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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1964 모피 디자이너 오영자 50년 Drama

“퓨어리로 딸에게 장인 정신 대물림”

글·김지은 자유기고가 | 사진·지호영 기자, 퓨어리 제공

입력 2015.01.16 09:36:00

모피 디자이너 오영자 대표. 그의 50년 모피 인생 속에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토끼를 안고 좌충우돌하던 20대부터 딸에게 기술과 장인 정신을 물려주기까지, 한국 현대사와
오버랩되는 그의 영화 같은 이야기.
since 1964 모피 디자이너 오영자 50년 Drama
대한민국에서 ‘오영자’ 하면 모피 수선 잘하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냥 뜯어진 곳을 고치고 해진 부분을 메우는 수준이 아니다. 오래전 할머니가 입던 장롱 속 기다란 모피 코트도 그의 손을 거치면 어제 출시된 신상처럼 트렌디해진다. 수백·수천만원을 호가하는 모피 옷을 1백만 원대에 리폼해 새것처럼 번듯하게 입을 수 있으니 모피 옷 가진 사람치고 그의 솜씨를 욕심내지 않을 이가 없다. 그가 처음 모피 디자인과 제작을 배운 일본, 첨단 패션의 도시 홍콩 등에서도 그를 찾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오영자모피의 오영자(73) 대표는 우리나라 최초의 모피 디자이너다. 딸 이유형(39) 실장도 그의 뒤를 이어 모피 브랜드 ‘퓨어리(Fury)’를 이끌고 있다. 퓨어리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패셔너블한 디자인과 섬세한 기술력을 갖춘 브랜드로 인기다.

모피는 워낙 고가이기도 하고, 오래된 것도 디자인만 구식일 뿐 원단 자체가 낡거나 해지는 경우가 별로 없다 보니 두고두고 고쳐 입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국내에는 그만큼 모피를 잘 알고 감각적으로 손을 댈 수 있는 이가 없다 보니 사람들이 자꾸 부탁을 하게 된 것이 그가 모피 리폼으로 유명해진 이유다.

“모피 옷 수선하는 사람과 일반 옷 수선하는 사람의 결정적 차이는 직접 옷을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습니다. 모피옷과 일반 옷의 수선 방법은 아예 다르죠. 모피 옷은 옷 전체를 원피로 분리해 새로 제작해야 하니까요. 모피 옷 한 벌에 들어가는 원단만도 수십 가지에 달하니 각 원단의 특성을 세밀하게 아는 전문가가 아니면 손을 댈 수 없는 것이기도 하고요.”

열정 하나로 모피 염색 기술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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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어리 화보. 평생 모피를 만져온 오영자 대표 곁에서 보고 배운 이유형 실장이 이끄는 퓨어리는 패셔너블한 디자인과 섬세한 기술력을 갖춘 브랜드로 유명하다.

그가 처음 모피 산업에 눈을 뜬 것은 1964년이다. 전북 익산 부농의 딸이던 그는 집안일도 도울 겸, 당시 4H클럽 활동의 일환이던 토끼 기르는 일에 열심이었다. 토끼는 번식력이 좋고 기르기가 쉬워 당시 농촌의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 중 하나였다.

“토끼는 한 번에 7~13마리씩, 1년에 4번 정도 새끼를 낳습니다. 어렵던 시절 꽤 괜찮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부업이었죠. 고기는 식용으로 먹으니 괜찮았는데 가죽은 쓸 데가 마땅찮더라고요. 숄 같은 것이라도 만들어 팔고 싶었지만 기름기가 많고 뻣뻣한 것이 문제였어요. 그래서 이리 농림고를 찾았습니다. 토끼 가죽에서 기름 빼는 법을 가르쳐달라 했죠.”

