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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40년 친구 누렁이 곁으로 간 최원균 할아버지 장남 영두 씨가 처음 털어놓은 ‘워낭 소리’ 그 후

글·박길명 자유기고가 | 사진·지호영 기자

2013. 11. 15

길을 가던 퇴계 이황 선생이 “산중 우물의 물맛이 아주 좋다”고 말한 데서 유래됐다는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하눌리 산정(山井)마을. 이 마을 건너 새내미 골짜기 외딴집에 여든 노부부와 마흔 살 먹은 소가 있었다. 할아버지와 평생을 헌신한 소, 이를 시샘하는 듯했지만 두루 깊은 애정을 가진 할머니. 그들은 힘을 합쳐 농사를 짓고 9남매를 키웠다. 어렴풋한 기억 속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가 그러했을 산골 마을의 고단하면서도 느릿한 일상. 그렇게 흘러갔을 그들의 이야기가 ‘워낭 소리’라는 이름의 영화에 담기면서 많은 이들의 가슴을 후벼 팠다. 제 힘을 모두 풀었던 소가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자 할아버지는 말했다. “좋은 데 가거래이.” 그리고 몇 해가 지나 할아버지도 그토록 그리워하던 소 곁으로 떠났다. 주인과 일꾼으로 만나 고락을 함께한 할아버지와 소 누렁이의 이야기는 이제 아련한 가을날의 동화로 남았다.

40년 친구 누렁이 곁으로 간 최원균 할아버지 장남 영두 씨가 처음 털어놓은 ‘워낭 소리’ 그 후


향년 85세. 최원균 할아버지가 잠든 곳은 생전 그가 바라던 대로였다. 소가 먼저 죽으면 “상주질 할 거”라던 최 할아버지는 산자락 아래 옛 일터였던 밭을 굽어보며 누렁이와 다시 한 땅에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고인의 묘소와 지난 세월을 함께했던 누렁이 무덤과의 거리는 5m 남짓. 소가 묻힌 작은 봉분 바로 뒤에 할아버지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영화 속 할아버지를 태운 달구지, 그것을 끄는 누렁이의 이미지를 연상케 했다. ‘딸그랑.’ 금세라도 누렁이 턱에 매달린 워낭의 울림이 들릴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8월 16일이었어요. 병세가 악화돼 입원하러 가는 길에 그러시더군요. ‘내 죽으면 소 무덤 옆에 묻어달라’고. 그 말씀이 아버지의 유언이 돼버렸지요. 소가 묻힌 곳은 농부로 평생을 산 아버지께서 늘 일하고 거니시던 곳입니다. 그곳에 모시는 것이 자식 된 도리라고 생각했지요.”
봉화에 있는 경북인터넷고등학교 미술 교사인 큰아들 영두(59) 씨는 당초 소가 묻힌 곳은 고인의 묘소에서 위쪽으로 60m가량 떨어진 곳이었다고 했다. 10월 1일 오후 할아버지가 유명을 달리하고 장례식 즈음 누렁이 무덤을 고인의 곁으로 이장했다. 수년 전 소가 떠난 뒤 할아버지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다. 여덟 살 때 침을 잘못 맞아 불편해진 왼발의 통증은 더욱 심해졌고 두통의 횟수도 날이 갈수록 잦아졌다. 식사량도 부쩍 줄었다.
그러다 할아버지는 지난해 말 갑자기 배가 아파 병원에 갔다가 ‘쓸개에 석회질이 쌓여 담관석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를 치료하기 위해 검사를 받던 중 가족들은 폐암 말기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했다. 이후 할아버지는 병원과 집을 오가는 투병 생활 내내 고통과 싸우다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평생 좋은 일만 하셨으니 좋은 데 가셨을 거예요.”
산자락 원두막에서 굽은 허리를 펴 물끄러미 남편과 소 무덤을 바라보는 이삼순(83) 할머니를 향해 아들 영두 씨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남편과 아버지를 떠나보낸 가족만큼 가슴 아픈 이들이 있을까마는 많은 이들이 아쉬워하며 고인을 추모하러 다녀갔다.
“얼마 전 재미교포 한 분이 다녀가셨어요. 2년 전에 아버지를 뵙고 교분을 맺었는데, 아침에 집으로 자신의 수필집을 가지고 오셨더라고요. 아버지와 나눈 이야기를 글에 담았답니다. 어른께 책을 보여드리겠다는 기쁨에 설레 먼 길을 오셨는데, 미처 부고를 듣지 못한 채 말이죠. 그 안타까워하던 모습이란….”
여든 살 할아버지와 마흔 살 늙은 소의 이별 이야기를 담은 영화 ‘워낭 소리’(감독 이충렬)는 2009년 개봉돼 3백만 명에게 진한 감동을 선사한 한국 독립영화 사상 최고 흥행작이다. 무엇보다 도시 생활에 지쳐 아버지, 어머니를 잊고 살던 중년의 자식들이 때늦은 사과 편지를 쓰는 심정으로 영화관을 찾은 덕이었다. 사위어가는 농촌의 마지막 풍경을 지탱한 최 할아버지와 이 할머니는 그렇게 이 시대 부모의 상징이 됐다.

