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다가온다. 수많은 송년회가 개최되겠지. 친구나 동료들과 함께 한 해를 마무리하기 위해. 한국인은 정이 많다고 한다. 이는 가족이나 친척, 친구 등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할까? 무관심, 배타적 또는 적대적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는 혈연, 지연, 학연이 매우 중요하다. 학교 동창회, 향우회, 동기 모임 모두 끈끈한 연줄이다. 연줄이 없는 사람은 살아가기가 팍팍하다.
최근 어느 모임에 초대돼 간 적이 있다. 회장이 자기 옆자리를 권해 앉으려 하니 누군가 자기 동기가 앉을 자리라고 한다. 회장은 중간쯤의 다른 빈자리로 나를 안내했다. 조금 지나자 옆에 앉았던 사람이 또 내게 자기 동기가 앉을 자리라고 말하는 것 아닌가. 나는 다시 일어나 맨 끝 빈자리로 갔다. 아무도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모두에게 당연한 듯했다. 그러나 반평생을 외국에서 산 나에게는 참 이상했다. 외국에서는 대개 온 순서대로 자유롭게 앉고, 설사 자신이 선호하는 자리가 있어도 이미 누군가 앉아 있으면 다른 자리로 간다. 그리고 모르는 옆 사람과도 재미있게 대화를 나눈다. 그날 특별히 초청돼 간 손님에게도 그렇게 하는데, 전혀 연고 없이 오는 사람은 어떤 취급을 당할지 궁금했다.
얼마 전에는 길을 가는데 어느 사람이 나를 심하게 부딪치며 앞질러 갔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오히려 째려보듯 지나가던 그가 건너편의 누군가를 보더니 만면에 웃음을 띠며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자기가 아는 윗사람이겠지. 똑같은 사람이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이렇게 달랐다. 항상 내 편과 다른 편을 의식하면서 산다면 얼마나 피곤하고 숨 막히는 사회인가.
어느 사회에나 주류층의 텃세는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텃세는 유독 심하고, 사회적 갈등은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것 같다. 우리 가족, 우리 학교, 우리 고향, 우리 동기 등 ‘우리’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따돌리고 배제한다. 어디 가서 아는 사람 하나 없으면 제대로 대접받기 어렵다. 오죽하면 대형병원에 입원하려면 그곳에서 청소하는 사람이라도 알아야 한다는 말이 나올까. 그러니 선거를 하면 같은 지역 출신이 싹쓸이하면서 ‘우리가 남인가’ 하겠지.
현재 독일의 국가원수인 요아힘 가욱(Joachim Gauck) 대통령은 옛 동독 출신이다. 2005년 독일의 최초 여성 총리에 선출된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현 총리도 옛 동독 출신이다. 동서독이 통일된 후 8년 만인 1998년 국가 서열 2위인 연방하원의장에 옛 동독 출신인 볼프강 티어제(Wolfgang Thierse)가 선출됐을 때, 독일 사회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내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2005년에는 독일의 양대 정당인 기민당(CDU)과 사민당(SPD) 당수가 모두 옛 동독 출신이었다. 통일 전 서독과 동독의 인구 비례는 4:1이었다. 동독 출신 중에는 아직도 자신이 2등 시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물론 있다. 특히 동독에서 공산당 간부로서 특권을 누리던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서독인들은 동독인들을 포용했고 똑같은 권리를 부여했다. 나아가 동독 출신을 자신들의 국가지도자로 선출했다.
