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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브랜드 ETRO의 이충희·오윤경 부부

그림 모으는 남자와 사진 찍는 여자

글·김지은 자유기고가|사진·조영철 기자

입력 2014.11.14 10:37:00

남편은 명품 수입 브랜드 에트로 대표이자 예술품 컬렉터, 아내는 사진작가.
만남 전 두 사람을 설명하는 화려한 수식어에 잠시 거리감이 들었기에 부부의 소박함은 더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이탤리언 명품 브랜드 에트로의 이충희 대표와 사진작가 오윤경 부부를 만났다.
명품 브랜드 ETRO의 이충희·오윤경 부부
우연이 필연이 되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또한 사람의 의지다. 지인 때문에 우연히 사게 된 그림 한 점, 눈앞에 보이는 예쁜 풍경을 간직하고 싶어 집어든 카메라…. 그들의 삶 역시 그냥 무심코 지나칠 만큼 사소한, 아주 작은 우연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됐다. 어지간한 사업가들은 한두 번쯤 겪는다는 사업 실패나 위기조차 맞은 적 없는 행운이 때로는 사람을 더 영글고 꽉 차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에트로 이충희(60) 대표와 오윤경(60) 작가 부부 덕분에 알게 됐다. 각자의 의지가 없었다면, 누구나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평화롭고 호사스러운 삶을 살기에 충분한 조건이었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더 흥미롭다.

에트로, 가난해서 목숨을 걸 것 같아 이 대표 낙점

이 대표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호텔신라에서였다. 12년간 호텔신라 면세점에서 일하던 그는 영업점장 자리를 내려놓고 명품 수입 업체인 유로통상으로 직장을 옮겼다. 그곳에서 명품 수입 유통 구조를 파악한 그는 1993년, 창업을 결심하고 아직까지 한국에 상륙하지 않은 해외 명품 브랜드 중 시장 가능성이 있는 것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당시 해외에서 인지도와 퀄리티가 높은 브랜드 중 한국에 정식 수입되지 않은 것은 에트로, MCM, 프라다 정도였어요. 그런데 알아보니 이미 에트로를 제외한 나머지 두 브랜드는 수입원이 내정된 상태더라고요. 에트로 역시 여러 에이전트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었고요. 그래서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무작정 일본에 있는 에트로 총판을 찾아갔죠.”

총판 사장을 만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에이전트들도 그를 한번 만나기 위해 줄을 섰지만 아쉬울 것 없는 총판 사장이 선뜻 시간을 내어줄 리 만무했다. 이리 뛰고 저리 뛴 끝에 가까스로 약속을 잡고 총판 사장을 처음 만났을 때 뜻밖에도 사장은 이 대표에게 커미션을 얼마를 주면 먹고살 수 있는지 계산해보라고 했다. 긍정적이라는 뜻이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제가 제일 가난해서 선택한 거더군요. 가져간 자본금도 가장 적었거든요. 가난하니까 이거 아니면 죽을 만큼 열심히 할 거라 생각했대요.”

에트로의 입장에서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당시 막 성장 궤도에 진입한 에트로를 위해 그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일해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에트로는 특유의 페이즐리 문양으로 회사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지켜나가고 있는 이탤리언 브랜드다. 창립자 짐모 에트로가 텍스타일 디자이너였던 숙부의 가업을 이어받아 1968년 밀라노에서 원단 사업을 전개한 것이 시작으로, 이후 에트로는 캐시미어와 실크, 리넨, 면 등 최고급 천연 섬유를 전 세계 유명 디자이너들에게 공급하며 명성을 쌓아나갔다.

“페이즐리는 인도 캐시미어 지방의 전통 문양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인도에 거주하던 영국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캐시미어 문양을 전파했는데 그들이 이주한 지역이 바로 스코틀랜드의 항구도시 페이즐리입니다. 그래서 페이즐리 문양이란 말이 생겨난 거고요.”

현재 에트로는 짐모 에트로의 뒤를 이어 첫째 아들 야코보 에트로가 전체 경영을 비롯한 가방과 숄을, 둘째 아들이 남성복을, 셋째 아들이 재무를, 그리고 막내딸이 여성복을 책임지는 이탈리아식 가족 경영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 에트로 가문 사람들은 동양의 철학과 문화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어요. ‘무리하게 팔려고 하면 시장을 망친다, 천천히 가라’는 것이 에트로 본사 사장의 주문인데 패션 업계에선 그러기가 정말 쉽지 않거든요. 경쟁이 치열하니까요. 통상적으로 수입 브랜드들은 계약도 1년 단위로 끊어서 하고, 매출이 좋지 않을 경우 수입 업체에 상당한 압박을 가합니다. 그런데 에트로는 저한테 처음에 3년의 시간을 주었고 잘한다 싶으니까 그 후 5년 계약을 제안하더라고요. 대부분의 브랜드들이 계약 시 제시하는 ‘미니멈 오더’ 같은 것도 없어요. 미니멈 오더라는 건 최소한 얼마 이상은 무조건 팔아야 한다는 조건 같은 건데, 에트로는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팔 수 있는 것만 팔라고 합니다. 정직한 스타일인 거죠.”