끝끝내 자신이 나온 영화 보지 않은 최원균 할아버지

산자락 일터에서 고인의 댁까지는 1km 정도. 집 앞에 번듯한 공원이 생겼고 최 할아버지와 누렁이를 묘사한 동상도 세워졌다. 집까지 가는 언덕길 또한 말끔하게 포장됐다. 장승이 반기는 집 입구에는 철 대문이 생겼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외지인으로 인한 노부부의 사생활 침해와 안전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한번은 낯선 젊은이가 밤중에 갑자기 방문을 여는 바람에 영두 씨도 잠을 설쳤다고 한다. 일언반구도 없이 좁은 마당에 차를 몰고 들어왔다가 휑하니 빠져나가는 이들 때문에 노부부가 불안에 떨기도 했다.
영화가 개봉한 다음 날부터 5년째, 영두 씨는 집과 외양간 사이 마련된 작업실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밀려드는 관광객을 맞고 있다. 하얀색 이동식 건물로 된 작업실 내부를 보니 영두 씨가 그린 아버지 초상화와 최 할아버지를 찍은 한 작가의 사진들로 빼곡했다. 집 처마에는 죽은 소가 달고 다니던 워낭이 ‘네 손은 내가 잡고 내 손은 네가 잡고’란 글귀와 함께 걸려 있었다.

40년 친구 누렁이 곁으로 간 최원균 할아버지 장남 영두 씨가 처음 털어놓은 ‘워낭 소리’ 그 후

1 최원균 할아버지 집 앞의 장승. 2 최 할아버지 집에 매달려 있는 워낭. 3 누렁이(1967~2008) 기념비. ‘평생 땅을 지키며 살아온 농부 최 노인이 30년을 부려온 소. 소의 수명은 보통 15년. 이 소의 나이는 무려 마흔 살까지 살다 갔다. 소와 인간의 교감과 진심이 빚어낸 울림은, 삶의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었던 소, 누렁이 여기에 잠들다’라고 씌어 있다.





40년 친구 누렁이 곁으로 간 최원균 할아버지 장남 영두 씨가 처음 털어놓은 ‘워낭 소리’ 그 후

1 할아버지를 먼저 보낸 섭섭함이 아직도 얼굴에 묻어나오는 이삼순 할머니와 장남 최영두 씨. 2 “내 죽으면 소 옆에 묻어달라”던 유언에 따라 할아버지의 무덤 아래 쪽에 소 무덤을 이장했다.