동서독이 분단된 후 1990년 10월 통일될 때까지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한 동독인은 모두 5백30만 명에 달한다. 통일 직전인 1989년에는 39만 명, 1990년엔 40만 명의 동독인이 서독으로 대거 탈출했다. 동독 주민의 대거 탈출이 동독 붕괴와 급작스러운 동서독 통일의 주 원인이 되기도 했다. 물론 서로 간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서독사회는 동독 주민들을 모두 수용했고 정착토록 했다. 동독인들이 서독 사회에서 멸시받고 적응하지 못했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넘어왔을까? 만약 동서독이 통일되지 못했다면, 유럽에서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는 현재의 독일이 됐을까? 나아가 수많은 동구권 국가를 포함한 유럽연합(EU)이 실현될 수 있었을까? 역사는 항상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한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죽음을 무릅쓰고 지금까지 우리나라로 건너온 2만5천여 명의 탈북자 중 상당수가 우리사회의 편견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얼마나 힘들면 되돌아가려는 사람까지 생겼을까. 그런데 통일을 하겠다고? 한국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들은 어떠한가? 현재 약 1백40만 명의 외국인이 한국에 체류하고 있다. 농촌 총각에게 시집와 아이를 낳으며 살고 있는 여성들,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마다하는 산업 현장에서 일하며 우리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외국인들을 우리는 따뜻하게 대하고 있는가? 해외의 우리 동포 7백50만 명만 우리의 소중한 자산인가? 해외 동포의 성공에는 환호하면서, 우리나라에 와서 일하는 외국인은 멸시한다. 이들도 우리 사회의 소중한 자산이다. 자기 나라로 돌아간 외국인들의 반한(反韓) 감정과 한국인 혐오증은 결코 우리에게 이롭지 않다.
다름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따뜻한 송년회 돼야
현재 독일 인구 8천2백만 명 중 외국인은 약 7백20만 명이다. 그러나 그동안 독일 국적을 취득한 많은 외국인들까지 포함하면 실질적인 외국인 숫자는 훨씬 더 많다. 수도인 베를린의 인구 3백50만 명 중 외국인이 약 50만 명이다. 이렇게 많은 외국인들과 함께 살면서 문제가 없을 리 없다. 유럽 사회는 대체로 보수적이다. 그러나 외국인의 정착을 돕기 위해 다양한 지원 정책을 편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의 경우를 보면 안다. 한국에서 간 가난한 간호보조원이 독일 국민이 낸 세금으로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고 그 나라 대학생들에게 강의까지 했다.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 근로자에게도 이러한 기회가 주어질까? 배타적인 우리 사회에서 가능한 일일까? 나는 독일에서 전통 있는 대학을 다녔지만, 대학교 동창회가 개최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독일과 우리나라 대학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독일에서는 제도적으로 자신의 모교에서 바로 교수가 될 수 없다. 독일에서 교수가 되려면 박사학위를 받고 수년간 연구 및 강의를 한 후 대학교수 자격증(Habilitation)을 취득해야 한다. 그 후 다른 대학으로 간다. 다른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한 후에는 자신의 모교 교수로 갈 수도 있다.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배운 내용을 그대로 자기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소위 학문의 ‘근친상간’을 막고, 학문의 자유와 대학의 발전을 추구하는 제도다. 같은 학교 출신이 아니면 교수는커녕 강사도 되기 어려운 우리나라 현실과는 너무 많이 다르다.
독일에도 물론 고향의 문화와 전통을 이어가는 행사가 많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수많은 사회적 모임과 단체 활동에선 출신 학교나 출신 지역으로 사람을 가르지 않는다.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자신들의 취미나 가치관, 또는 개인적 성향에 따라 모임에 가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글로벌 시대에 살고 있다. 지구가 하나의 공동체다. 세계지도를 보라. 지도상에 남북으로 갈린 한국이 얼마나 작은지. 그 안에서 또 우리끼리, 끼리끼리로 편 가르고 쪼개면서 밀려오는 글로벌 파도에 대항할 수 있겠는가? 나라의 발전은 국가의 정책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국민 개개인의 열린 마음이 관건이다. 나와 다르면 적인가? 다름을 이해하고 포용하면 손해 보는 것이 아니다. 지지자와 친구를 얻는 것이다. 개인의 지평선을 넓히고 사회를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생각하기 나름이다. 같이 미래를 생각해보는 따뜻한 송년회는 어떨까?
김영희 전 대사는…
전북 전주에서 6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나 전주여고를 졸업하고 서울시 9급 공무원으로 일하다 1972년 파독 간호보조원으로 독일로 건너갔다. 3년간 정형외과 병동에서 일한 후 공부를 계속해 쾰른대에서 교육학 석사와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쾰른대 6백 년 역사에서 최초로 ‘전공 과목을 강의한 외국인 여성’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독일 통일 직후 1991년 외무부에 특별 채용돼 주독일 한국대사관에서 1등 서기관부터 공사까지 역임한 뒤 2005년 세르비아 대사로 임명돼 대한민국 세 번째 여성 대사가 됐다. 공직에서 은퇴한 후 한국과 미국, 독일을 오가며 학술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20대, 세계무대에 너를 세워라’가 있다.
