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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고승덕·캔디고 그리고 철강왕 박태준 가족사

글·김명희 기자 |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14. 07. 16

서울시교육감 선거 직전 고승덕 변호사의 딸 캔디고 씨가 페이스북에 고 변호사를 비판하는 글을 올린 것을 계기로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가족사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캔디고 씨의 어머니 박유아 씨는 박 회장의 1남 4녀 중 둘째다. 캔디고 씨는 외할아버지의 격려가 아버지의 부재를 극복하는 힘이 됐다고 말했다.

고승덕·캔디고 그리고 철강왕 박태준 가족사

박유아 씨의 작품 ‘Mr. &Mrs. Koh 1’. 과거 자신의 사진을 그림으로 옮긴 이 작품에 대해 그는 “부부란 남자와 여자의 단순한 결합이 아니라 두 사람이 이루는 관계의 총체라는 의미에서 남녀의 얼굴을 지웠다”고 설명했다.

6월 4일 치러진 서울시교육감 선거는 보수 대 진보라는 전통적인 선거 프레임 외에, 후보 자녀들이 아버지를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이슈가 됐다. 당시 조희연 후보(현 서울시교육감)의 둘째 아들 조성훈 씨는 5월 29일 포털 사이트 다음 아고라에 올린 글을 통해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낮은 인지도로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조차 없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호소했다. 반면 고승덕 후보의 딸 캔디고(Candy Koh·27) 씨는 5월 3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영문으로 쓴 ‘서울 시민들에게’(To the Citizens of Seoul)’라는 제목의 글에서 “고(고승덕 후보)가 교육감 후보가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양심에 비추어 침묵할 수가 없었다. 서울 시민들은 자신들의 교육 시스템을 책임지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 그는 자녀 교육을 책임진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고승덕 변호사는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둘째 딸인 박유아 씨와 1984년 결혼해 1남 1녀를 낳았으나 2002년 이혼했다. 이들의 맏딸인 캔디고 씨는 “어머니가 나와 동생을 뉴욕의 학교에 보내려고 미국으로 데려온 뒤 고는 한국에 남았고, 아예 우리와 연락을 끊었다. 나는 열한 살 때부터 아버지 없는 삶에 적응해야 했다”며 고승덕 변호사가 사실상 가족을 방치했음을 시사했다. 아울러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대학을 나올 수 있었고, 반에서 최고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공무원에 지원하기 위해 가을에 로스쿨에 갈 계획이다. 엄마와, 돌아가실 때까지 내 삶 전체의 정신적 아버지 역할을 해준 외할아버지 없이는 이런 일을 해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적었다.

고승덕·캔디고 그리고 철강왕 박태준 가족사

1 캔디고 씨는 외할아버지 고 박태준 회장의 격려 덕분에 아버지의 부재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2 딸의 페이스북 사건이 불거지자 고승덕 당시 후보가 유세 중 “딸아 미안하다”라며 절규하고 있다.

박태준 회장 세상 뜬 후 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묘소 찾아간 아내

캔디고 씨의 페이스북 사건이 있기 전까지 지지율 1위를 달리던 고승덕 변호사는 “이혼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많은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나 또한 재력과 권력을 가진 집안의 딸에게 자식의 양육권을 빼앗긴 아버지로서 많은 슬픔을 겪어야 했다”고 해명했으나 결국 선거에서 고배를 마셨다. 이 일로 2011년 별세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집안이 다시금 조명을 받았다. 고 박 회장은 아내 장옥자 씨와의 사이에 1남 4녀를 뒀다. 첫째 박진아 씨는 윤영각 파인스트리트그룹 대표이사의 아내, 둘째이자 캔디고 씨의 어머니인 유아 씨는 미국에서 미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셋째 근아 씨의 남편은 김형수 전 한국맥도날드 대표, 넷째 경아 씨의 남편은 김병주 MBK파트너스 회장이다. 외아들인 성빈 씨는 사운드파이프코리아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다.

고 박 회장과 장옥자 여사는 1954년 선을 보고 나서 한 달 만에 결혼했다. 박 회장은 결혼 후 자신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칠 각오로 살고 있으니 집안일은 당신이 알아서 처리하라고 당부했고, 장 여사는 그런 남편을 평생 헌신적으로 내조했다. 박 회장은 2001년 폐 수술 당시 적출된 종양에서 모래 성분인 규소가 발견됐을 정도로 몸을 아끼지 않고 일에 매달렸다. 포스코가 세워진 포항 영일만은 원래 모래밭이었다. 포스코 재직 시절에는 박 회장은 포항에, 가족은 서울에 살면서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았지만 함께 있을 때는 딸들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자상한 가장이었다. 2012년 박유아 씨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아버지를 무섭다고 느끼는데, 굉장히 부드러운 분이었다. 눈물도 많고 정도 많고. 아이들도 좋아하셨다”고 밝힌 바 있다. 장옥자 여사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현충원에 있는 묘소를 찾아 그곳에서 몇 시간씩을 보냈다.

교육감 선거 이후 박유아 씨는 딸의 글이 고 변호사의 낙선에 영향을 미친 게 아니냐는 한 언론의 질문에 “딸이 상처를 입을까 염려해 물었는데, ‘글을 올린 목적이 일종의 양심선언으로, 낙선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관없다. 글을 올린 후 양심의 가책을 덜어냈다’고 했다”며 “우리 가족은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선거 결과가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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