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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수는 어떻게 충무로의 여제가 됐나

기획 · 김명희 기자|글 · 이미지 한경닷컴 스타엔 기자 사진 · 홍중식 기자, CGV아트하우스 제공

입력 2015.06.25 10:15:00

한국 여배우 가운데 가장 독보적인 카리스마와 아우라를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김혜수.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차곡차곡 연기 경력을 쌓아온 그가 30년 내공을 꽉꽉 눌러 담은 영화 ‘차이나타운’으로 돌아왔다.
김혜수는 어떻게 충무로의 여제가 됐나
중학교 시절 우연히 광고 모델로 발탁되면서 연예계에 발을 들인 김혜수(45). 1986년 이황림 감독의 ‘깜보’로 스크린 신고식을 치렀으니, 올해는 그가 배우로 데뷔한 지 꼭 30년이 되는 해다. 그동안 그는 청순한 하이틴 스타에서 글래머러스한 여배우, 또렷한 개성과 스펙트럼을 지닌 배우로 진화를 거듭했다. ‘타짜’ 정 마담은 화투판의 꽃으로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유행어를 탄생시켰으며, ‘도둑들’ 팹시는 섹시한 금고털이 도둑으로 김윤석(마카오 박 역)의 카리스마에도 밀리지 않았고, ‘관상’의 기생 연홍은 비중은 크지 않았지만 극 전체에 팽팽한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관능적인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고수하면서도 소모되지 않는 배우의 길을 걸어온 김혜수가 이번에는 영화 ‘차이나타운’을 통해 차이나타운을 지배하는 조직의 보스 ‘엄마’로 파격적인 변신을 감행했다.

여성 느와르의 탄생

‘차이나타운’은 냉혹한 생존 법칙이 지배하는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살아온 두 여자의 생존 방식을 그린 작품.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지하철 10번 보관함에 버려진 탓에 ‘일영’이란 이름이 붙은 아이(김고은)는 ‘쓸모 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차이나타운에서 ‘엄마’라고 불리는 여자를 만난다. ‘엄마’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는 인물. 엄마와 똑같은 괴물이 돼가던 일영은 순수한 영혼을 지닌 남자 석현(박보검)을 만나면서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고 그런 일영의 변화를 감지한 엄마는 일영에게 위험천만한 마지막 임무를 준다.

‘차이나타운’이 기존의 범죄 영화와 차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여자가 지배하는 조직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김혜수는 처음 시나리오를 받고 수위가 세서 고민하다가 결국 여성이 주체가 되는 느와르 영화라는 점에 끌려 출연을 결심했다고 한다.

“여성이 지배하는 권력 구조가 신선했고, 등장인물들도 기존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캐릭터라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그럼에도 작품이 너무 강해서 출연이 고민되기도 했어요. 요즘 뉴스를 보면 충격적인 게 많지만, 파격적인 스토리를 매일 접하면서 작업하는 게 가능할까 싶었거든요. 정서적으로 파고들면 몰입이 어려울 것 같아서 오직 영화와 캐릭터만 생각하고 따라갔어요.”



김혜수는 어떻게 충무로의 여제가 됐나

차이나타운’ 스틸 사진

특히 김혜수는 ‘엄마’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망가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보형물로 몸집을 키우고, 머리를 흰색으로 염색하고, 분장으로 주근깨를 박은 외적 변화는 실로 놀라웠다. 이는 유럽의 히피부터 러시아 여자 마피아, 노숙자 스타일까지 검토한 제작진과 하루에도 수십 장씩 콘셉트 사진을 보내며 의견을 보탠 김혜수의 노력 끝에 완성된 모습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힘든 과거를 이겨내온 인물이고, 생존 그 자체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인 만큼 여성적인 외모는 고사하고 내부는 더 피폐해진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엄마의 잔혹하고 비정한 삶을 외모로도 느낄 수 있게 얼굴부터 몸짓까지 다양한 모습을 상상하고 고민했죠. 분장을 한 채 어슬렁거리는 듯 느리게 걷고, 다리를 쩍 벌리고 앉는 등 움직이면서 엄마의 동작을 만들어보는 것은 배우로서도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많은 깨달음 안겨준 시간의 힘

김혜수는 어떻게 충무로의 여제가 됐나
일반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엄마는 무조건 내 편인 따뜻한 사람이다. 하지만 ‘차이나타운’의 ‘엄마’는 그런 엄마와는 거리가 멀다. 한마디로 먹이사슬의 맨 꼭대기에서 누군가의 생사를 좌지우지하는 괴물 같은 존재다. 한준희 감독은 시나리오 단계부터 엄마 역에 김혜수 외에 다른 대안은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상식과 다른 ‘엄마’를 표현하는 것은 배우로선 그만큼 힘든 일이었을 터.