최근 어느 모임에 초대돼 간 적이 있다. 회장이 자기 옆자리를 권해 앉으려 하니 누군가 자기 동기가 앉을 자리라고 한다. 회장은 중간쯤의 다른 빈자리로 나를 안내했다. 조금 지나자 옆에 앉았던 사람이 또 내게 자기 동기가 앉을 자리라고 말하는 것 아닌가. 나는 다시 일어나 맨 끝 빈자리로 갔다. 아무도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모두에게 당연한 듯했다. 그러나 반평생을 외국에서 산 나에게는 참 이상했다. 외국에서는 대개 온 순서대로 자유롭게 앉고, 설사 자신이 선호하는 자리가 있어도 이미 누군가 앉아 있으면 다른 자리로 간다. 그리고 모르는 옆 사람과도 재미있게 대화를 나눈다. 그날 특별히 초청돼 간 손님에게도 그렇게 하는데, 전혀 연고 없이 오는 사람은 어떤 취급을 당할지 궁금했다.
얼마 전에는 길을 가는데 어느 사람이 나를 심하게 부딪치며 앞질러 갔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오히려 째려보듯 지나가던 그가 건너편의 누군가를 보더니 만면에 웃음을 띠며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자기가 아는 윗사람이겠지. 똑같은 사람이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이렇게 달랐다. 항상 내 편과 다른 편을 의식하면서 산다면 얼마나 피곤하고 숨 막히는 사회인가.
어느 사회에나 주류층의 텃세는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텃세는 유독 심하고, 사회적 갈등은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것 같다. 우리 가족, 우리 학교, 우리 고향, 우리 동기 등 ‘우리’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따돌리고 배제한다. 어디 가서 아는 사람 하나 없으면 제대로 대접받기 어렵다. 오죽하면 대형병원에 입원하려면 그곳에서 청소하는 사람이라도 알아야 한다는 말이 나올까. 그러니 선거를 하면 같은 지역 출신이 싹쓸이하면서 ‘우리가 남인가’ 하겠지.
현재 독일의 국가원수인 요아힘 가욱(Joachim Gauck) 대통령은 옛 동독 출신이다. 2005년 독일의 최초 여성 총리에 선출된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현 총리도 옛 동독 출신이다. 동서독이 통일된 후 8년 만인 1998년 국가 서열 2위인 연방하원의장에 옛 동독 출신인 볼프강 티어제(Wolfgang Thierse)가 선출됐을 때, 독일 사회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내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2005년에는 독일의 양대 정당인 기민당(CDU)과 사민당(SPD) 당수가 모두 옛 동독 출신이었다. 통일 전 서독과 동독의 인구 비례는 4:1이었다. 동독 출신 중에는 아직도 자신이 2등 시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물론 있다. 특히 동독에서 공산당 간부로서 특권을 누리던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서독인들은 동독인들을 포용했고 똑같은 권리를 부여했다. 나아가 동독 출신을 자신들의 국가지도자로 선출했다.
동서독이 분단된 후 1990년 10월 통일될 때까지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한 동독인은 모두 5백30만 명에 달한다. 통일 직전인 1989년에는 39만 명, 1990년엔 40만 명의 동독인이 서독으로 대거 탈출했다. 동독 주민의 대거 탈출이 동독 붕괴와 급작스러운 동서독 통일의 주 원인이 되기도 했다. 물론 서로 간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서독사회는 동독 주민들을 모두 수용했고 정착토록 했다. 동독인들이 서독 사회에서 멸시받고 적응하지 못했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넘어왔을까? 만약 동서독이 통일되지 못했다면, 유럽에서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는 현재의 독일이 됐을까? 나아가 수많은 동구권 국가를 포함한 유럽연합(EU)이 실현될 수 있었을까? 역사는 항상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한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죽음을 무릅쓰고 지금까지 우리나라로 건너온 2만5천여 명의 탈북자 중 상당수가 우리사회의 편견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얼마나 힘들면 되돌아가려는 사람까지 생겼을까. 그런데 통일을 하겠다고? 한국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들은 어떠한가? 현재 약 1백40만 명의 외국인이 한국에 체류하고 있다. 농촌 총각에게 시집와 아이를 낳으며 살고 있는 여성들,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마다하는 산업 현장에서 일하며 우리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외국인들을 우리는 따뜻하게 대하고 있는가? 해외의 우리 동포 7백50만 명만 우리의 소중한 자산인가? 해외 동포의 성공에는 환호하면서, 우리나라에 와서 일하는 외국인은 멸시한다. 이들도 우리 사회의 소중한 자산이다. 자기 나라로 돌아간 외국인들의 반한(反韓) 감정과 한국인 혐오증은 결코 우리에게 이롭지 않다.
