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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변치 않는 시간을 탐하다

글·김명희 기자 | 사진·지호영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씨제스 엔터테인먼트 제공

입력 2013.11.15 15:41:00

어떤 이는 영화 ‘관상’을 본 후 이정재에 대해 “돌계단도 런웨이로 만드는 남자”라는 평을 남겼다. 누군가는 류승룡의 ‘더티 섹시’에 빗대 그를 ‘로열 섹시’라고 정의했다.
올해로 데뷔 20년.
보석도 시간이 지나면 빛이 바래기 마련인데, 이정재의 시간은 여전히 가장 빛나는 순간에 멈춰 있는 것 같다.
이정재 변치 않는 시간을 탐하다


‘도둑들’에 이어 ‘신세계’ ‘관상’까지 세 편의 영화로 동원한 관객 수가 무려 2천7백만 명. 3연타석 홈런보다 더 놀라운 건 혼자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처럼 스크린 속에서 그의 존재가 빛난다는 점이다.
1995년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혜린(고현정)을 지켜주던 든든한 보디가드 재희의 차갑고도 뜨거운 눈빛에 흔들렸던 사람들은 무릎을 쳤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지난 20년간 최민식·송강호·설경구 등 거친 외모의 연기파 배우들과 비교해 이정재(40)를 비주얼 배우로만 국한시켰던 게 미안해졌다. 아니 이정재는 어느 순간 스스로 그 선을 뛰어넘었는지도 모르겠다. ‘에덴의 동쪽’ ‘자이언트’ ‘이유 없는 반항’ 단 세 편의 영화를 남긴 뒤 교통사고로 절명함으로써 젊음의 상징이 된 제임스 딘과 비교한다면 이정재는 살아서 진화하고 있는 셈이랄까.
송강호·백윤식·김혜수 등 연기파 배우들과 이종석 등 떠오르는 스타가 두루 포진한 ‘관상’에서 대중들의 관심은 울룩불룩한 근육을 보이지 않고도 손가락 하나로 파국을 불러올 수 있을 것 같은 남자, 얼기설기 만들었을 법한 털옷도 윤기 흐르는 신상 명품 모피처럼 소화하는 남자, 광기와 비열함과 고상함이 절묘하게 공존하는 남자, 이정재에게 쏠렸다.
생각 외로 이정재에 대한 반응이 뜨겁자 영화사 측은 그의 출연 분량을 15분 정도 추가한 재편집본을 개봉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특정 배우 중심의 재편집본 개봉은 아주 이례적인 일로, 그의 인기가 얼마만큼인지 가늠케 한다. 이와 더불어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9월 24일부터 10월 초까지 이정재 특별전을 열고 1994년 데뷔작인 ‘젊은 남자’부터 ‘신세계’까지 그가 출연한 영화 15편을 상영했다. 이정재는 9월 27일 ‘신세계’ 상영 직후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직접 참석해 팬들과 스스럼없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영상자료원 측에 따르면 지금껏 특별전을 연 배우 가운데 40대는 이정재가 처음이라고 한다.