마당 안쪽에 있던 소박한 외양간은 2006년 영화 촬영 당시 폭우로 무너져 내려 대문 쪽으로 옮겨졌고 그 자리는 작은 원두막이 대신했다. 사람 나이로 중년이 됐을 영화 속 젊은 소는 찾을 수 없었다. 이젠 시골집과 외양간 곳곳에 묻혀 있을 기억을 끄집어낼 수밖에.
늙은 소가 죽고 나서도 할아버지는 일손을 놓지 않았다. 특히 폐암 진단을 받기 전까지 불편한 다리로 소 먹일 풀을 베기 위해 매일 산을 올랐다고 한다. 거북이 등처럼 딱딱한 손으로 쇠죽 끓일 나뭇가지를 모은 할아버지. 그 곁을 젊은 소가 딸랑딸랑 워낭 소리를 내면서 지켰다.
“매일 새벽 산에 나가 소 먹일 풀을 베고 땔감을 모으는 것만 해도 장정의 하루 일이에요. 몸도 불편하신데 그렇게 말려도 요지부동이라. 정말 이러다 안 되겠다 싶어 재작년에 소를 키우는 제 바로 아래 여동생네로 젊은 소를 보내버렸어요.”
‘구제역이 바로 앞 동네까지 왔다는데 우리 소까지 살처분당하면 어찌 할꼬….’ 전국적으로 구제역이 퍼진 2010년, 죽은 누렁이가 생각난다며 최 할아버지는 구제역 방역비로 봉화농업기술센터에 1백만원을 기탁했다. 마을에 구제역이 퍼지는 것을 막아달라는, 바람과 추위에 고생하는 공무원들을 위한 마음의 표시였다.
영화가 개봉되고 사람들의 관심이 커져 봉화에서도 상영됐지만 할아버지는 끝내 영화를 보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살아온 건 대단한 일도 아니고 당연한 것”이라며 군수와의 영화 관람을 끝내 거절했다고 한다. 행사 참여 요청도 많았지만 “일하러 가야 한다”며 마다했다. 일터로 갈 때 마주치는 마을 어귀의 자신과 누렁이 동상에도 스윽 눈길 한번 주곤 그만이었다.
영화에서 할아버지에게 늘 지청구를 늘어놓은 할머니는 영화를 보고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할아버지와 9남매를 탈 없이 키워낸 할머니는 따뜻했다. 연방 큰며느리가 깎아온 사과를 권하는 모습에서 촌로의 후덕한 인심을 느낄 수 있었다. 평생 할아버지만 바라보며 살아온 할머니는 촌철살인의 대사로 영화에 웃음을 더했다. 할머니의 어록은 싱싱했다.
낡은 라디오를 툭툭 두드리는 할아버지에게 “라디오도 고물, 영감도 고물”이라고 농을 던졌다. 무뚝뚝한 얼굴로 영정 사진을 찍는 할아버지에게 “웃어!”라고 소리쳐 웃겼다. 소가 쉴 동안에도 여물을 쑤는 일을 해야 하는 할머니는 가만있지 않았다.
“저 소가 없어야 내 팔자가 피지” “아이고 언제나 내 팔자가 피려나. 농사가 우예 되든지 맨날 소 꼴만 베고.”

40년 친구 누렁이 곁으로 간 최원균 할아버지 장남 영두 씨가 처음 털어놓은 ‘워낭 소리’ 그 후

최원균 할아버지의 영정 사진.