토끼 가죽을 상품화하는 방법에 골몰해 있던 그가 모피 염색에 눈뜬 것은 그해 5월, ‘한국일보’에 실린 해외 토픽 덕분이었다. 영부인이던 재클린 케네디가 프랑스 드골 대통령으로부터 호피 코트를 선물받은 것이 화제가 돼 그 이후로 호피가 대유행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아! 호랑이 무늬로 염색하면 되겠구나 싶었죠. 다시 이리 농림고를 찾았더니 거기선 그런 걸 할 수 있는 기술이 없다며 이리공대를 가보라더라고요. 그래서 이리공대 화공과를 무작정 찾아갔는데 거기서도 그런 건 해본 적이 없으니 우리나라에서 섬유 염색이 제일 발달한 대구에 가면 뭔가 답이 있지 않겠냐, 하기에 토끼 가죽 수십 개를 들고 당시 제일 큰 섬유 회사였던 제일모직으로 갔습니다. 요즘처럼 인터넷이 있던 시절도 아니니 전화번호부를 뒤져 염색과장을 찾았죠.”

그의 패기와 열정에 감복한 염색과장의 도움으로 날염 기술을 터득, 오 대표는 그 해에 열린 전국특산품 품평회에 전북 대표로 출전해 특상을 받았다.

“당시 출품된 것들 대부분이 부채, 돗자리, 삼베, 명주 같은 전통 공예품이었는데 무언가 산업화할 수 있는 물건이 나왔으니 나라에서도 크게 관심을 가졌죠. 입상작들을 전시했는데 제가 출품한 날염 토끼털을 보고는 관광공사에서 물량을 얼마나 댈 수 있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수출 상품으로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는 얘기였죠.”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집에서 기른 토끼털에 가내수공업으로 날염한 토끼털 몇 장으로는 수출은커녕 내수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물두 살 토끼 아가씨 오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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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찰나 그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일본에서 대일청구권자금으로 현금 대신 공산품과 기계 등을 보내오고 있었는데, 그 일환으로 앙고라토끼의 털을 높은 가격에 되사겠다며 돈 대신 토끼를 한국으로 보낸 것이다. 앙고라는 털을 얻기 위해 토끼를 죽일 필요도 없을뿐더러 두 달에 한 번 5~6cm씩 자라는 털만 잘라 팔아도 고수익이 가능했다.

“당시에 5급 공무원 월급, 쌀 한 가마니가 3천원이었는데 앙고라 털 1kg이 1천8백원에 거래됐으니 어마어마했죠. 물론 앙고라토끼도 한 마리에 3천원이었으니 꽤 비싼 가격이었죠.”

농림부에서는 전라도와 충남 지역을 아우르는 종토장 운영자로 그를 지목했다. 새마을운동이 막 태동할 무렵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스타가 됐다. 신문에서는 그를 ‘토끼 아가씨 오영자’라 치켜세웠고 오 대표는 아버지를 졸라 시골 땅 50마지기를 담보로 농협에서 30만원을 융자받아 앙고라토끼 1백 마리를 분양받았다.

“처음엔 아버지도 엄청 반대를 하셨죠. 가라는 시집은 안 가고 사기나 당하고 왔다며 노발대발하셨어요. 게다가 그즈음 창고에서 염색 작업을 하다 화학약품이 폭발을 일으켜 불이 크게 났었거든요. 마을에서는 ‘영자가 미쳐서 그 집에 큰일이 났다’며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어요.”

그는 아버지와 담판을 짓기 위해 황산 한 병을 앞에 놓고 무릎을 꿇었다. 딸의 고집에 기가 질린 아버지는 마지못해 그와 함께 도지사를 만나러 갔다. 때마침 집무실에 있던 도지사가 그의 방문에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겼다. 덕분에 마음이 누그러진 아버지는 그가 결혼을 하더라도 10원 한 푼 더 주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땅문서를 내줬다.