걸음걸이까지도 섹시한 남자

이정재 변치 않는 시간을 탐하다


“벌써 20주년이라니, 처음엔 쑥스러워서 안 하려고 했어요. (영상자료원 측에서) 꼭 해야 한다기에 어떻게든 정우성 씨와 함께 하려고 했는데 그분이 촬영이 너무 바빠 안 되겠더라고요. 정우성 씨도 저와 같은 해에 데뷔했거든요.”
이정재는 데뷔 후 지금까지 팬미팅을 한 번도 안 해봤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날 관객과의 대화에는 데뷔 때부터 그의 작품이란 작품은 다 봤다는 올드 팬부터 ‘도둑들’을 보고 반했다는 대학생까지 좀 더 가까이서 그를 보고자 하는 열혈 팬들이 몰려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정재는 먼저 ‘관상’에 관한 이야기부터 풀어놓기 시작했다. 작품과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던 그는 제작자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출연료를 5천만원 자진 삭감하면서 영화에 출연하는 열정을 보였다.
“‘신세계’ 촬영할 때 한재림 감독님이 ‘관상’ 시나리오를 들고 부산으로 직접 찾아오셨더라고요. 보통 영화 시나리오가 1백10페이지 남짓인데 40페이지가 넘어가도록 수양(대군)이 안 나오는 거예요. 화도 나고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다 50페이지 정도 넘어가니까 수양이 등장하는데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그 장면이 굉장히 멋스럽게 그려져 있었어요. 수양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도 더 재밌어지고. 이 정도면 충분히 해볼 만한 캐릭터라는 생각에 출연하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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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20주년 파티에 함께한 이정재와 정우성. 같은 해에 데뷔한 두 사람은 연예계에서 둘도 없는 절친이다.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과 그를 지지하는 김종서 일파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스포일러 축에도 끼지 못하는 이 엄연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수양이라는 캐릭터는 다소 밋밋하게 그려질 우려가 있었다. 이정재는 기존 작품에서의 수양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외모를 좀 거칠게 표현했다. 하지만 왕족으로서의 기품과 품격을 잃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야욕에 눈이 번득이면서도 신상 모피를 두르고 런웨이를 걷는 듯한 섹시한 수양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관객과의 대화 진행을 맡은 영화 저널리스트 백은하 씨는 이 대목에서 이정재에 대해 과거 배창호 감독이 한 말을 소개했다. 이정재와 함께 ‘흑수선’을 촬영할 당시, 배 감독은 그를 이탈리아 종마에 비유했다는 것. 귀족적이면서 남성적 카리스마가 넘치는 그런 이미지는 ‘하녀’ ‘신세계’ ‘관상’에서도 계속된다. 특히 우아한 걸음걸이는 이정재의 트레이드마크.

