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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Life in Hokkaido

맥주 향 맡으며 삿포로를 걷다

글&사진·황경성 나요로시립대학 교수

입력 2014.01.03 11:08:00

일본인들조차 잘 모르는 홋카이도의 명물이 있다. 바로 맥주.
19세기 중반 메이지 정부가 홋카이도 땅을 본격적으로 개척하면서 ‘개척사’라는 관할청이 설치되고 맥주의 역사도 시작됐다.
이번 여행의 테마는 삿포로와 맥주다.
맥주 향 맡으며 삿포로를 걷다

1 삿포로 역사와 바로 이어지는 JR타워 전경.

일본 국토 전체의 4분의 1에 해당되는 광활한 면적임에도 인구는 550만 명에 불과한 홋카이도. 메이지 2년(1869)에 개척사(開拓使)라는 관할청을 설치하면서 도시 건설이 본격적으로 진행돼 현재의 바둑판 모양의 도시 형태가 이루어진 곳이 바로 삿포로다. 홋카이도의 도청 소재지인 삿포로는 홋카이도 전체 인구의 40%에 가까운 약 200만 명이 모여 사는 일본 5대 도시 중 하나다. 홋카이도의 정치·문화·경제의 중심지이자 홋카이도 개척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한편, 홋카이도는 낙농 왕국답게 다양한 유제품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지만, 의외로 일본인조차도 잘 모르는 게 하나 있다. 바로 맥주다. 그래서 이번 여행의 주 목적지를 삿포로맥주박물관으로 정했다.

요즘 내가 살고 있는 나요로에는 수북이 쌓인 선로 위의 눈을 치우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제설 기차가 지나다닐 만큼 많은 눈이 내렸다. 오랜만에 기차를 타고 남쪽 삿포로를 향해 달리는 동안 차창을 통해 시야에 들어오는 산과 들은 온통 순백색이었다. 그러나 삿포로에 가까워질수록 눈이 듬성듬성 쌓인 곳이 보이기 시작했다. 홋카이도 하면 겨울에는 설국 또는 동토만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겠지만, 워낙 광활한 땅이어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생각보다 눈이 많이 내리지 않고 사과 재배가 가능한 곳도 있을 만큼 지역에 따라 기후 차가 심하다.

JR타워에서 삿포로 관광이 시작된다

맥주 향 맡으며 삿포로를 걷다

2 삿포로의 명물인 맥주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삿포로맥주박물관.

대도시이면서 국제적인 관광도시이기도 한 삿포로에는 현대적 감각의 백화점과 상점들이 즐비해 자연을 즐기러 왔던 관광객들이 쇼핑의 즐거움이라는 또 하나의 보너스를 누리곤 한다. 특히 고급 상점들이 삿포로 역을 중심으로 집중돼 있어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쇼핑을 즐길 수 있는 것이 큰 장점. JR타워로 불리는 삿포로 역사 건물은 세 곳의 대단위 쇼핑센터·백화점과 바로 연결되며, 시네마콤플렉스·오피스·호텔 등이 모여 있어 그야말로 모든 기능을 갖춘 대규모 복합상업시설이다. 전국적으로 이런 다양한 기능의 복합상업시설을 갖춘 역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가끔 찾아가는 삿포로지만 나 역시 이곳의 편리함과 다양한 구경거리에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다.

이날도 삿포로 역에 도착해 숙소에 여장을 풀자마자 JR타워로 갔다. 자주 가는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번 여행을 위해 주어진 시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시간표를 짰다. 이어 지인과 저녁식사를 하며 최근 유학생들의 동향에 대해 듣고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때 아닌 폭우가 내렸다. 홋카이도 생활 10년 만에 이 겨울에 장맛비 같은 폭우는 처음 경험했다. 이 비도 밤새 눈으로 바뀌겠지만.



다음 날 아침 눈을 뜨고 커튼을 젖히자 역시 간밤의 비는 어느새 하얀 눈으로 창문에 부딪치고 있었다. 그래도 지난밤 내린 비로 눈이 거의 녹아 걷기는 오히려 편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제일 먼저 역사 1층에 자리 잡은 관광안내소로 찾아갔다. 홋카이도 관광안내소와 삿포로 시 관광안내소가 따로따로 자리 잡고 있는 꽤 넓은 공간인데도 각종 관광안내 책자가 꽂혀 있는 입식 서가가 일렬로 늘어서 비좁아 보일 정도였다.

