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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패션 대모 노라노 꺼지지 않는 불꽃

“노라노의 콘셉트는 절제된 멋”

글·구희언 기자 | 사진·조영철 현일수 기자

2013. 12. 17

우리나라 최초로 패션쇼를 열고 기성복을 전파해 패션의 해방기를 연 ‘살아 있는 패션의 역사’ 노라노. 인생 자체가 도전의 연속이던 그가 30년간 함께 일한 조카며느리 정금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또 다른 도전에 나섰다.

패션 대모 노라노 꺼지지 않는 불꽃
윤복희의 미니스커트, 펄시스터즈의 판탈롱…. 1956년 서울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서울 자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쇼를 열고 맞춤복 일색이던 시절 기성복을 제작, 전파해 패션의 ‘해방’을 알린 패션디자이너 노라노(85·본명 노명자)가 스타일링한 작품이다. “옷은 예술품이 아니다. 옷은 옷다워야 한다”는 패션 철학을 가진 그는 지금도 여전히 현역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그를 조명하는 전시 ‘Nora Noh-자료로 보는 노라노발(發) 구 기성복 패션의 역사’가 다큐멘터리 영화 ‘노라노’ 개봉과 함께 서울 종로구 신문박물관에서 열렸다.

일제강점기 경성방송국을 창립한 노창성과 경성방송 초대 아나운서를 지낸 이옥경의 둘째 딸인 노라노. 그는 일본군 위안부 차출을 피하려 17세에 부모가 정해준 일본군 한국인 장교와 결혼했지만 결혼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혼 사유는 본인의 문제가 아닌 시댁의 경제적 사정 때문이었지만, 당시에는 ‘이혼녀’라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주홍글씨였다. ‘인형의 집’을 뛰쳐나온 그는 영어 회화와 타이핑을 배워 미군정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다 1947년 20세의 나이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때 여권에 적은 영어 이름이 ‘노라’다.

이후 1949년 서울 명동에 의상실을 개업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양장에 익숙하지 않은 외교관 부인들을 위해 한복의 감각을 살린 아리랑 드레스를 디자인해 동서양의 패션을 아우르기도 했다. 주문복을 만들던 시절부터 ‘기성복 시대’의 도래를 예감해 축적한 손님들의 옷 치수 데이터 평균은 그가 기성복을 만들 때 요긴하게 쓰였다. 준비된 신여성에게 새 시대의 포문을 여는 데 주저할 이유는 없었던 셈이다. 1979년에는 뉴욕 맨해튼 7번가에 ‘Nora Noh’ 간판을 걸고 쇼룸을 열어 20여 년간 브랜드를 전개했다. 최지희, 최은희, 엄앵란 등 콧대 높은 여배우들 사이에서도 ‘노라노를 입는 것’은 일종의 자존심이었다.

패션 대모 노라노 꺼지지 않는 불꽃

노라노에게서는 그의 의상 같은 절제미가 느껴졌다.

‘문학 소녀’ 명자, 노라가 되다

전시장에서 그를 만나고 두 번 놀랐다. 속눈썹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한 화장과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패션 감각에 놀랐고, 어떤 질문이든 정확한 팩트를 기억해서 동어반복 없는 정제된 대답을 내놓는 게 그랬다. 전시회장을 둘러본 그는 “감개무량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잊었던 일도 생각나고, 예전에 한 말을 되씹어보는 게 재밌어요. 제일 놀란 건 1950~60년대 제가 신문에 기고했던 글들이에요.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칼럼이 있다기에 깜짝 놀랐어요. 젊은 세대에서 우리 시대의 일을 찾아내서 알게 해줘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살 때만 해도 과거를 생각할 겨를 없이 앞으로 나가는 데 벅차하며 살아왔잖아요.”

▼ 국내 패션디자이너 1호인데, 처음 일을 시작하고 어려움은 없었나요?

