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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

luxury

‘돈 주고 사겠다는데 왜 안 팔아?’ 갈수록 사기 힘든 초고가 명품

EDITOR 정혜연 기자

2020. 01. 05

명품은 원래 비쌀수록 가지고 싶은 법. 그런데 요즘은 돈이 있어도 물건이 없어 살 수 없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연말연시 백화점에는 다양한 목적으로 물건을 사러 온 사람들로 붐빈다. 특히 지난 1년 동안 수고한 가족을 위해 통 크게 지출하기도 한다. 1천만원 이상을 호가하는 시계와 가방 등 초고가 명품에도 기분 좋게 지갑을 연다. 

전문직 워킹맘 이모 씨는 지난해 말 결혼 10주년을 기념하며 한 해 동안 열심히 뛰어온 남편과 자신을 위한 선물을 사려고 서울 강남의 백화점 내 명품 시계 브랜드 롤렉스 매장을 찾았다. 몇 해 전부터 마음속에 담아뒀던 1천만원대 시계 서브마리너와 데이저스트를 나란히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진작부터 허리띠를 졸라매며 자금을 마련해 설레는 마음으로 매장에 들어선 이씨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두 모델 모두 물건이 없었던 것. 직원에게 물으니 “매장에 물량이 들어오면 바로 다 팔려나간다. 입고일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언제쯤 들어온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따로 예약을 받지는 않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매일 출석 체크해야 겨우 구입

최근 롤렉스의 인기 모델은 물건이 없어 출근 도장을 찍어야 겨우 구매할 수 있다고 한다. 왼쪽부터 롤렉스 서브마리너, 데이저스트.

최근 롤렉스의 인기 모델은 물건이 없어 출근 도장을 찍어야 겨우 구매할 수 있다고 한다. 왼쪽부터 롤렉스 서브마리너, 데이저스트.

최근 롤렉스, 에르메스 등 초고가 명품 브랜드의 제품을 사기가 더 어려워졌다. 과거에도 롤렉스의 인기 모델인 서브마리너, 에르메스의 버킨 백이나 켈리 백 등은 국내에서 구입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해외여행을 갔다가 파리, 홍콩 등 물량이 비교적 많은 곳에서 구입해 와야 했다. 

최근에는 인기 모델이 아닌 하위 모델까지도 품절 사태가 빚어지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매장에 대체로 전시되어 있어 어렵지 않게 살 수 있던 롤렉스 데이저스트 모델이 요즘은 운 좋아야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물량을 구하기 어려워졌다. 



명품 정보를 공유하는 한 인터넷 카페에는 ‘두 달 만에 데이저스트 샀다’ ‘일주일 동안 매일 방문해서 겨우 샀다’ 등 관련 글이 화제다. 해당 글에는 어김없이 ‘축하한다’ ‘부럽다’ 등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거리는 이들의 부러움 섞인 댓글이 달린다. 

에르메스도 상황은 비슷하다. 원래 에르메스는 2천만원에 이르는 버킨 백과 켈리 백을 에르메스 우수 고객에게만 판매하는 정책을 고수해왔다. 그런데 요즘에는 하위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볼리드 백, 린디 백 등 1천만원이 넘는 가방들조차 색상, 사이즈 등 선택의 여지없이 매장 재고에 따라 구입해야할 정도가 됐다. 

상황을 확인해보기 위해 지난 12월 중순 강남의 한 백화점 에르메스 매장을 방문했다. 매장이 한산해서 그냥 입장할 수 있는 줄 알고 들어갔더니 정장을 빼입은 남자 직원이 가로막았다. “매장 내 고객 수용 인원을 고려해 입장을 제한하며,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대기 명단을 받고 있으니 접수하라”는 설명이었다. 휴대전화 번호를 아이패드에 입력하니 카카오톡으로 글이 왔다. 앞에 스무 명이 대기 중이라는 메시지가 떴고 예상 대기 시간은 20여 분이었다. 백화점 안을 빙빙 돌며 기다린 끝에 겨우 입장할 수 있었다. 