이정재 변치 않는 시간을 탐하다


“사실 제가 걸음걸이에 콤플렉스가 있어요. 예전부터 ‘뒤뚱뒤뚱 걷는다’ ‘골반이 틀어진 게 아니냐, 병원에 가서 검사 좀 받아봐라’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잘 걸으려고 신경을 쓰면 몸이 뻣뻣해져서 더 부자연스럽더라고요(웃음). 그래서 걷는 장면을 찍을 땐 항상 신경을 쓰는 편이에요. 이탈리아 종마 같다는 표현은, 배창호 감독님은 말이 달리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을 때 가장 희열을 느낀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껑충껑충 뛰는 모습이 말을 닮았다고…(웃음). 그래서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게 아닌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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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당혹스러웠던 캐릭터는 영화 ‘하녀’의 재벌남 훈
이정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20년 동안 변하지 않는 명품 몸매다. 어떤 옷이든 보기 좋게 소화하는 날이 선 몸매는 그가 배우로서 얼마나 긴장하면서 살아왔는지 보여주는 물증이기도 하다.
“작품에 따라 조금씩 몸 사이즈를 조절해요. ‘신세계’의 이자성은 쫓기는 상황이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인물이라 68kg 정도에 몸무게를 맞췄는데, 다음 작품에서 이종격투기 선수 역을 맡았기 때문에 지금은 70kg 초반으로 체중을 좀 늘렸죠.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마른 체질이에요. 어릴 때부터 몸집이 작아 집에서 ‘소소’라는 애칭으로 불렸거든요. 몸매 관리를 해야 한다는 스트레스는 없는데 운동을 안 하면 체력이 떨어져서 촬영이 힘들어요. 밥 먹고 운동만 하느냐고 묻는 분들도 있는데 체력 유지 차원에서 조금씩 운동을 합니다.”
객석에서 부러움 섞인 탄성이 쏟아졌다. 내친김에 가벼운 질문이 하나 더 이어졌다. 목소리가 좋은데 지금껏 영화에서 노래하는 모습은 왜 보인 적 없느냐는.
“저, 노래 진짜 못 해요. 친구들을 만나면 보통 반주 한잔씩 하고 노래방에 가는데 저는 그게 싫더라고요. (노래방에) 안 가 버릇하니 유행가도 잘 모르고. 반면 정우성 씨는 그런 거 좋아해요. 노래도 잘하고.”
관객과의 대화는 이미 팬미팅 분위기로 흘렀다. ‘노래해! 노래해!’라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예상했던 (관객과의 대화) 분위기가 아닌데…’라며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싫지 않은 기색이던 이정재는 ‘옛날 노래밖에 모르는데’ 하면서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부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베일에 싸였던 이정재의 노래 실력을 감상하기 위해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이 숨을 죽였다. 다음 영화에 노래하는 장면이 꼭 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정재의 노래는 인상적이었다.
화려한 겉모습만 보면 딱 부잣집 외동아들 스타일이지만 친구 생일선물 살 돈조차 없었던 어려운 가정환경, 자폐를 앓는 형 때문에 더 의젓해지려고 했던 기억들 때문에 유년 시절 이정재는 지금보다 조용하고 어두웠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을 버려야 하는 존재가 배우다. 자신을 버리고 오롯이 타인이 되는 경험은 그 자신을 객관화시키고 변화·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그 많은 인물들 가운데 물론 한번쯤 이렇게 살아보고 싶다, 혹은 절대로 이렇게 살지는 않겠다고 생각한 캐릭터도 있을 것이다.
“‘하녀’의 훈 캐릭터를 받아들고, 임상수 감독님이 도대체 나를 어떻게 보셨기에 이런 역을 제안하셨을까 당황스럽기도 하고, ‘내가 지금껏 잘못 살아온 건 아닌지’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더라고요(웃음). 제가 지금까지 맡은 역 중 가장 인간미 없고 나쁜 놈이에요. 그런데 한 번쯤 그렇게 돈 많은 사람으로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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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가 터널을 지나는 법
그의 말에 따르면 (연기)감만큼 변덕스러운 것도 없다고 한다. 왔는가 싶으면 사라지고, 잡은 것 같다가도 손가락 사이에서 모래알 빠져나가듯 사라지는 게 바로 감이라는 것. 가까스로 다가온 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지금이 이정재 영화 인생의 최고 전성기라는 말에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이정재가 지금껏 팬미팅을 하지 않은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의 연기를 어떻게 볼지 두려운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탄탄대로를 걸어왔을 것 같지만 영화 실패로 암흑 같은 나날을 보낸 적도 있고, 과연 연기를 계속하는 게 옳은 일인지 고민한 적도 있다. 따라서 그가 많은 이들 앞에 섰다는 것은 그만큼 배우로서 자신감이 생겼다는 이야기다.
“그만두고 싶은 적도 많았고, 막막한 순간도 있었고, 당시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긴 터널 속에 갇혔던 시간도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좋았던 순간이 더 많았지만. 중요한 건 언젠가는 이 터널이 끝나고 빛으로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끈기 있게 기다리는 거예요. 유행이라는 걸 무시할 수 없겠더라고요. 우린 모두 각자의 고유한 색깔을 갖고 있는데, 어떤 빛과 만나면 그 컬러가 더욱 돋보이게 돼요. 자신을 돋보이게 할 빛을 만날 때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기다리는 거죠.”
그리고 이제 드디어 이정재의 시대가 왔다. 그는 10월 2일 서울 장충동 반얀트리 호텔에서 프라이빗 파티를 열었다. 데뷔 동기이자 오랜 절친인 정우성과 같은 소속사 식구인 ‘JYJ’(박유천 김재중 김준수), 배우 설경구, 송지효, 강혜정 등이 참석해 그의 데뷔 20주년과 제 2의 전성기를 축하했다. 하지만 아직 파티는 끝나지 않았다. 영화 ‘빅매치’ ‘무뢰한’ ‘신세계2’ 등에서 이정재 신드롬은 계속될 것이므로.

여성동아 2013년 11월 5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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