할아버지에 대한 섭섭함과 소를 향한 원망 같지만 할머니는 누구보다 이들의 관계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할머니의 한마디 한마디는 반어적 유머였다. 언젠가 폭우로 무너진 누렁이 무덤을 정성을 다해 손봐준 이도, 남편의 죽음을 누구보다 슬퍼한 이도 할머니였다.
영화가 흥행하면서 산정마을이 전국적인 명소가 됐지만 한동안 영두 씨를 포함한 9남매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했다. “자식이 아홉이나 되는데 어찌 부모를 저렇게 고생시킬까”라는 질책이 쏟아졌던 것.
식당을 운영하던 영두 씨의 막내 여동생은 영화 개봉 이후 단골손님들이 “불효자식 집에 오지 말자”며 발길을 끊어 결국 가게 문을 닫았다. 내세우진 않았어도 물심양면으로 부모를 모셨는데 억울하고 속상한 일이었다. 영두 씨는 평생 일밖에 안 하신 어른들 평소 사시는 대로 기록 테이프라도 하나 남았으면 해서 촬영을 허락한 것이라고 했다.
“저희를 아는 사람들도 그렇고, 이충열 감독도 자식들 진짜 모습은 다르다고 했지만…. 영화를 보면 아버지께서 소달구지 타고 병원에 가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실제 병원에 가신 것도 아닌데, 가신다고 해도 제가 차로 모시지, 달구지 타고 가시겠어요? 연출인데 그걸 오해하는 분들이 ‘천하에 불효자식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영화에서는 노부부와 소, 이들 간의 삼각관계가 집중적으로 다뤄져 있다. 관객 대다수는 할아버지와 늙은 소의 고락에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인터넷에는 팔십 노인들을 힘들게 살아가도록 내버려둔 자식들이라며 비방하는 글이 적잖이 올라왔다.

영화가 성공한 후 불효자식이 된 사연
사실 이 감독이 영화를 찍을 때는 자식들과 긴밀하게 협력했고, 이들이 나오는 장면도 적잖이 찍었다고 한다. 그러나 영상미가 강조되면서 편집 과정에서 대부분 삭제됐다. “아버지 힘든데, 늙은 소 팔아버려요” 하는 장면만 보면 자식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무심하게 내뱉는 말로 비춰진다.
“어머니께선 외지인들이 찾아오면 ‘오늘은 어떤 사람이 왔다’는 말씀을 꼭 하세요. 한번은 사진 찍는 사람들이 와서 사진 찍지 않겠다는 어머니에게 돈 만원을 던져줬다지 뭡니까? 도로 가져가라고 해도 던져놓고 가더래요. 그러곤 돌아가서 인터넷에 ‘사진 안 찍는다는 할머니가 돈을 주니 사진을 찍더라’는 내용의 글을 올린 거예요. 어찌나 화가 나던지.”
한사코 촬영을 마다한 할아버지를 하루 종일 따라다니며 지쳐 쓰러지게 해 가족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일도 있었다. 그래도 세상엔 인정을 나누는 사람이 더 많다. 할아버지를 대접한다며 직접 문어를 잡아온 경북 울진의 한 어부는 자신의 일인 양 한달음에 달려와 장례식을 함께한 고마운 사람이다. 경남에서 딸과 함께 찾아온 한 아주머니는 동네 이발관에 간 할아버지를 찾아 자신의 아버지처럼 살갑게 대하며 새삼 가족애를 북돋았다. 영두 씨는 아버지의 신성한 육체노동을 통해 성실한 삶의 가치가 대물림됐다고 했다.
“철없을 때는 방학이 겁이 났어요. 새벽부터 일터에 나가 소 먹일 거며, 땔감이며 실어오시는데 자식이 나 몰라라 할 수 없잖아요? 이래라저래라 하신 일도 없어요. 아버지는 평생 당신이 일한 대가로 자식들에게 밥을 먹였다는 가치를 몸소 보여주셨어요. 묵묵히 일하는 아버지를 곁에서 보고 돕다 보니 저희 남매들 모두 부지런해지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 부지런함이 이젠 저희를 지나 손주들에게도 대물림됐어요.”
영두 씨는 영화 ‘워낭 소리’ 이후 부모 집과 일터가 관광지가 됐지만 영화 상영관이나 전시장, 공원 조성 등 번듯하고 화려한 꾸밈새를 원치 않는다고 했다. 다만 아버지 유품을 정리해 담은 소박한 기념관을 만들어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가 지녔던 삶의 가치를 되새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1년에 한두 분이 찾아오시더라도 워낭 소리 집의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오래도록 보존할 것이고요. 아버지에게 약속한 대로 어머니 모시고 오래오래 살 겁니다.”
40년 친구 누렁이 곁으로 간 최원균 할아버지 장남 영두 씨가 처음 털어놓은 ‘워낭 소리’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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