앙고라토끼 사업은 대박을 쳤다. 개체 수는 날로 늘었고, 그로부터 토끼를 분양받은 사람들도 털을 팔아 꽤나 많은 돈을 벌었다. 2년 만에 농협에서 빌린 돈 30만원을 훌쩍 넘는 수익을 거둔 그는 융자를 모두 갚고 아버지의 땅문서까지 돌려드렸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일본에서 앙고라 제품이 털이 많이 빠진다는 이유로 급작스럽게 수입 중단을 선언했다. 앙고라토끼를 기르던 농가들은 모조리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책임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걸요.”

분양했던 토끼를 다시 돈을 주고 인수한 그는 도지사와 농림부장관을 찾아가 자신을 일본으로 보내달라 했다. 직접 모피 가공법을 배워 피해 농가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이라 여권을 받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백방으로 수소문하던 그는 당시 영부인이던 육영수 여사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의 사정을 전해 들은 육 여사가 여권을 내줄 수 있도록 주선해준 것이다.

대한민국 모피 디자인의 대모로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그를 구한 건 때마침 업무차 농림부에 들른 일본의 모피 회사 스미토모의 직원이었다. 그는 모피 제작 일을 배울 수 있는 회사를 소개해주겠노라며 그를 스미토모의 협력 회사인 후다바퍼로 데려갔다.

“나는 토끼털밖에 몰랐는데 그곳에선 밍크며 폭스 얘길 하더라고요. 신세계였습니다. 그 후다바퍼라는 회사에서 밑바닥 생활을 하며 모피에 대해 배웠어요. 시키는 사람이 없어도 제일 먼저 일어나 청소도 하고 허드렛일도 도왔죠. 3개월을 그렇게 했더니 저더러 한국에 가서 모피 기술을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을 열댓 정도 더 모아 오라더군요. 모피 디자인과 제작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 분야의 전문가가 따로 있으니 각 분야별로 기술을 가르쳐주겠다면서요. 저를 인정해준 거죠.”

1970년 8월,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일가친척과 지인들 중 모피 기술을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모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가 본격적으로 모피 디자이너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1974년부터다. 일본 국왕 결혼 50주년 기념식을 앞두고 당시 패션 리더였던 왕세자비가 입을 모피 옷 제작에 참여한 것이다. 당시 일본 최고의 디자이너였던 모리하나에 밑에서 모피 제작을 성공적으로 해낸 그는 이후 모리하나에가 디자인한 굵직한 작품들의 제작을 책임지며 실력을 쌓아갔다. 그리고 1976년 10월, 서울 명동에 모피 수선 집을 오픈했다. 일부 부유층들이 해외에서 구입한 모피 옷을 수선할 데가 없어 비싼 돈을 들고 도쿄까지 찾아온 것을 보고 한국에서 그 일을 해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모피 수입이 금지돼 있던 시절이라 불법으로 밀수를 하지 않으면 국내에서 모피 제작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겨울엔 한국에서 모피 수선을 하고 여름엔 일본으로 건너가 모피 옷을 만들었다.

since 1964 모피 디자이너 오영자 50년 Drama

이유형 실장은 국내에는 없는 디자인의 모피를 선보이겠다는 각오로 퓨어리를 론칭했다.

“그때가 저 낳고 딱 두 달 만이었대요. 그래서인지 엄마는 제가 아이 낳고 석 달도 안 지났을 때부터 빨리 일하러 나오라 성화를 하셨죠. 사람들이 전부 자신 같다고 생각하나 봐요.”

오 대표가 지금까지의 인생 역정을 풀어내는 동안 듣고 듣고 또 들은 얘기라며 손사래를 치던 이유형 실장이 그제야 자리에 앉으며 하소연을 했다. 그는 이화여대 의류학과 재학 시절부터 매장과 공장을 오가며 바닥부터 일을 배워 퓨어리를 론칭했다.