“오히려 부담감을 떨쳐내고 나니 홀가분해졌어요. 엄마는 뿌리 없이 이민자로 와서 정착을 했건, 어디서 버려졌건 생존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에요. 생과 사의 경계를 무수히 지나며 절대적인 자리까지 오른, 그런 인물로 설정하고 연기했죠. 분장뿐만 아니라 연기에서도 강렬한 캐릭터지만 현실에도 존재할 것 같은 인물로 보일 수 있도록 신경 썼어요.”

엄마가 일영에게 주문하는, “증명해봐. 네가 아직 쓸모 있다는 증명”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대사이자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내야 하는 요즘 세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말이다. 또한 그가 몸담고 있는 연예계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룰이기도 하다.

“‘차이나타운’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굉장히 극단적이지만 우리 역시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항상 쓸모없게 되는 걸 두려워하면서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하잖아요. 실제로 죽고 죽이는 경쟁은 아니지만 누군가를 밟고 또 누군가에게 밟히면서 살아가는데, 그런 부분은 영화와 일상이 맥락을 같이하는 것 같아요.”

우리가 보기엔 도드라지는 실패나 슬럼프가 없어 보였던 김혜수 역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내야 하는 룰 안에서 힘든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처음엔 시키는 대로 했을 뿐, 배우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몰랐어요. 그냥 특별한 어른들 사이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고, 단순히 학교 안 가고 촬영장에 있는 게 좋은 정도였죠. 어릴 때는 엄마가 매니지먼트를 맡으셨기 때문에 작품의 선택 기준나 질적으로 좋은 연기를 하기엔 여러 한계가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내가 원하는 것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생겼고, 그런 것에서 비롯되는 불편한 감정을 꽤 오랫동안 껴안고 지냈죠. 그러다 어느 시점부터인가 자의식이 생겼는데, 남들보다 늦게 생겨서인지 좀 지독했죠. 자의식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선명하고 명확해지는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처음에 모르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게 참 많아요. 영화 ‘첫사랑’(1993)을 촬영하면서 이명세 감독님께 ‘이 영화 테마는 뭐예요?’라고 물었더니 감독님께서 ‘첫사랑의 열쇠를 통해 열어본 시간의 비밀이야’라고 하셨어요. 그땐 ‘감독님이라서 문학적으로 말하나 봐’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겼는데 해가 지날수록 그 표현이 마음에 와 닿아요. 처음부터 알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오랫동안 천천히 그 뜻을 이해해가는 것 또한 그 나름의 의미가 있어요. 그게 시간의 힘이고 비밀이죠.”

쓸모 있는 배우

김혜수는 어떻게 충무로의 여제가 됐나

관능적인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면서도 소모되지 않는 배우의 길을 걸어온 김혜수.

다시 ‘쓸모론’ 이야기로 돌아가서, 김혜수가 생각하는 ‘쓸모 있는 배우’란 어떤 존재일까. 그는 “쓸모 있다는 기준을 누가 정했고 강요하나 싶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는 암묵적으로 그런 게 정해진 것 같다. 배우 역시 즉각적으로 평가받는 직업이다. 그리고 ‘저 혼자 정말 잘할게요’ 해서도 안 된다. 개인적인 매력이건 흥이건, 스타로서의 파급력이건 뭔가를 해내서 대중과 끊임없이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혜수에겐 자신에게 배우로서의 재능이 있는지 끝없이 돌아보며 고민했던 시간이 있다. 그리고 지금은 정말 좋은 얼굴의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그 길에서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하며 걸어오고 있을 후배들을 만나면 등을 토닥이며 마음을 나누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자극을 준 후배가 있느냐고 묻자 김혜수 입에선 ‘천우희’라는 이름이 나왔다. 천우희는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한공주’에서 강한 인상을 남기며 충무로 샛별로 떠오른 배우다. 김혜수는 지난해 12월 자신이 진행을 맡은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천우희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소감을 말할 때 눈시울을 붉혀 화제가 됐다.

“천우희 씨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한공주’를 인상 깊게 봤기 때문에 내심 천우희 씨가 상을 받기를 바라고 있었어요. 우희 씨가 ‘이렇게 작은 영화에 나온, 이렇게 유명하지 않은 내가, 이렇게 큰 영화제에서 상을 받다니’라고 말할 때는 울컥하더라고요. 왜 그렇게 말하는지 공감이 됐고, 그럼에도 ‘배우는 다 배우야’라고 격려해주고 싶었어요. ‘힘들지만 의심하지 않고 열심히 하겠다’고 말하는 부분은 마치 제게 하는 이야기 같았고, 그런 것들이 정말 양질의 자극이 돼요.”

‘차이나타운’에 함께 출연한 김고은에 대해서도 “인간 김고은은 참 예쁜 사람이다. 김고은은 지금도 되게 좋지만, 앞으로는 더 좋아질 배우다. 같이 촬영하면서 든든했다. 한 배우가 잘 성장하고 완성도가 높아지는 데는 주변의 도움이 중요하다”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한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물론, 주변까지 살필 줄 알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는 게 아닐까.

디자인 · 최진이 기자

여성동아 2015년 6월 6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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