삿포로에 새로운 관광 정보가 있을까 해서 시 관광안내소 쪽으로 다가가자 주부인 듯한 두 사람의 자원봉사자가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마치 자신의 가게에서 손님을 끄는 주인처럼 적극적으로 삿포로 관광을 소개한 이는 이곳에서 10년간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사토 지요코(佐藤千世子) 씨였다. 사토 씨는 자신 같은 자원봉사자가 200명 넘게 활동하고 있다는 설명과 함께 개인적으로 삿포로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고 스키 점프의 스릴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설비가 갖춰져 있는 오쿠라야마(大倉山) 전망대를 좋아한다고 추천해주었다. 그 밖에 시내 주요 관광지를 소개한 책자를 이것저것 챙겨주기도 했다. 사진을 한 장 찍자고 요청했더니 수줍어하면서도 나중에 이 내용이 실린 잡지를 보여달라며 포즈를 취했다. 사토 씨의 밝은 표정에서 외지 관광객에게 삿포로를 알린다는 보람과 애향심이 듬뿍 배어나와 여행의 시작부터 즐거워졌다.

사토 씨의 조언대로 시내 구경부터 하기로 했다. 먼저 역 앞에서 지하철과 버스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1일권을 구입한 뒤 이번 여행의 주 목적지인 삿포로맥주박물관을 향해 버스에 올라탔다.

맥주 향 맡으며 삿포로를 걷다

3 삿포로 역사 내에 있는 관광안내소. 홋카이도와 삿포로 시 관광안내소가 별도로 운영되고 있다. 4 삿포로맥주박물관의 전시물에 대해 설명하는 안내원. 삿포로가 맥주 생산지가 된 연원과 함께 홋카이도의 역사를 배울 수 있다.



맥주 향 맡으며 삿포로를 걷다

1 삿포로 블랙 라벨 맥주. 2 삿포로맥주박물관에 전시된 삿포로맥주 포스터.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달리자 삿포로맥주박물관이 있는 ‘삿포로맥주원(札幌ビ-ル園)’ 입구가 나타났다. 버스에서 내려 부지 안으로 들어서자 평일 낮 시간임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 고풍스러운 빨간 벽돌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삿포로맥주박물관 건물은 원래 1890년 제당 회사 공장으로 지어진 것으로 구 홋카이도 도청과 함께 메이지 시대 모습이 남아 있는, 많지 않은 문화유산 중 하나다. 현재 ‘홋카이도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빨간 벽돌 건물을 중심으로 원내를 가볍게 돌아본 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일반 시민에게 맥주에 대한 지식을 알리기 위해 2004년 개장한 이곳은 일본 내 유일한 맥주박물관이다. 사실 맥주에 관한 지식보다도 홋카이도의 개척 역사와 함께 일본 맥주의 역사를 동시에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공간이기도 하다. 3개 층으로 이루어진 박물관에 들어서자 안내원이 친절하게 맞이하며 잠시 후 무료 가이드가 있을 것이라 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가이드의 설명은 매우 흥미로웠다.

도쿄로 갈 뻔한 홋카이도 맥주 양조장

홋카이도 근현대사에서 ‘개척사(開拓使)’라는 명칭의 관청이 자주 등장한다. 러시아의 남하로 위기감을 느낀 일본이 홋카이도 개척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세운 관청으로, 에도 시대가 막을 내리고 메이지 시대가 시작된 이듬해인 1869년 설치돼 1882년 2월 폐지될 때까지 홋카이도의 개척을 주도했다. 당시 개척사는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많은 외국인을 고용했는데. 그 가운데 토머스 안티셀이라는 사람이 홋카이도 이와나이(岩內)에서 우연히 야생 호프를 발견한 것이 홋카이도 맥주의 출발점이 됐다. 호프는 맥주의 맛과 신선도를 높이고 특유의 향과 상쾌한 쓴맛을 내주는 중요한 재료로, 오늘날 맥줏집을 호프집이라 부를 만큼 맥주와 호프는 불가분의 관계다.

홋카이도가 호프 재배의 최적지임을 알게 된 안티셀은 장차 일본에서도 맥주 산업이 번창할 것이라 예견하고 호프 재배를 권장했다. 또 외래종 호프를 심으면 수확량이 많아서 일본뿐 아니라 해외 수출까지 가능하니 사업적으로 매우 유망하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홋카이도에서 맥주를 생산하는 일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개척사 간부들이 홋카이도가 아닌, 도쿄에 있는 개척사 농업시험장에 양조장을 세워 맥주를 생산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개척사의 무라하시 히사나리(村橋久成) 과장은 이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다. 맥주 양조에 반드시 얼음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어 반드시 홋카이도에 맥주 양조장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 주장이 구로다 기요타카(墨田淸隆) 개척 장관의 마음을 움직였다. 결국 1876년 2월 도쿄에서 착공을 목전에 둔 양조장 건설지가 극적으로 홋카이도로 바뀌었다.