에트로는 처음 접했을 땐 특유의 풍부한 색채와 문양 때문에 굉장히 화려해 보이지만 일면 보수적이고 고집스러운 면이 있다. 그래서 오래 사용해도 질리지 않는다. 그런 에트로의 철학은 이 대표의 우직함과도 일맥상통한다.

명품 브랜드 ETRO의 이충희·오윤경 부부

오윤경 씨의 작품 소재는 나무, 바다 등 자연이다. 대자연은 자아를 바라보는 거울이기에 자연을 가까이 하는 시간이 기쁘다고 작가는 말한다.

내겐 너무 재미없는 당신, 이충희

이 대표와 오윤경 작가는 딱 스무 살 때, 경기대학교 캠퍼스 커플로 만났다. 당시 이 대표는 ‘어쩜 저렇게 사람이 한결같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반듯하고 근면 성실했다고 한다. 그땐 그 점이 믿음직스러워 마음을 주었는데 결혼하고서 3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변함없이 성실하기만 한 남편 때문에 오 작가는 가끔은 부아가 치밀고 또 가끔은 서러워 눈물이 났다. 남들 눈엔 철없는 아내의 속 편한 투정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아이들이 자랄수록, 남편의 사업이 잘될수록 오 작가는 덩그러니 혼자가 된 듯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차라리 남편의 사업이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가정에 위기라도 찾아왔으면 하고 바랐던 적도 있어요. 그랬다면 그 일을 계기로 가족끼리 서로 돌아보고 똘똘 뭉칠 수 있었을 텐데 남편은 늘 바빴고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어요.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 제 할 일을 알아서 할 때쯤 되니까 허탈해지더라고요. 왕따가 된 느낌이었거든요. 가정이 뭘까, 행복이 뭘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죠. 아마 결혼을 한 40~50대 여성이라면 대부분 제 이야기에 공감할 거예요.”

이 대표는 회사를 다니면서 석사과정을 마쳤고, 박사과정을 밟으며 강단에 서기 위해 대학 조교로까지 일했다. 사업도 회사를 다니는 도중에 시작한 것이었으니 남편의 등만 바라보고 살아온 아내로선 외로움이 사무쳤을 만도 하다.

“그래서 사진기를 손에서 놓을 수 없었어요. 한동안 건강이 안 좋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괜히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간직해두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카메라를 들었죠. 사진을 찍다 보니 자꾸 욕심이 생기고, 본격적으로 수업도 찾아 듣게 되더라고요. 처음엔 백화점 문화센터 같은 곳이었는데 나중엔 대학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공부해야겠다 싶어 경원대에 입학했죠.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도 다녔고요.”

본격적으로 사진 공부를 시작하고 보니 필요한 게 너무 많았다. 이것저것 장비도 사 모으게 되고, 학우들과 난생처음 출사라는 것도 나가게 됐다. 지금까지 줄곧 그녀의 작품 테마가 돼온 ‘나무’도 첫 출사에서 만난 나무에서 비롯된 것이다.

명품 브랜드 ETRO의 이충희·오윤경 부부
“함께 사진을 배우던 사람들과 동해로 해돋이를 찍으러 가는 길이었는데 대관령 고개를 넘다 ‘나의 나무’를 처음 만났어요. 화려한 솜털 구름 속에 덩그러니 서 있는 그 모습이 참 ‘나 같다’ 싶더라고요. 외롭고 쓸쓸해 보였거든요.”

그리고 그녀는 사진을 통해 상처를 치유해나갔다. 그해 겨울, 그해 여름, 그해 가을…. 계절마다 그녀의 피사체가 돼준 나무들을 모아 전시회도 열었다. 그제야 마음이 탁 놓였다. 사진을 하면서 한 발짝 떨어져 조금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그리고 남편을 바라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홀로 외로이 서 있는 것 같은 나무도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면 숲을 이루고 있더라고요. 저도 마찬가지였던 거죠. 지금껏 남편은 제가 하려는 일에 반대하거나 안 된다고 한 적이 없었어요. 사진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알고 보면 모두 남편 덕분이에요. 먼 길 출사를 떠날 때면 새벽잠 설치며 저보다 먼저 일어나 깨워주기도 하고, 어쩌다 지각을 하는 날엔 직접 운전해 데려다주기도 했어요. 사진을 찍느라 집안일에 좀 소홀해도 잔소리 한번 한 적 없었죠. 남편이 나를 정말 믿어주고 응원해주고 있구나, 알게 되면서 제 마음의 병도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베푸는 것 또한 인복

