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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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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을 보고 웃고 떠든 사람들 중에는 주변의 평범한 남성 있을 수도...” 여성들이 n번방 사건에 분노하는 이유

EDITOR 김가영

2020. 04. 01

차마 입에 담기 힘든 한 온라인 성착취 사건에 온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특히 여성들의 분노와 공포는 얼마나 크고 어디에서 기인하나. 이들의 목소리와 전문가 및 여성 단체의 이야기를 들었다.

n번방 사건을 바라보는 여성들의 분노와 두려움

3월 25일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을 협박, 성 착취물을 제작·유포한 텔레그램 박사방의 운영자 조주빈(25)이 검찰에 송치되기 전 취재진 포토라인 앞에 섰다. [동아DB]

3월 25일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을 협박, 성 착취물을 제작·유포한 텔레그램 박사방의 운영자 조주빈(25)이 검찰에 송치되기 전 취재진 포토라인 앞에 섰다. [동아DB]

지난 몇 년간 텔레그램 비밀대화방 ‘박사방’을 통해 아동·청소년 성착취 동영상을 제작·유포해온 운영자, 조주빈이 지난 3월 20일 검거됐다. 닷새 뒤 조씨의 신상이 언론에 공개됐을 때 대다수 사람들의 반응은 “저 사람이 그 엽기적인 성착취 동영상의 가해자가 맞느냐”였다. 화면에 비친 조씨의 얼굴은 바로 옆집에 사는 이웃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평범했기 때문. 그는 수도권의 한 대학을 졸업했고 교내에서는 학보사 기자로 활동했으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기적인 봉사활동을 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조씨가 온라인상에서는 가혹하고 엽기적인 성 착취를 일삼는 일명 ‘박사’였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분노했다. 

수백만 명의 회원이 가입한 한 여성 커뮤니티에는 “천인공노할 잡놈이라고 생각했는데 대학생에다 학보사 기자까지 한 평범한 20대라니 황당하고 분개스럽다” “저런 인간이 내 주변에도 없으리란 법 없으니 더 소름끼친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속으로는 범죄 대상을 물색했나보다” “평범한 인간이 그런 끔찍한 성범죄를 저질렀다니 정말 누굴 믿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등의 글들이 쏟아졌다. 

여성들의 분노는 성착취 동영상을 공유한 n번방 참여자의 숫자가 26만 명(중복 접속 포함)에 달한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극대화됐다. 중복 접속자 수를 제외하더라도 수만 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 적지 않은 숫자에 많은 여성들이 두려움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고 있다. 

30대 직장인 황모씨는 “연루된 사람이 수만 명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놀랐다”며 “내 주변에도 한 명쯤 있을 것 같아 불안하다”고 말했다. 대학생 김모씨는 “남자를 섣불리 믿을 수 없을 것 같다”며 “주변 남성 지인들을 만나기가 꺼려진다”고 했다. 주부 이모씨는 “그 영상을 보고 웃고 떠든 사람들 중에는 여자 친구가 있는 사람도, 딸을 가진 아빠도 있을 것”이라며 “26만 명이 아니라 10만 명, 1만 명이든 간에 그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섭다”고 전했다. 자신을 예비맘이라고 밝힌 몇몇 여성은 “곧 태어날 딸에게 이런 사회에서 살게 해 미안하다” “자식 낳기 무섭다” “어릴 때부터 성교육을 제대로 시켜야 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26만 명 강력 처벌’에 대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이를 본질과 무관한 남녀 성 대결로 끌고 가거나 조롱과 욕설을 내뱉는 일부 남성들에 분노하는 목소리도 높다. 한 여성 네티즌은 “일반화하지 말라고 부들거리는 남자들이 많은데 그걸 왜 여자 탓을 하느냐”며 “자신이 (n번방 참여자에) 해당되지 않으면 여성들의 불안에 함께 공감해주고 하다못해 범죄자를 욕하기라도 하는 게 맞는 거 아니냐”고 맞받아쳤다. 또 다른 네티즌은 “지금 그 숫자가 중요하냐”며 “26만 명이 아닌 1만 명이라도 그 동안 여성들이 당한 크고 작은 성 착취가 없던 일이 되는 거냐”고 일갈했다. 



