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 조윤
입력 2019.08.12 17:00:01
여행의 설렘과 일상의 여유로움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한 달 살기’. 누구보다 이 두 가지가 고플 엄마가 아이와 함께 떠난 일상 같은 여행, 여행 같은 일상의 이야기.

요즘 그 흐름의 중심에 있는 것이 한곳에 오래 머물며 여행을 일상처럼 즐기는 ‘살아보기’다. 지난 3월 인터파크 투어가 자사 해외 항공권 구매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한 달 살기 여행 수요는 2016년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살림과 육아에 올인해야 하는 ‘전업맘’이라 힘들고, 가정생활과 일 두 가지를 모두 잘해야 하는 ‘워킹맘’이라 고달픈 이 땅의 엄마들이 아이와 함께 떠난 한 달 살기의 모습은 어떨까. 때로는 현지인처럼, 때로는 이방인처럼 여유와 설렘을 오간 이들의 한 달 살기를 들여다봤다.
제주도
초보 부부가 아이를 배운 시간
제주에서의 한 달 살기

이씨가 여행지로 택한 곳은 제주도 제주시 구좌읍. 제주도는 워낙 한 달 살기로 인기가 높은 곳이라 인터넷 카페에 하루에도 정보가 수십 개씩 올라오는 덕에 숙소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가족이 택한 곳은 도시에선 보기 힘든 마당이 있는 독채. 숙소 렌털비는 보증금 30만원을 포함해 2백만원 정도 들었다.
제주에서의 한 달은 서울에서의 일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워킹맘이던 이씨는 아이가 아침에 눈뜨는 것조차 보지 못하고 출근할 때가 많았지만 제주에선 온전히 아이 스케줄에 맞춰 가족의 시간표가 돌아갔다. 오전엔 4백 개가 넘는 제주의 오름 중 한 곳을 골라 온 가족이 함께 올랐고 숙소에 돌아온 뒤엔 낮잠을 실컷 잤다. 오후에는 바닷가에서 모래 놀이를 즐겼다. 밤에는 늘 잠 못 드는 아이를 재우는 게 부부의 숙제였는데 제주에서 아이는 낮에 신나게 놀고 초저녁부터 ‘꿀잠’을 잤다.
부부의 한 달 살기 목표는 딱 세 가지. 아이에게 밥 잘 먹이고 자연을 많이 접하게 하는 것, 하루에 책 두세 권은 꼭 읽어주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겐 평범한 일상이 바쁜 엄마에겐 하나의 ‘꿈’이었다.
“아이가 또래에 비해 작은 게 제가 밥을 잘 해주지 못해 그런 게 아닐까 걱정했어요. 그래서, 남편과 저는 사 먹어도 아이 음식은 꼭 집에서 제주도 생선요리를 자주 해줬어요. 서울에선 위생 문제로 놀이터 모래도 못 만지게 하지만 제주에선 보말(고둥), 개미, 산딸기 등을 직접 만지며 하나라도 더 경험하게 해주려 노력했죠.”
어려움도 있었다. 제주는 모기가 많아 아이가 특히 고생했고 생필품은 시내에 나가서나 구할 수 있었다. 보통 일주일간 해외로 여름휴가를 갔던 것에 비해 지출은 훨씬 많았지만 그들이 누린 행복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 제주의 드넓은 바다만큼 부부는 아이와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이맘때 아이는 다 그런 거지’ 하는 생각으로 키웠는데 ‘우리 아이는 이렇게 하면 속상해하는구나, 어제는 이거밖에 못 했는데 오늘은 이렇게까지 하네’ 하고 생각하는 순간들이 많았죠. 하루 종일 붙어 있으니 남편과도 싸우는 일이 많을 줄 알았는데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덕에 다툼은 없었어요.”

“개미를 보면 밟아버리는 아이가 있는 반면 서진이는 주저앉아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라고요. 어린아이를 데리고 하는 여행은 힘들지만 개미, 꽃, 바다를 알기 시작하는 이맘때의 아이와 보낸 자연 속에서의 삶은 아이에게도 부모에게도 값진 경험이 됐어요.”
바르셀로나
엄마와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준 여행
스페인 바르셀로나 한 달 살기