이 대표의 또 다른 직함은 백운갤러리 관장이다. 남편이 갤러리 관장이니 사진작가인 아내가 그 덕도 좀 보았겠다 싶었는데 일은 일, 개인사는 개인사인지라 아무리 부부라 해도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도를 넘는 도움이나 특혜를 주고받지는 않는다고 한다.

“저희 갤러리는 사진이 아닌 그림을 전시하는 공간이에요. 아내가 사진을 찍으니 사진 전시회도 열겠거니 하고 전시를 의뢰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는데 그때마다 사진 하는 제 아내의 작품도 걸지 않는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는 매년 ‘에트로 미술 대상’을 개최해 젊은 신진 작가들을 발굴하고 후원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최근엔 제7회 올해의 여성문화인상 여성문화예술인 후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지금에야 갤러리는 물론 그의 사무실에까지 다 걸지도 못할 정도로 그림이 넘쳐나는 미술 애호가지만 불과 15년 전만 해도 그는 문외한이라 할 만큼 그림에 관심이 없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인사동을 다니며 아버지가 취미로 동전 같은 골동품을 모으는 걸 구경했던 게 예술품과의 인연 전부였다. 그런 그에게 2001년, 우연히 그림 몇 점이 쥐어졌다. 지인의 부탁으로 얼떨결에 그림 몇 점을 구매한 그는 그것을 누가, 언제 그린 것이며 그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 인사동을 찾았다고 한다.

자신이 구입한 정체 모를 그림을 들고 인사동에 즐비한 갤러리들을 돌면서 그는 전시회를 열고서도 단 한 점의 그림도 팔지 못하는 젊은 작가들이 숱하게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그는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하나 둘 구입하기 시작했다. 재능과 열정을 가진 젊은이들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취미처럼 시작한 일이 점점 규모가 커지면서 급기야는 청담동에 갤러리까지 오픈하고, 후원 사업에까지 뛰어들게 됐다. 갤러리의 이름은 아버지의 호 ‘백운’에서 따온 것이다.

그가 후원하는 것은 젊은 예술가들만이 아니다. 몇 해 전 수많은 해외 명품 브랜드들이 국내에서 높은 이윤을 창출하고 있음에도 사회 환원에는 인색하다는 기사가 났지만 에트로는 예외였다. 1991년, 교직에 몸담았던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3억3천여만원의 장학 기금을 바탕으로 설립한 백운장학회는 매년 그 규모가 늘어나 올해는 50억원에 달하는 장학 기금을 조성했다. 이 대표는 사업 초기 어렵던 시절 매달 3만원씩 내던 개인 기부금을 이제 월 4백만원으로까지 늘렸다. 이 대표뿐만 아니라 에트로는 전 사원이 사우회를 통해 월 5천원씩의 기부금을 낼 정도로 자연스럽게 사내 기부문화가 정착돼 있다. 이 대표가 이처럼 기부를 생활화한 데는 아내 오 작가의 영향이 컸다.

“1990년대 초반, 아내가 걸스카우트 활동을 하던 딸아이의 학교 학부형들과 함께 암사재활원에 봉사활동을 다녔어요. 그때 저한테도 재활원 후원 활동을 한다며 3만원을 내놓으라더라고요. 솔직히 그땐 속으로 욱하는 마음도 들었죠. 사업을 막 시작했을 때라 한 푼이 아쉽기도 했고, 심적으로 여유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때 아내를 따라 재활원에 가보니 환경이 너무 열악하더라고요. 물론 지금은 그곳도 많이 좋아졌지만 당시엔 시설뿐만 아니라 먹는 것도 부실하더군요. 그런데 제가 몸으로 하는 걸 잘 못해서 멀뚱거리고 있으니까 아내가 ‘몸으로 하는 건 내가 할 테니 당신은 돈을 보내라’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꾸준히, 제 수입이 늘어난 만큼 후원금도 늘렸습니다.”

아내의 입장에서 남에게 늘 베푸는 남편과 함께 사는 것이 불편하고 속상할 수도 있을 법한데 오 작가는 그것이 남편의 가장 큰 장점이고, 그래서 지금껏 부부로서 한 치의 오해나 불신 없이 믿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리라 생각한다니 이만한 찰떡궁합도 없다 싶다.

여성동아 2014년 11월 6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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