한편 피해자의 행실을 탓하며 ‘꽃뱀 프레임’을 적용하는 일부 목소리에 대해서는 “혹여 아이들의 잘못된 판단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미숙한 아이들의 생각을 바로 잡아주는 것은 나이 먹은 어른들이 해야 할 의무” “올바르지 못한 선택을 한 아이들보고 나쁘다고 하기 이전에 올바른 선택지를 고를 수 없었던 환경도 충분히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본인이 지금 2차 가해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 못하는 것 같다” 등의 글도 다수 올라왔다.

“현행 아동·청소년법 처벌 미약해… 국회는 뭐 했나?”

한 온라인 맘카페에 올라온 조주빈 관련 글들. [홈페이지 캡쳐]

한 온라인 맘카페에 올라온 조주빈 관련 글들. [홈페이지 캡쳐]

이처럼 엽기적인 성착취 동영상의 주범이 평범한 20대 청년이라는 점, 핵심 공범 중 다수가 10~20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 해당 동영상을 보기 위해 n번방에 접속한 참여자가 수만 또는 수십만에 이른다는 점, 여기에 분노하는 여성들에 욕설과 조롱을 일삼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점 등은 많은 여성의 분노가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 이유다. 

그 중에서도 여성들이 분노하고 연대하며 지속적으로 ‘26만 명 강력 처벌’ 등을 외치는 가장 큰 이유는 ‘성 범죄에 대한 우리 사회의 미약한 처벌’이다. 현행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아청범)’에 따르면 성착취물 제작을 주도한 조씨는 아동 성착취물 제작 혐의가 인정되면 무기징역까지 받을 수 있지만, 성착취물을 제작하거나 재배포하지 않은 회원들은 성착취물 소지가 인정되더라도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 벌금형에 그친다. 실제로 지난 1년간 ‘다크웹(접속을 위해 특정 프로그램을 사용해야 하는 웹)’에서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내려 받거나 배포한 9개 사건의 판결은 벌금형(7건)과 집행유예(1건)에 그쳤다. 

상황이 이러하자 여성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성 범죄 관련법이 전면 개정돼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국내 최대 여성 커뮤니티 중 한 곳에는 “언론이 조주빈이 누구고 일베였는데 어쩌고 하는 가십성 기사만 쏟아내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라며 “n번방 전 운영자 ‘와치맨’에 대한 검찰 구형이 고작 3년 6개월이라는데 처벌이 왜 이것밖에 안되느냐”는 글이 올라왔다. 댓글에는 “360년도 아닌 3년 6개월이라니…” “그것도 확정이 아닌 구형이라 나중엔 더 깎일 거다” “국회는 관련 법안 안 만들고 뭐 했냐” “여성과 아이의 인권을 지키는 데는 우리나라 법이 한없이 나약하다” “죗값이 가벼우니 저런 범죄를 쉽게 저지르는 거다” “법이 현실을 못 따라가는 건지 따라가고 싶은 맘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매번 아동 범죄·성범죄 있을 때만 시끌벅적하고 그 다음에 없다” “이런 나라에서 맘 편히 아기 낳겠냐” 등의 의견이 쏟아졌다. 

아동 성범죄에 관한 선진국의 강력한 처벌 사례와의 비교 언급도 많았다. “미국은 아동 포르노를 소지만 해도 중형이다” “영국, 독일 등 유럽도 성착취물 소지에만 3년 이하 징역을 내리는데 우리나라는 고작 1년 이하가 말이 되냐” 등 법 개정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기획 정혜연 기자 사진 동아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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