숙소는 에어비앤비를 통해 바르셀로나 인근에 1천 유로(약 1백33만원)를 주고 구했다. 남편도 직장에서 5일간 휴가를 얻어 잠깐 동행했다. 가족은 바르셀로나의 강렬한 햇살을 피해 느지막이 나가 유람선을 타거나 동물원, 놀이동산, 박물관에 가서 느긋하게 머물거나 서점에서 그림책을 보면서 천천히 시간을 보냈다. 직장 일과 육아로 바빠서 자신을 돌아볼 겨를조차 없고, 1년에 한 번 가는 휴가마저도 쫓기듯 다녀와야 했던 조씨에겐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생각보다 비용도 많이 들지 않았다. 쇼핑과 외식을 줄일 경우 엄마와 아이가 하루 50유로(약 6만6천원)에 충분히 생활이 가능하다는 게 조씨의 설명.
그녀는 아무리 평범한 일상도 그곳이 스페인이기 때문에 특별하고 새롭게 느껴졌다고 한다. 무엇보다 한 달 살기를 결심하게 한, 엄마와 아이를 존중하는 그 나라의 분위기를 온몸으로 경험했다.
“특별한 하루하루가 모여 알찬 한 달을 만들어가는 느낌이었어요. 일상이 여행이 되고, 여행이 일상이 되는 게 한 달 살기의 매력이죠. 지후가 추로스 가게에 놓인 책을 좋아하는 걸 보고 그냥 가져가라던 직원과 물건을 망가뜨려 사려고 하자 괜찮다던 상인, 아이를 안고 버스를 기다리는 저에게 맨 앞자리를 양보하던 사람들, 레스토랑에서 칭얼대는 아이를 웃으며 바라보던 시선들이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언어 때문에 망설이는 분들도 계신데 절대 걱정하지 마세요. 한 달간 지내기 위해 필요한 말은 많지 않더군요. 다만 여행지를 선정할 때는 그 나라의 국민성을 고려하면 좋을 듯해요. 이는 현지인에게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가와 연결되거든요. 그곳도 사람 사는 데고 이웃이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훨씬 편해진답니다. 짐도 많이 꾸릴 필요 없어요. 부족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면 즐겁게 준비할 수 있어요.”
치앙마이
영어 공부·무에타이·카페 투어까지 즐기는
태국 치앙마이 한 달 살기

그의 마음을 끌어당긴 건 물가가 저렴하고 인터넷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으며 커피가 맛있기로 유명한 태국 치앙마이였다. 그는 인터넷을 통해 찾아낸 숙소를 약 80만원에 예약했다. 어머니까지 세 식구가 지내야 했기에 비교적 고급 주택을 선택했지만 발품을 팔면 40만~50만원 선에서 취사가 가능한 숙소를 구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조언. 총 5백만원의 예산을 가지고 떠난 정씨는 “평소 한국에서 쓰는 생활비와 자녀 학원비를 그곳에서 쓴다고 생각하면 좀 더 편하게 한 달 살기를 시작할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걸 목표로 떠났지만 지루해하는 아이를 위해 매일 아침이나 저녁 시간을 이용해 국어와 수학 등 학교 공부를 함께했다. 영어 공부를 위해 한 달 수강이 가능하다는 바이링구얼 학교를 알아봤지만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진행되는 수강표를 보고 ‘오로지 영어만 목표로 온 건 아닌데’ 하는 생각에 발길을 돌렸다. 대신 정씨는 인터넷을 통해 미리 알아두었던 영어와 무에타이, 피아노를 각각 10회씩 수강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특히 아이가 좋아했던 건 무에타이. 난생처음 해보는 타국의 무술에 아이는 “태권도보다 훨씬 힘들지만 정말 재미있다”며 즐거워했다.

“비가 굉장히 많이 내리는데 현지 안내원이 모두 신발을 벗으라 하더군요. 반짝거리는 사원을 바라보며 맨발로 그곳을 누비던 그날 밤이 한 달 중 가장 기억에 남아요.”
한 달 살기가 끝난 뒤 아이는 모든 일을 스스로 하려고 했다. 엄마와 할머니 역시 아이가 시도하기도 전에 해줬던 것을 멈추고 기다리는 법을 알게 됐다. 벌써부터 정씨는 다른 나라로의 한 달 살기를 또 계획하고 있다.
“승찬이는 한 달 살기 이후 가족을 보호해주려 하고, 다른 사람을 보는 시선도 유연해진 것 같아요. 가족 관계가 더욱 단단해져 세상 어디를 가도 잘 살 수 있단 자신감이 생겼죠. 가능한 한 아이가 어릴 때 어디든 다녀오세요. 저도 요가나 그림, 언어 공부 등 저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다시 한 번 한 달 살기에 도전할 생각이에요.”
한달살기 추천 여행지 4
한 달 살기를 해보기로 결심했다면 그다음 단계는 지역을 선정하는 것. 짧은 여행과 달리 단순한 호기심보다는 기후와 관광 인프라, 물가, 교육 환경 등을 두루 고려해 선택하는 것이 좋다.한 달 살기 트렌드를 이끈 태국 치앙마이