다름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따뜻한 송년회 돼야
현재 독일 인구 8천2백만 명 중 외국인은 약 7백20만 명이다. 그러나 그동안 독일 국적을 취득한 많은 외국인들까지 포함하면 실질적인 외국인 숫자는 훨씬 더 많다. 수도인 베를린의 인구 3백50만 명 중 외국인이 약 50만 명이다. 이렇게 많은 외국인들과 함께 살면서 문제가 없을 리 없다. 유럽 사회는 대체로 보수적이다. 그러나 외국인의 정착을 돕기 위해 다양한 지원 정책을 편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의 경우를 보면 안다. 한국에서 간 가난한 간호보조원이 독일 국민이 낸 세금으로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고 그 나라 대학생들에게 강의까지 했다.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 근로자에게도 이러한 기회가 주어질까? 배타적인 우리 사회에서 가능한 일일까? 나는 독일에서 전통 있는 대학을 다녔지만, 대학교 동창회가 개최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독일과 우리나라 대학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독일에서는 제도적으로 자신의 모교에서 바로 교수가 될 수 없다. 독일에서 교수가 되려면 박사학위를 받고 수년간 연구 및 강의를 한 후 대학교수 자격증(Habilitation)을 취득해야 한다. 그 후 다른 대학으로 간다. 다른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한 후에는 자신의 모교 교수로 갈 수도 있다.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배운 내용을 그대로 자기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소위 학문의 ‘근친상간’을 막고, 학문의 자유와 대학의 발전을 추구하는 제도다. 같은 학교 출신이 아니면 교수는커녕 강사도 되기 어려운 우리나라 현실과는 너무 많이 다르다.
독일에도 물론 고향의 문화와 전통을 이어가는 행사가 많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수많은 사회적 모임과 단체 활동에선 출신 학교나 출신 지역으로 사람을 가르지 않는다.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자신들의 취미나 가치관, 또는 개인적 성향에 따라 모임에 가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글로벌 시대에 살고 있다. 지구가 하나의 공동체다. 세계지도를 보라. 지도상에 남북으로 갈린 한국이 얼마나 작은지. 그 안에서 또 우리끼리, 끼리끼리로 편 가르고 쪼개면서 밀려오는 글로벌 파도에 대항할 수 있겠는가? 나라의 발전은 국가의 정책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국민 개개인의 열린 마음이 관건이다. 나와 다르면 적인가? 다름을 이해하고 포용하면 손해 보는 것이 아니다. 지지자와 친구를 얻는 것이다. 개인의 지평선을 넓히고 사회를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생각하기 나름이다. 같이 미래를 생각해보는 따뜻한 송년회는 어떨까?
김영희 전 대사는…
전북 전주에서 6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나 전주여고를 졸업하고 서울시 9급 공무원으로 일하다 1972년 파독 간호보조원으로 독일로 건너갔다. 3년간 정형외과 병동에서 일한 후 공부를 계속해 쾰른대에서 교육학 석사와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쾰른대 6백 년 역사에서 최초로 ‘전공 과목을 강의한 외국인 여성’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독일 통일 직후 1991년 외무부에 특별 채용돼 주독일 한국대사관에서 1등 서기관부터 공사까지 역임한 뒤 2005년 세르비아 대사로 임명돼 대한민국 세 번째 여성 대사가 됐다. 공직에서 은퇴한 후 한국과 미국, 독일을 오가며 학술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20대, 세계무대에 너를 세워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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