“처음에는 고객이 없어서 힘들었어요.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1백 달러도 안 되던 시절에 시작했으니 옷을 맞춰 입을 사람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었어요. 옷보다는 먹는 거 걱정할 시대였으니까요. 그래서 연극과 쇼 의상 작업부터 시작했어요. 그러다 영화가 활성화돼서 1950~60년대에는 영화 의상을 담당했죠. 슬슬 고객이 생겨서 1960년대 중반부터 기성복을 만들었는데, TV의 등장과 맞물리며 연예계 의상을 담당하고 기성복도 광고하게 됐어요. 드라마 의상 협찬을 하면 그게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비로소 패션이 일반화되기 시작했죠.”

▼ 옷을 만들며 어디에 주안점을 뒀나요?

“1960년대 중반부터 우리나라 여성이 직업 전선에 많이 진출해요. 전 그런 여성들이 자존심, 자신감을 갖고 사회에서 활약하며 멋지게 보이길 바랐어요. 그래서 기성복에 많은 힘을 썼죠. 그때그때 패션의 포인트를 살려서 디자인하지만, 근본적으로 옷은 입기 편하고 보기 좋고 사람과 잘 어울려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 요즘엔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는데, 예전엔 어떻게 하셨나요?

“전 ‘돈 벌어서 하늘에 전부 뿌렸다’고 말해요(웃음). 그때는 인터넷도 없고,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봐야 하니까 1년에 한 번씩 도쿄·뉴욕·파리·밀라노 등을 돌며 마케팅하고 패션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폈죠. 우리나라에서는 당장 필요 없을 디자인이라도 만약 국제적으로 진출할 기회가 오면 그 수준에 밀리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을 늘 갖고 살았어요.”

▼ 체력 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과거에는 15년간 일요일마다 등산을 했어요. 또 미국에서 제인 폰다 에어로빅 테이프를 사와서 1시간씩 보고 따라서 운동했죠. 여행도 다녔고요. 서울 근교 산은 가보지 않은 곳이 없어요. 한 달에 한 번은 수안보에 가서 문경새재를 오르내렸죠. 패션디자이너는 체력 관리가 필수예요. 육체적으로 정말 힘든 직업이거든요. 지금도 아침에 1시간 30분, 저녁에 30분씩 운동해요 아침 식사를 하고 공원에서 45분 스트레칭을 하고 45분 걷고, 저녁 먹고 1시간 후에 30분 정도 실내에서 자전거를 타요.”

▼ 실패한 경험이나 힘들었던 때가 있나요?

“외환위기 때 프린트 공장을 하며 조금 힘들었죠. 미국에서 컬렉션을 할 때마다 홍콩 사람들이 중국에서 싸게 제품을 카피해 와서 문제가 됐죠. 차별화를 하려고 국내에 프린트 공장을 세웠어요. 파리에서 미술 책을 사다가 프린트 모티프 작업을 하는데, 굉장한 테크닉이 필요해서 자기 공장이 있어야 그런 일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외환위기가 닥쳐 고생을 많이 했죠. 그런데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 경우도 있고 저런 경우도 있잖아요. 욕심만 안 내면 다 살아져요(웃음).”

패션 대모 노라노 꺼지지 않는 불꽃

30여 년간 동고동락한 패션디자이너 노라노와 조카며느리 정금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노라노는 “그간 정 실장이 뒤에서 밀어줬다면, 이제는 제가 뒤에서 정 실장을 밀어줄 차례”라고 했다.

조카며느리와 패션 세대교체 이뤄

노라노가 추구하는 콘셉트는 ‘절제된 멋(Under well controlled elegance)’이다. 미국의 한 기자가 과거 그의 패션쇼를 보고 리뷰에 쓴 말이라는데, 마음에 들어서 이후부터는 콘셉트를 설명할 때 그렇게 말한다고 했다. 절제된 멋, 그를 묘사하기에도 적절한 말 같았다. 그는 2014 S/S 컬렉션으로 1985년부터 30여 년간 동고동락한 조카며느리 정금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다시금 세계 시장에 진출한다. 청담동 노라노 매장에서 만난 그는 시크한 패션에 완벽한 화장으로 기자를 맞았다. 정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도 함께였다. 노라노는 “그동안은 정 실장이 뒤에서 밀어줬다면, 이제는 제가 뒤에서 정 실장을 밀어주고 있다. 말 그대로 세대 교체”라고 말했다.

▼ 지척에서 본 패션디자이너 노라노는 어떤 사람인가요?