다양한 액티비티를 원한다면 인도네시아 발리

유럽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가성비 높은 곳 체코 프라하

세계 중심 문화를 체험하고 싶다면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달살기 체크리스트
한 달 살기의 핵심은 여행을 마치 현지인처럼 여유롭고 느긋하게 즐기는 것. 낯선 여행지에서 이것이 가능하려면 여행자를 둘러싼 환경이 잘 갖춰져 있어야 한다. 한 달 살기를 마음먹었다면 이것부터 챙겨보자.
한 달 살기 중 가장 큰 비용을 차지하지만 무조건 저렴한 곳을 선택하는 것은 좋지 않다. 장기 렌트의 경우 무허가 업체도 많으므로 이용자 후기 등을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 기간이 긴 만큼 주방이 있는 곳이 좋은데, 온라인으로 검색할 경우 ‘주방’이나 ‘B&B’ ‘아파트’ ‘아파토텔(호텔 스타일의 예약 시스템을 적용하는 아파트)’을 필터에 넣어 검색하면 된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현지인이 직접 운영하는 저렴한 숙소를 찾을 수도 있고, 수수료를 내더라도 한인 중개업체, 한 달 살기 인터넷 카페 등을 통해 보다 검증된 숙소를 구하는 방법도 있다. 여행 초반 호텔을 짧게 예약하고 현지에서 직접 동네를 둘러본 후 장기 숙소를 결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청소 비용·전기료·수도세 등의 내역이 별도로 추후 정산되는지, 장기 숙박에 예치금을 요구하는지 등도 계약서를 통해 꼼꼼히 체크해야 한다. 동남아에 많은 풀 빌라 등은 해충 대비도 신경 써야 한다.
√ 여행 시기를 좌우하는 날씨
한 달 살기 인기 지역이 몰려 있는 동남아는 건기와 우기가 뚜렷하게 나뉘기에 반드시 체크해야 한다. 태국과 베트남, 필리핀 등 인도차이나반도 지역은 11월 중순부터 2~3월까지가 건기에 해당해 여행하기 좋다. 건기라도 태국 북부와 라오스, 미얀마의 경우 2월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5월까지 미세먼지 수치가 높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은 6월부터 10월까지가 건기다. 서유럽은 3~5월이 날씨도 좋고 여행객도 많지 않아 미술관·박물관 등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
√ 아이를 위한 영어 교육 프로그램
한 달 살기를 통한 영어 교육은 유학이나 이민보다 비용이 훨씬 저렴하고 리스크가 낮은 게 장점이다. 특히 동남아 국가에서는 다양한 국제 학교 및 국제 유치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중국인 학생이 많은 지역에서는 중국어 수업도 병행할 수 있다. 특히 최근 한 달 살기가 유행하면서 숙소와 교육 프로그램, 렌터카 등을 패키지로 묶어 내놓은 곳들도 있다. 한국의 에이전시를 통해 정보를 수집한 후 현지에 가 직접 시간표와 학업 분위기 등을 보고 고르는 것도 팁이다. 한국 학생의 비율이나 액티비티 시간, 엄마를 위한 프로그램이 있는지도 따져볼 만하다. 전문가들은 단기 교육인 만큼 실력 향상보다 언어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는 데 주안점을 두라고 조언한다.
√ 예방접종 및 응급 상황 대비
예방접종을 하지 않을 경우 입국 또는 스쿨링 등이 불가능한 나라도 있다. 국가마다 예방접종 종류가 다르니 미리 알아보고 대비하는 것이 필수다. 태국과 발리는 A형 간염·장티푸스·말라리아 등의 예방접종을 권장하며, 체코의 경우 일본뇌염과 홍역 예방접종을 권한다. 예방접종 내역 증명서는 영문으로 받아야 하는데 예방접종도우미 사이트를 통해 발급받을 수 있다. 보통의 여행보다 체류 기간이 길기 때문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여행자보험에 꼭 가입하는 것이 좋으며, 현지 한국 대사관 및 숙소와 가까운 병원·소방서·경찰서 등의 전화번호를 미리 체크하는 것도 필수다.
√ 언어는 생존에 필요한 정도면 OK!
언어는 한 달 살기를 망설이게 하는 큰 요소 중 하나. 하지만 대부분의 체험자들은 “언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숙소와 교육기관 등을 미리 예약하고 간다면 현지에서 그 나라 언어로 깊은 대화를 할 일은 많지 않다. 여행용으로 나온 소책자나 동영상 강연 등으로 생활에 필요한 기초 단어와 표현만 익히고 가도 충분하다.
기획 김명희 기자 사진 셔터스톡 셔터스톡에디토리얼 디자인 최정미
여성동아 2019년 8월 66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