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소의 낮 풍경
무용소의 낮은 디자인 잡화점이 메인이다. 폴카랩의 디자인 굿즈와 윤진영 대표가 큐레이션한 디자인 브랜드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또한 낮에 무용소를 방문하면 고현 대표가 직접 내려주는 융 드립 커피도 시음할 수 있다.
취향 뚜렷한 부부가 운영하는 무용소의 낮과 밤은 쓰임이 다르다. 낮은 무용소의 여자 일꾼 윤진영 대표의 디자인 잡화점이 메인이다. 포르투갈의 독특한 타일 양식인 아줄레주에서 영감을 받은 패턴 디자인을 적용한 노트, 캘린더, 포스터 등의 아트워크와 윤진영 대표가 큐레이션한 디자인 제품을 선보인다. 아줄레주 패턴 디자인 굿즈는 리소그래프(lithograph)라는 친환경 인쇄 기법을 적용했다. 낮에 무용소를 방문하면 종이 필터가 아닌 융이라는 직물로 거른 드립 커피도 시음할 수 있다. 18세기 유럽에서 고안한 드립 커피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융 드립 커피는 천을 필터로 사용하는 만큼 추출 과정이 까다로우나 원두의 오일 성분이 그대로 남아 질감과 향이 풍부한 것이 특징이다. “일반 드립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리고 관리가 쉽지 않아 규모가 큰 카페에서 서비스하기엔 어려움이 많아요. 융 드립용 원두를 취급하는 곳도 많지 않고요.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확실히 맛은 좋으니 저희가 한번 해보자 생각했죠.”
무용소의밤 풍경
밤이 찾아오면 무용소의 가구는 쓰임에 맞게 배열을 정비하고 싱글몰트 위스키 시음실로 변신한다(왼쪽). 상시 메뉴인 스위트 플래터와 스코틀랜드 위스키를 주제로 한 ‘고독한 시음회’ 때 선보였던 스카치 에그 플레이트.
무용소의 정기 모임 ‘고독한 시음회’ 때 선보였던 위스키 테이스팅 코스(왼쪽). 겨울에 한정적으로 선보이는 오이스터 플래터.
2018년 부산에서 영화 ‘조제’의 김종관 감독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접했던 위스키 바는 그가 생각한 이상적인 공간이었다. 바텐더인 가게 사장이 들려준 위스키 이야기는 흥미로웠고, 오로지 위스키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 구성이 인상적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막연하게 위스키 바를 꿈꾸게 했다면, 그로부터 1년 뒤인 2019년 가을 김종관 감독의 영화적 영감을 찾는 스코틀랜드 여행에 동행 취재하면서 그 꿈을 현실화하겠다고 다짐했다. “위스키를 잘 알고 좋아하는 감독님의 영향도 있었던 것 같아요. 부산의 위스키 바를 접하면서 위스키에 대한 고루했던 이미지가 깨졌고, 스코틀랜드에서 위스키 양조장과 스카치 위스키 문화를 체험하니 어떤 확신과 함께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는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무용소의 싱글몰트 위스키 리스트를 완성했다.
무용소에는 지역별로 다른 세 가지 스코틀랜드 싱글몰트 위스키를 경험할 수 있는 테이스팅 코스와 곁들임 메뉴도 준비돼 있다. 상시 메뉴인 트러플 초콜릿, 과일 치즈, 스모크 햄, 과일 등의 스위트 플래터와 시즌 메뉴인 제철 석화에 두 가지 소스를 곁들이는 오이스터 플래터는 푸드 스타일링을 배운 윤진영 대표의 손끝에서 완성된다.
무용소의 바 한쪽에 자리한 턴테이블에서 보사노바가 흘러나온다. 알고 보니 고현·윤진영 대표는 대학 동기로 포르투갈어를 전공했고 각기 다른 시기에 브라질로 교환학생을 다녀왔다고 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시 인연이 닿아 부부의 연을 맺은 지 벌써 7년 차다. 인테리어 회사 마케터였던 윤진영 대표와 여행 매거진 에디터였던 고현 대표, 이들은 어떤 연유로 자리 보존도 쉽지 않은 코로나19 시국에 새로운 도전을 계획하게 됐을까. 콘셉트가 확실한 공간인 만큼 오랜 시간 공들였겠구나 짐작했는데 의외로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뤄졌다고 소회를 밝혔다. 먼저 작년 이맘때 윤진영 대표가 10년간 몸담았던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한 것이 신호탄이 됐다. “제 디자인 브랜드를 갖고 싶다는 열망은 오래전부터 있었어요. 업무차 해외 전시장을 돌며 다양한 디자인을 경험할 기회가 많았어요. 그만큼 아이디어도 많았죠. 디자인팀과 협업해 제품을 출시했는데 제 머릿속의 아이디어가 그대로 구현되는 데는 한계가 있더라고요. 온전히 제 생각과 일치하는 디자인을 만들고 싶었고, 제 취향이 반영된 아이템을 셀렉해 판매하는 잡화점도 꼭 해보고 싶었어요.”
전혀 무용(無用)하지 않은 무용소
포르투갈 아줄레주 타일에서 영감을 받은 폴카랩의 디자인 굿즈(왼쪽). 지속 가능한 삶에 기여하는 여행 콘텐츠 브랜드 피치바이피치의 트래블 코멘터리 매거진 ‘피치 바이 매거진’도 무용소에서 구매할 수 있다.
그렇다고 바로 오프라인 매장을 가질 계획은 없었으나, 코로나19의 여파로 당시 ‘론리플래닛’ 편집장이었던 고현 대표가 실직을 하게 됐다. 아내는 디자인을, 남편은 글을 쓰기 위한 작업실을 찾다가 현재의 무용소 자리와 마주하자 판을 키우기로 했다. “원래 카페였던 공간인데 작업실로만 사용하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 꿈인 소품 숍을 낮에 하고 남편의 염원이던 위스키 바를 밤에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죠.” 부부가 집에서 즐겨 마시던 융 드립 커피는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무용소로 가져왔고, 바이닐도 고현 대표가 해외 출장 다니면서 하나둘 사 모은 것들이다. 겉으로 볼 땐 다소 까다롭고 고상하게 느껴졌던 싱글몰트 위스키, 융 드립 커피, 바이닐, 리소그래프는 모두 동갑내기 부부의 소소한 취미이자 취향이다.
싱글몰트 위스키 입문자를 위해 쉽고 자세하게 설명돼 있는 무용소의 주문서.
무용소의 무용은 쓸모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은 큰 쓰임을 지녔다는 장자의 무용지대용(無用之大用) 이론과 맞닿아 있다. 유용함과 거리가 멀다고 꼭 쓸모없는 것은 아니라는 무용소 두 일꾼의 외침이 비로소 이해되는 대목이다. 이들의 무용하고 사소한 시도가 어떻게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지 천천히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진 홍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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