맥주 향 맡으며 삿포로를 걷다

1 삿포로팩토리는 개척사맥주 양조장이 있던 자리 위에 세워진 대형 복합상업시설이다.

맥주 향 맡으며 삿포로를 걷다

2 삿포로 기차역에서부터 도심까지 곧바로 연결해주는 지하 통로 ‘치카호’의 내부. 3 카페 닛싱의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제설 기차를 바라본다.

같은 해 개척사는 독일의 베를린맥주양조회사에서 2년 넘게 공부하고 돌아온 나카가와 세이베이(中川淸兵衛)를 주임 기사로 임명했다. 그가 바로 일본인 최초의 맥주 양조인이다. 나카가와 주임과 무라하시 과장은 힘을 모아 맥주 양조장 설계에서부터 기계 및 원재료 확보 등 모든 일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다. 이듬해 검은색 바탕에 북극성을 그려 넣은 상표의 삿포로맥주가 세상에 나왔다. 지금도 이를 계승한 삿포로 블랙 라벨 맥주가 널리 사랑받고 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맥주 산업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대부분 사라졌지만, 개척사가 세운 맥주 양조장은 지금도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으니 선구자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가이드의 설명을 다 들은 후 박물관 1층 시음장으로 내려가 초기 개척사맥주 맛을 재현한 것을 주문해 마셔보았다. 설명을 들어서일까. 맥주 한 잔의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와 잠시나마 맥주의 깊은 맛을 음미했다. 그래서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누구나 “맥주가 좋아졌다”고 한다.

박물관 건물을 나와 왼편으로 돌아서면 같은 건물이지만 입구가 다른 삿포로맥주원이라는 직영 레스토랑이 있다. 이곳에서 초창기 맥주 맛을 회상하며 홋카이도의 대표 음식인 칭기즈 칸(양고기) 요리를 먹을 수 있다. 삿포로맥주원은 독일 선술집 같은 분위기로, 삿포로 시내 관광을 한 뒤 저녁에 들러 목을 축이기에 안성맞춤이다. 당연히 늘 관광객들로 붐빈다.

삿포로 역으로 돌아오는 길에 삿포로팩토리(Sapporo Factory)라는 대형 복합몰에 들렀다. 삿포로맥주의 전신인 개척사맥주 양조장이 있던 부지 위에 7개의 건물이 세워지고 그 안에 쇼핑몰, 레스토랑, 영화관, 이벤트장 등 160여 개의 점포와 시설이 모여 있어 JR타워와 함께 삿포로 시민들의 발걸음이 잦은 곳이다. 시즌인 만큼 건물 중앙에는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져 있고, 무엇보다 전면을 유리로 만든 아트리움(중앙 홀)의 현대적 디자인이 이곳을 찾은 이들의 구매욕을 자극한다.

지하 문화 예술 공간 치카호를 걷다

삿포로팩토리를 나와 조금 걸으면 일명 치카호(チカホ)라 불리는 520m의 지하 통로가 나온다. 겨울만 되면 눈이 많이 내려 춥고 미끄러운 도심을 시민들이 안전하고 쾌적하게 다닐 수 있도록 삿포로 역사 지하에서 곧장 도시 중심부로 접근할 수 있도록 이어주는 길이다. 그러나 단지 지하 보행로 기능에 머물지 않고 문화 예술의 공간이자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이곳에서 사시사철 퍼포먼스, 콘서트, 작품 전시가 열리고 때로는 원전 반대와 같은 시민운동 등 다양한 정보의 발신지가 되고 있다. 지하 통로가 워낙 넓고 곳곳에 노천 카페가 있어 겨울에는 지상의 거리보다 안전하고 편안하기까지 하다. 관광객들에게는 도심으로 이동하는 통로이자 그 자체가 좋은 구경거리임에 틀림없다.

내가 방문한 날도 아동들의 종이접기 작품 전시가 열리고 있었는데, 작품으로 꾸며진 크리스마스트리가 오가는 이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게 한다. 맞은편 노천 카페에서 한가로이 책을 읽는 노인의 얼굴에서는 겨울 추위보다 생활의 여유로움이 배어나왔고, 그를 보는 내 발걸음도 왠지 가벼워지고 있었다.

맥주 향 맡으며 삿포로를 걷다
홋카이도 닛싱 역의 명예역장 황경성은…

도쿄대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나요로시립대학 보건복지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홋카이도의 문화 예술 진흥에 힘을 쏟고 있다. 2012년 1월부터 ‘여성동아’ 지면에 홋카이도 구석구석을 소개하는 ‘Life in Hokkaido’를 연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홋카이도의 관광사업에 기여한 바를 인정받아 2013년 4월 홋카이도관광대사로 임명됐다.

여성동아 2014년 1월 6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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