매장 안에 들어서자 가든파티 백, 에블린 백 등 다양한 가방이 눈에 띄었다. 이 가운데 1천만원이 넘는 볼리드 백과 린디 백은 각각 검은색만 전시돼 있었다. 직원에게 “다른 색상이나 사이즈는 없냐”고 묻자 “지금 볼리드는 31 사이즈 한 개만 남아 있고, 린디는 블랙과 화이트 두 가지인데 사이즈는 30으로 동일하다”고 설명했다. 

다른 날에는 더 많은 물건을 볼 수 있을까 싶어 “언제쯤 물건이 더 들어오느냐”고 묻자 직원은 “그나마 연말이라 물건이 있는 것이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볼리드 등 인기 모델은 매장에 들어와 있지도 않았다. 요즘처럼 붐빌 때는 오전에 전시하면 오후에 바로 나가는 편”이라고 답했다. 

직원은 질문을 던질수록 냉랭하게 대답했고, 두세 종류의 가방을 한꺼번에 놓고 고르려고 하자 선택을 빨리 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뒤돌아보니 매장 내 대기하고 있는 다른 고객들이 내 앞의 가방을 쳐다보며 착용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직원에게 “전시된 가방 이외에 버킨이나 켈리를 구입할 수는 없냐”고 묻자 “국내 에르메스 매장 가운데 한 곳에서 꾸준히 실적을 쌓아 올려야 추후 언젠가 구입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일단 다른 제품부터 살 것을 권했다.

인기 모델은 조금씩, 충성 고객에게만

명품 브랜드마다 인기 모델은 정해져 있다. 각 회사는 이런 모델의 경우 국가별로 물량을 적게 내놓는 대신 가격을 지속적으로 올리는 정책을 취한다. 

롤렉스의 경우 불과 4~5년 전까지만 해도 10개의 다이아몬드가 숫자 열에 박힌 데이저스트 텐포인트 모델이 1천2백만원대였으나 최근에는 1천3백56만원에 판매되고 있다. 많은 남성들이 선호하는 롤렉스 서브마리너 역시 4~5년 전에는 1천5백만원대였는데 최근에는 1천6백38만원으로 올랐다. 

에르메스 역시 몇 해 전까지 1천만원이 넘는 가방이라고는 버킨과 켈리를 제외하고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린디 30 사이즈가 1천29만원에, 볼리드 31 사이즈가 1천47만원에 판매되고 있다. 

이마저도 가격을 또 언제 기습적으로 올릴지 모르는 상황. 소비자들은 “인기 명품은 있을 때 사는 게 돈 버는 길”이라고 입을 모은다. 40대 워킹맘 박모 씨는 “지난해 유럽 여행을 갔을 때 에르메스 매장에서 할잔 백을 샀는데 볼리드 백을 하나 더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내려놓고 나왔다. 그런데 지금은 가격이 오른 데다 국내에서는 사기도 어려워 그때 구매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기업에서는 이처럼 물량 공급을 조절해 소비자를 애달게 만드는 마케팅 전략을 펼친다. 인기 상품을 내걸어 모객을 한 뒤 비슷한 유형의 다른 물건을 사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국내 대기업 마케팅팀에서 10여 년 근무한 경력이 있는 한 마케팅 전문가는 “에르메스 혹은 롤렉스와 같은 글로벌 명품 브랜드의 경우 인기 모델을 박리다매로 팔아 이윤을 남기는 것보다 소량씩 내놓으며 제품 고유의 가치를 높이는 쪽으로 경영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런 마케팅 전략이 모든 브랜드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초고가 명품 브랜드가 안고 있는 문제는 스테디셀러 이외 모델은 인기가 떨어진다는 점이다. ‘인기 모델을 사고 싶으면 비인기 모델부터 사라’는 정책을 펼친다. 하지만 이는 글로벌 명품 브랜드이기 때문에 가능한 마케팅 전략이지 대표할 만한 인기 모델이 없는 브랜드들은 섣불리 따라 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사진 박해윤 홍중식 기자 디자인 최정미 사진제공 롤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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