갭(GAP)의 로고처럼 보였지만, 실은 갭의 로고를 그대로 차용한 이지(YZY)의 로고였다. 래퍼 카니예 웨스트가 갭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나서며 처음 출시하는 제품을 홍보하기 위해 ‘플로팅 프로젝션(Floating Projection)’이라는 게릴라 이벤트를 연 것이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풍선처럼 보였던 것은, 이지가 2021 F/W 시즌을 타깃으로 발매한 패딩 점퍼인데, 이제까지의 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특이한 디자인이었다. 지퍼도 단추도 없이 앞을 오픈해서 걸쳐 입어야 하는 스타일의 이 패딩 점퍼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무중력 공간에 떠 있는 것 같은 촬영 기법을 사용한 것은 카니예 웨스트의 센스일 것이다.

이지의 게릴라 홍보 이벤트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구겐하임 미술관,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한 LA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의 금속 벽 외관과 할리우드의 유서 깊은 라이브 홀인 팔라듐, 시카고의 가장 번화한 미시간 애비뉴 등 미국 전역의 랜드마크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돼 세상의 이목을 단번에 집중시키는 데 성공했고 판매로도 직결됐다. 

일명 푸퍼 라운드 재킷(Puffer Round Jacket)으로 불리는 이 아이템은 먼저 갭의 오피셜 웹사이트를 통해 미국 한정으로 사전 주문이 진행되었는데, 갭 제품치고는 고가인 2백 달러(22만원 선)라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주문 시작과 동시에 완판됐다. 미국에서만 한정판으로 판매된 하늘색 재킷에 이어 유럽과 일본에서는 같은 디자인의 블랙 컬러를 판매했고, 8월 들어서는 3번째 컬러인 레드의 프리오더가 진행되고 있으며, 다른 아이템들도 하반기에 순차적으로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이 푸퍼 라운드 재킷은 요즘의 트렌드가 잘 반영된 상품이기도 하다. 남녀 구분 없이 XS부터 XXL까지 오직 사이즈로만 구분이 되며 지속 가능성의 시대에 부합하는 재활용 나일론 소재로 제작했다. 이는 앞으로 이지-갭 브랜드가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는 힌트라고 분석된다.



레드 컬러 푸퍼 라운드 재킷을 입고 있는 카니예 웨스트.

레드 컬러 푸퍼 라운드 재킷을 입고 있는 카니예 웨스트.

카니예 웨스트와 갭이 단순히 새로운 아이템 하나를 홍보하고자 이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를 실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020년 갭이 카니예 웨스트를 향후 10년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한다고 발표한 직후 내리막길로 치닫던 갭의 주가가 장중 42.22%까지 치솟고, 그 영향으로 시가 총액이 38억 달러에서 52억 달러까지 상승한 걸 기억한다면 이번 홍보 이벤트는 앞으로의 행보를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볼 수 있다.

갭의 CEO인 소니아 싱갈은 이번 카니예 웨스트와의 컬래버레이션에 엄청난 기대와 전사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전의 갭이라면 대대적인 론칭 이벤트와 함께 일제히 제품을 출시하는 발매 방법을 감행했을지 모르지만, 카니예 웨스트라는 화학작용이 더해지면서 스트리트 브랜드들이 즐겨 사용하는 드롭(Drop, 예고 없이 특정 아이템을 출시) 형식으로 데뷔 컬렉션을 세상에 공개한 것이다. 그 결과 전 세계적으로 큰 화제를 모았을 뿐 아니라 발매하는 족족 매진 사례를 기록하면서, 카니예 웨스트가 죽어가고 있는 갭을 살리고 있다는 평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미디어 그룹 블룸버그의 보도에 따르면, 최근 스위스 투자은행인 UBS에서 이지-갭의 브랜드 가치가 9억7천만 달러에 달한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제 겨우 단 하나의 제품을 선보였을 뿐인 브랜드의 가치가 이처럼 높은 이유는, 카니예 웨스트가 주도하는 컬래버레이션 전반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된 덕분이다. 이제 시작한 시점에서 이 정도 평가라면, 카니예 웨스트가 갭을 어둠에서 구원해낼 구세주가 될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또 하나의 기대되는 조합, 스타일난다 × 박승건

스타일난다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된 박승건 디자이너.

스타일난다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된 박승건 디자이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향력이 높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새로운 디자이너로 영입하는 것은 유명 패션 하우스나 디자이너 브랜드만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그런데 새로운 디자이너의 영입이 화제성 창출은 물론 가시적인 매출 증가로 이어지자 기존의 패션 브랜드 전반에서도 브랜드 내부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기 위해 외부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영입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바로 리브랜딩(Rebranding)이 아닌, 리디렉션(Redirection)의 시대가 온 것이다. 브랜드 전반을 완전히 바꾸는 작업이 아닌, 브랜드 내부의 시스템이나 디자인 프로세스 같은 영역만 역량 있는 사람에게 전권을 주어서 바꾸어나가는 방식이다. 초반에는 브랜드와의 컬래버레이션이라는 형태가 대부분이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브랜드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디자인을 제안하는 총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H&M 그룹의 하이엔드 캐주얼 브랜드인 코스(COS)의 디자이너를 역임하다 유니클로 총괄 디자이너로 활약한 레베카 베이는 최근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마리메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자리를 옮겼다. 남성복 디자이너인 마이클 바스티안은 유니클로와의 컬래버레이션 성공 이후 브룩스 브라더스의 남성복 및 여성복 총괄 디자이너로 발탁됐다. 제나 라이언즈의 퇴임 이후 쇠락의 길을 걷는 와중 코로나19까지 덮쳐 파산 위기에 봉착한 제이크루 역시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슈프림 디자이너 출신이자 자신의 브랜드인 노아를 전개하고 있는 브랜든 바벤지엔을 영입해 브랜드를 재생할 거대한 희망을 걸고 있다.

이런 추세는 비단 해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최근 한국의 1세대 인터넷 베이스의 패션 브랜드로 유명한 ‘스타일난다’가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박승건 디자이너를 영입한 것이다. 자신의 브랜드인 푸시버튼으로 런던 컬렉션에 진출하기도 했으며, 해외 유명 편집 매장 및 온라인 스토어에서도 인기가 높은 디자이너 브랜드를 이끌고 있는 박승건이 창업자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김소희 대표가 물러난 자리를 메우게 됐다는 뉴스는 큰 화제에 올랐다.

자신이 만든 패션 브랜드 스타일난다와 뷰티 브랜드 ‘3CE’를 2018년 로레알 그룹에 매각한 이후 3년간 계속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약하며 브랜드 전반에 기여해온 김소희 대표는 자신을 대신할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현역 디자이너인 박승건을 적극 추천한 것으로 전해진다. 바야흐로, 한국 패션 브랜드에서도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기 위해 영향력이 있는 스타 디자이너 혹은 디렉터를 영입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좋은 선례이자, 새로운 기회임이 분명하다. 로레알 그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브랜드도 디자이너도 윈윈하게 된다면, 한국 패션계에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조엘 킴벡의 칼레이도스코프


뉴욕에서 활동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기네스 팰트로, 미란다 커 등 세기의 뮤즈들과 작업해왔다. 현재 브랜드 컨설팅 및 광고 에이전시 ‘STUDIO HANDSOME’을 이끌고 있다.




사진제공 이지 인스타그램 푸시버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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