인생에 공짜 수업은 없다

오영자 대표 못지않게 이 실장의 노력도 눈물겹다. 혹여나 엄마의 후광을 업은 버릇없는 2세 사업가 소리를 들을까봐 일을 배우기 시작한 처음 3년간은 손님 곁에도 가지 않고 허드렛일만 했다.

“청소며 심부름 같은 게 제 몫이었죠. 일을 배우느라 7년 만에야 졸업장을 손에 쥐었어요. 남들은 엄마가 하던 일이니 쉽게 배웠겠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제가 일을 잘못하면 엄마 이름에 먹칠을 하는 거니까, 그게 싫어서 더 열심히 했죠.”

갓난쟁이 때부터 엄마는 원래 일만 하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살던 이 실장이 문득 대를 이어 모피 사업에 뛰어들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자존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화가 났어요. 누가 뭐래도 국내에서 모피에 대해 엄마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어요. 평생을 그 한 길만 걸어오셨던 분이고, 그 누구도 모피에 대해 알지 못할 때 홀로 일본까지 가서 기술을 터득하고 그걸 우리나라에 도입하신 분이죠. 그런데 경쟁 업체에서 오영자모피는 수선이나 하는 곳이라 폄훼를 하더군요. 모피에 대해 제대로 안다면 어지간한 전문가가 아니고서야 수선에 손조차 댈 수 없다는 걸 알 텐데 감히 그런 소리를 하다니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 제대로 보여주자 결심했죠.”

‘Fury’는 모피의 ‘fur’와 ‘영자’의 ‘y’ 혹은 ‘유형’의 ‘y’를 합친 단어이기도 하지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복수의 여신 이름이다. 그만큼 제대로 해 보이겠다 독기를 품었다는 뜻이다. 기본기를 탄탄히 쌓은 그는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볼 수 없던 디자인의 모피 의류들을 선보이겠다는 각오로 퓨어리를 론칭했다. 이유형 실장이 디자인한 옷들은 각종 패션지 화보와 표지의 단골 의상이 됐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한국 모피 시장에 새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성공적인 론칭 이후에도 퓨어리는 무리하게 사세를 확장하는 일이 없고, 여기저기 판매망을 넓히지도 않은 채 여전히 한결같은 모습이다. 가업을 잇기 위해선 패기보다 내실을 다지는 데 집중하는 것이 먼저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한자리에서 수십 년 동안 같은 일을 해왔다는 건 그만큼 제품에 책임을 진다는 뜻이죠. 이탈리아 장인들이 대를 이어 제품 하나하나에 예술혼을 불태우는 것처럼 퓨어리도 그 장인 정신을 가업으로 이어받는 거라 생각합니다. 저희는 지금도 엄마와 제가 직접 모피 원단 경매 시장에서 모피를 구매합니다.”

가업을 잇는다는 건 자존심을 물려받는 것

모피 산업은 생산 단계에서부터 철저한 패밀리 비즈니스를 통해 이뤄진다. 모피 농장 또한 대를 이은 가족 농장이 대부분이며, 가족들은 경매장에 나올 때마다 그들이 가진 가장 깨끗한 옷을 입고 자신들이 공을 들인 상품이 판매되는 걸 경건한 자세로 지켜본다고 한다. 경매는 상시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1년에 몇 번, 정해진 시기에 열린다. 전 세계적으로 그때만 모피 거래를 할 수 있으며, 그 외에는 모두 불법이다. 그래서 모피 구매가 중요하다. 한 해 사업의 흥망을 결정짓는 셈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패션의 역사 한 축을 담당해온 거장과 그 자존심을 대물림받겠다고 나선 야무진 딸의 모습이 더욱 크고 책임감 있게 느껴진 것은 2014년 한 해 가업을 잇는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사라진 것으로 생각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던 탓이다. 가업을 물려받는다는 것은, 부를 물려받고 기술을 익히는 것 이전에 부모의 철학과 자부심을 잇는 일이기 때문이다.

디자인·김석임 기자

여성동아 2015년 1월 6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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