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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우리는 정말 조인성에 관해 다 알고 있는 걸까

EDITOR 조윤

2018. 10. 01

비주얼 천재 조인성의 매력은 갑옷으로도 가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섹시한 고구려 장군’이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해냈다는 표현이 맞겠다.

‘우리는 물러서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영화 포스터 한가운데 호기롭게 새겨진 이 말은 극 중 양만춘의 것이기도 하지만 그를 연기한 배우 조인성(37)의 것이기도 하다. 3류 조폭 조직의 2인자를 연기한 영화 ‘비열한 거리’(2006)나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검사로 변한 ‘더 킹’(2017)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대중은 그를 부드럽고 환한 미소의 예의 바른 청년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더욱, 물러설 곳이 없다. 

9월 19일 개봉된 영화 ‘안시성’은 고작 5천 명 병력으로 20만 당나라 대군에 맞서 고구려 안시성을 지켜낸 양만춘 장군의 이야기다. 동아시아 전쟁사에서 가장 극적인 승리로 전해지는 88일간의 안시성싸움. 여기에 단 세 줄밖에 남아 있지 않은 양만춘의 기록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김광식 감독은 ‘젊은 배우들이 만드는 섹시한 사극’을 완성하고자 했고, 조인성은 자유분방하면서도 자애로운 양만춘을 창조해내 감독의 목표에 부응했다.

‘자상하고 부드러운 장군’이라는 전에 없던 캐릭터를 만들어냈어요. 스스로 “괴로움이 없는 자유로운 리더를 상상하며 연기했다”고 했고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나요. 

기존의 장군 이미지가 있고, 그런 이미지를 표현한 배우들이 있으니 그걸 제가 뛰어넘을 수 없죠. 그래서 저만의 장군 캐릭터를 고민했어요. 양만춘은 고구려의 실권자였던 연개소문에게 반역자로 찍힌 인물이에요. 집권 세력 안에 있으면 야망이 있을 텐데 밖에 있으니 그런 게 없어요. 욕심이 없어서 오는 자유로움이 있지 않나요? 양만춘은 자기 성만 잘 지키면 되는 거예요. 괴로움 없는 자유로운 사람이란 캐릭터는 그렇게 생각해냈어요. 

캐스팅이 발표됐을 때 양만춘 역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가도 많았어요. 

기존의 장군 이미지에 넣어보면 그럴 수 있죠. 하지만 그건 우리가 역사극에 자주 나오는 리더 이미지에 세뇌당한 걸 수 있어요. 실제로 안중근 의사가 자결한 게 서른한 살 때예요. 독립운동가들의 나이는 열여덟에서 스물다섯 사이가 가장 많았다고 하고요. 그들은 스스로 내가 대장이다, 장군이다 말했대요. 그런 사실을 바탕으로 제작진이 대중의 인식을 바꿔보려고 했던 거예요. 저도 거기에 동의했기 때문에 출연한 거고요. 실은 출연을 두 번 거절했어요. 저 역시 편견이 있었던 거죠. ‘그걸 깨서 나한테 얻어지는 게 뭔데?’ 생각했죠. 근데 ‘비열한 거리’ 때도 조폭 같이 생기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도 (대한민국 영화대상) 남우주연상 받았잖아요. 차 떼고 포 떼면 아무것도 못 하겠더라고요. 언제까지 백마 탄 왕자님 역할만 할 수 없잖아요. 출판사 재벌 2세 하고 그다음에는 IT 기업 재벌 2세 하고, 또 그다음에는 반도체 회사 재벌 2세 하고 그래야 되는 건가요? 



양만춘과 본인이 겹치는 부분이 있나요. 

제가 구현한 양만춘은 저와 모든 게 닮았어요. 사료가 완벽하게 남아 있는 위인이었다면 거기에 저를 포개 넣어야 했겠지만 그게 아니었기 때문에 제가 생각한 양만춘을 만들어낸 거죠. (배)성우 형과 저와의 관계, (남)주혁이와 저의 관계, (오)대환 형과 나의 관계 이런 걸 종합해서 작품 안에 넣은 거예요. 양만춘도 연개소문한테 반항했는데, 양만춘의 호위무사 추수지(배성우)라고 양만춘에게 왜 안 그랬겠어요. 추수지가 양만춘보다 나이도 더 많은데. 그래도 뭔가 믿을 구석이 있고 따라야 할 만한 점이 있으니 양만춘에게 충성했겠죠. 양만춘이 싸움을 더 잘해서? 세상을 보는 지혜가 더 있어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그게 뭘까 상상했죠. 