“글쎄요. 기자님 보기엔 어떠세요? (“패션의 역사책 같다”고 하자) 맞아요. ‘Life is Fashion’. 선생님은 인생 자체가 패션이죠. 그런데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아마 다 그럴 거에요. 그렇지 않고는 일을 할 수가 없거든요.”(정금라)

“올인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지.”(노라노)

“자는 시간에도 사실은 생각하거든요. 잘 풀리지 않으면 계속 생각나고.”(정금라)

“자다가 깨어서도 패턴 생각하고(웃음). 정 실장은 미술을 전공해서 프린트와 색상을 살피는 감각이 뛰어나요. 패션에 있어서 베테랑이죠. 정말 가정을 가지고 이 일을 하는 건 힘들어요.”(노라노)

▼ 미국 진출은 이미 과거에 했는데, 이번 2014 S/S 컬렉션의 의의가 있다면요?

“10년 사이 SPA 브랜드 같은 패스트 패션이 마켓을 주도해왔는데, 이제 한미 FTA도 자리를 잡고 외국 마켓에도 동양 디자이너들이 자리 잡는 분위기거든요. 시장의 흐름이 바뀌고 있어 좋은 계기라는 생각에 브랜드를 재정비해 진출하게 됐어요.”(정금라)

“제가 동양인으로는 처음 미국에 진출했을 때 ‘뉴욕타임스’에서 ‘패션이 앞으로는 어디서 올지 예측할 수 없다’고 기사를 썼어요. 이번에 가능하다고 생각한 건 쿼터제가 없어지며 소재의 제약에서 자유로워졌기 때문이에요. 동양인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고, 국격도 올라가서 이제는 ‘메이드 인 코리아’를 좋게 보니까요.”(노라노)

패션 대모 노라노 꺼지지 않는 불꽃

노라노의 2014 S/S 컬렉션.

▼ 2014 S/S 컬렉션의 특징은 뭔가요?

“이번 컬렉션은 25~35세 여성을 타깃으로 한 프린트 중심의 컬렉션이에요. Stripe Chic, Modern Retro, Lacey Allure, Baroque Flower의 네 가지 콘셉트를 잡았어요.”(정금라)

▼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을 노라노만의 경쟁력이 있나요?

“있죠. 확실히.”(정금라)

“기성복에 쿠튀르의 감각을 가미한 게 장점이에요. 가격은 중저가 기성복 정도지만 옷 자체는 쿠튀르의 고급스러움과 감성이 담겨 있다는 점.”(노라노)

“오랫동안 주문복을 만들며 얻은 남다른 노하우로 여성 신체의 특성을 완벽히 이해하고 옷을 만들어요. 디자인은 평범해 보이죠. 그런데 입으면….”(정금라)

“다르죠(웃음).”(노라노)

“선생님의 ‘강점’은 패턴이 굉장히 좋다는 점이에요. 옷에 굴곡이 있다 보니 같은 패턴이어도 어디에 얼마나 쓰고 강조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이 나와요. 그걸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그림만 보고 만든 옷과는 다르죠.”(정금라)

▼ 패션계 후배들에게 한 가지만 조언해 주신다면요.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에요. 굉장히 힘들고, 시즌도 앞서가야 되고, 시간도 많이 필요로 하고 자다가도 생각해야 되고…. 그 정도로 힘든 일이니 좋아서 해야 힘든지 모르고 하거든요. 자기 능력과 체력의 한계 내에서 일을 해야지 욕심을 너무 내면 건강에 지장이 올 수 있으니 조심하면서 일하면 좋겠어요.”(노라노)

‘한때 많은 한국 여성이 ‘인형의 집’ 속 노라를 동경하며 울타리 밖으로 나갔지만 대개 다 가혹한 세상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아니다. 막히면 통한다는 의지,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불타는 한 여성의 모험은 끝내 불모의 이 땅에 디자인 나라를 만들어 냈다.’ 문학평론가 이어령은 노라노를 이렇게 평했다. 이번 전시와 2014 S/S 콜렉션을 통해 한 사람의 열정과 우리나라 패션 산업이 걸어온 발자취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도전은 계속된다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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