갑옷이 정말 잘 어울리던데요. 

저도 세간의 평가가 불안하니까 스스로 합리화해야 할 때가 있어요. 난 괜찮다, 잘 어울린다고요. 과장이겠지만 ‘삼국지’의 촉나라 장수 관우가 9척(약 270cm) 장군이라는데 그에 버금가는 영토를 호령했던 고구려의 양만춘이 6척(약 180cm) 정도 되면 괜찮은 거 아니에요? 그렇게 우겨볼 수 있죠(웃음).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면서 1백 권이 넘는 서적을 참고했다고 하더군요. 주연 배우로서 역사 공부도 많이 했을 듯해요. 

배우가 역사에 대해 잘 알면 좋고 몰라도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역사를 잘 알면 제 연기에 대한 변(辨)은 할 수 있죠. 직접 찾아보기도 하고 감독님과 이야기하기도 했어요. 영화 촬영이 끝나고 난 뒤에는 역사에 대해 더 알고 싶어져 중국에 있는 유적지도 찾아갔죠. 

영화를 보기 전후로 양만춘에 대해 검색해보게 되더군요. 모든 관객이 그럴 듯해요. 

주변에서 “양만춘이 누구야?”라는 말을 1백 번은 들은 것 같아요. 이렇게들 모르시나 싶었죠. 역사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저도 국사책에서 그 이름을 본 기억이 있거든요. 영화 ‘안시성’의 가제가 ‘The Unsung Hero(칭송받지 못한 영웅)’였어요. 영화를 보고 관객들이 한 번이라도 고구려 역사를 찾아본다면 영화가 할 일을 다한 거죠. 고구려 역사를 다룬 영화가 많지 않아요. ‘안시성’이 완벽한 영화는 아니지만 고구려를 다룬 영화의 시작점은 될 수 있다고 봐요. 이 영화를 계기로 그런 영화가 많이 나오면 얼마나 좋아요. 영화를 찍고 나니까 이런 생각들이 들더라고요. 

사료가 부족한 고구려 역사를 다루는 점, 기존 사극에 비해 주연 배우들의 평균 연령이 크게 낮아진 점 때문에 거부감을 느끼는 관객도 없지 않아요. 


좋은 평, 부족했다는 평을 동시에 다 받고 있어요. 전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큰 산 하나는 넘은 것 같아요. 영화를 혹평하시는 건 저 때문일 수도 있어요. 낯선 캐릭터에 대한 불편함이죠. 새롭다는 건 좋을 수 있지만 거부감을 줄 수도 있어요. 양만춘을 ‘장군’이 아니라 ‘성주’라고 부르는 건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내기 위한 거였어요. 감독님과 초반부터 그렇게 콘셉트를 잡았고 그대로 나가야만 했어요. 콘셉트가 흔들리면 이도 저도 안 되거든요. 제가 양만춘 역에 캐스팅된 건 기존과 다른 사극을 보여주겠다는 감독의 의지가 반영된 거예요. 극 중 인물들이 현대적인 말투를 쓰는 것도 모든 배우가 합의해서 정한 거고요. 

김광식 감독에 대한 우려도 있었어요. “‘내 깡패 같은 애인’(2010)을 만든 감독이 ‘안시성’을 만든다고?”와 같은.
 
맞는 말이에요. 액션 영화는 특히 경험이 중요하니까요. 전쟁 영화에서는 남성성이 강조되지만 섬세함도 필요한데요. 감독님은 누구보다 이야기를 참 많이 들어주셨어요. 그러니까 프로젝트가 진행된 거예요. 감독이든 배우든 자기 고집이 너무 세면 본인이 틀렸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거든요. 영화는 끊임없이 서로 공부해야 하는 작업인데, 감독님이 굉장히 오픈 마인드예요. 실제로 영화 시작 전부터 캐릭터를 어떻게 구현할 건지 배우들과 함께 이야기했을 정도죠. 감독님이 어느 날 제게 “만화 ‘슬램덩크’의 강백호 같은 모습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양만춘 역할에 확신이 들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어? 감독님이 사람 볼 줄 아시네’ 생각했죠(웃음). 

극 중 안시성과 공성탑, 투석기 등 영화 세트와 무기들이 실제 사이즈와 비슷하게 제작됐다고 들었어요. 


어마어마했죠. 성은 실제 크기보다는 작게 지어졌고 컴퓨터 그래픽(CG)으로 처리했어요. 다른 전쟁 무기들은 비슷한 크기로 제작된 게 많아요. 다른 영화 팀에서 강원도 고성 촬영지를 와서 보고는 “오우, 대작이긴 대작이네” 하더라고요. 처음엔 저도 그 스케일에 압도당했죠.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는 저희들이 압도해나갔죠. 

스카이워커, 로봇암 등 최첨단 장비도 대거 활용됐다고 들었어요. 배우로서도 새로운 경험이었겠어요. 

신기술은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새로운 기술과 만난다는 건 연기의 합이 달라지는 거예요. 로봇은 오차가 없어요. 기계니까. 오차는 저한테 있는 거예요. 배우들은 카메라 워킹에 맞춰서 연기를 하는데요. 그때 저는 한 발짝 앞, 한 발짝 뒤로도 갈 수 있어요. 하지만 로봇이랑 합을 맞출 때는 반 발짝만 넘어가도 제가 틀린 거예요. 그런 점 때문에 정확성을 기해야 했죠. 

사극 액션이 어렵진 않았나요. 

액션은 크게 어렵지 않았어요. 다만 활을 많이 쏘다 보면 손이 떨리더라고요. 주혁이랑 같이 활을 쏘는데 둘 다 손을 떨고 있더라고요. 주혁이가 안 떨면 제가 떨고, 제가 안 떨면 주혁이가 떨고. 한 명이라도 떨면 다시 찍어야 하는데, 둘이 번갈아가면서 계속 떨었어요(웃음). 

2백억원이 투자된 영화의 원톱 주인공. 거기서 오는 부담감도 있을 것 같은데요. 


‘안시성’보다 힘든 영화가 제게 안 오면 좋겠어요(웃음). 이렇게 한 인물에 포커스를 두고 2백억원을 투자한 대작이 또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을까요? 대단히 위험한 작업이에요. 아이돌 멤버가 여럿이면 그중에 내가 좋아할 만한 가수가 있을 확률이 높아지잖아요. 영화도 똑같아요. 인물의 다양성이 있어야 하는데, 한 인물에만 초점이 맞춰진 영화를 이만한 제작비를 들여 만들기는 쉽지 않죠. 이런 작품을 또 만나는 건 더더욱 어려울 거고요.

데뷔한 지 벌써 20년이 됐어요. 배우로서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아보면 어때요. 

제가 가진 부와 인기를 생각하면 다시 태어나도 지금보다 잘 살 가능성은 없을 것 같아요. 부모님도 잘 계시고 밥 세 끼 굶지 않지, 집 있지 뭐가 걱정이에요. 사실 부나 인기, 명예 같은 건 행복과는 상관없는 것들이에요. 꼭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올라가는 중에 쉬어도 되고, 그냥 다시 내려가도 되는 거죠. 저는 항상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어요. 제가 (송)강호 형처럼 되지 못할 수도 있어요. 꼭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주혁이 입장에선 제가 많이 올라간 거겠죠. 주혁이는 이미 절 넘었다고 생각하려나(웃음)? 

어떤 순간에 욕심을 버리게 됐나요. 

언젠가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어요.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살 순 없을까 고민했죠. (차)태현이 형, (고)현정이 누나와도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두 사람은 제가 잘되길 진심으로 응원하세요. 현정이 누나는 촬영장에 밥차도 보내줬죠. 영화 엔딩 크레디트 스페셜 생스 투에 누나 이름이 나오는 건 그 때문이에요(웃음). 두 선배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음을 비우는 법을 배운 것 같아요. 

성주 양만춘을 연기한 배우로서 지키고 싶은 성(城)이 있나요. 

이전 인터뷰할 때 “언제 배우로서 존재감을 드러내세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배우가 현장을 잘 지키면 되지 뭐가 더 있냐는 생각이에요. 현장에서 연기를 잘해내고 직분에 맞게 행동하면 그뿐인 것 같아요. 배우는 그때 존재감이 드러나는 거겠죠. 

배우로서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은 게 있나요. 

아직은 없어요. 지금이 좋아요.

기획 이혜민 기자 디자인 김영화
사진제공 아이오케이컴퍼니 호호호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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