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9년 만에 한국을 방문해 부산과 경기 지역에서 교사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다. 강연 후 이어진 솔직한 대화를 통해 한국 교사들이 얼마나 열정을 갖고 있는지와 함께 그들의 고충도 엿볼 수 있었다.
한국 교사들의 가장 큰 고민은 교실에서의 학생 지도에 관한 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학생이 교실에서 잠을 자도 대처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좋은 소리로 깨워도 듣는 둥 마는 둥이고 자칫하면 반항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수업 끝나고 교무실로 와!”라고 말해도 학생이 오지 않으면 별다른 대책이 없다. 심지어 학부모에게 연락을 하면 “학원에서 늦게까지 공부해 피곤해서 그러는 것이니 깨우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교사가 교실을 장악하고 집중력 있게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일부 학교에서는 벌점제와 상점제를 시행해 효과를 봤다고 하지만 상·벌점제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진학을 포기한 학생들에게 벌점은 숫자에 불과할 뿐이고, 그런 학생이 두세 명만 있으면 교사가 수업 분위기를 다잡기 쉽지 않다. 이런 현상은 특히 ‘체벌 금지’ 이후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사실 그동안은 물리적 혹은 언어적 수단을 동원해 수업 분위기를 잡아나가는 것이 한국 학교의 전통적인 교육 방법이었기 때문에, 갑자기 주어진 ‘체벌 금지’에 교사들과 학생들이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국 교실에 가보면 수업 태도가 불량하거나 교사에게 대드는 학생이 거의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 교사에게는 한국 교사에게 없는 회초리가 손에 쥐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회초리는 체벌은 아니지만 학생들에겐 의무와 책임을 강조하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디텐션(정학보다 낮은 처벌로 방과 후 학교에 남기)을 알리는 안내문. 디텐션을 받은 학생은 전문교사가 있는 디텐션 룸에 가서 주어진 시간만큼 있다 귀가해야 한다.
체벌보다 더 강력한 무기
1) 낙제권 학점을 따야 졸업할 수 있는 미국의 중·고등학교 시스템에서 학점은 교사의 재량이다. 낙제를 하면 졸업을 못 하고, 방학 동안 재수강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2) 어드밴스드 클래스 추천권 우수한 학생들에게 AP(Advanced Class) 과목을 추천하는 것은 교사의 권리다. 명문대학 진학의 중요한 요소인 어드밴스트 클래스를 수강하려면 반드시 지난번 학기 학과목 교사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 당연히 학생은 수업 태도에 신경 쓰게 된다.
3) 딘 소환권 문제 학생이 수업 분위기를 망치는 경우, 교사는 교실에 있는 구내전화를 통해 ‘딘(Dean·생활지도주임)’을 불러서 학생을 인계하고 수업에서 제외시킨다. 교사의 책임은 말썽꾸러기를 교화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카운슬러 진단 요청권 학생의 이상 행동이 정신적·육체적 혹은 가정적 문제와 상관 있다고 생각되는 경우 교사는 교내 혹은 교외 전문가에게 진단을 요청할 수 있다. 그 결과에 따라 학생은 특수 교육이나 정신과 전문의의 상담을 받을 수도 있다.
5) 정학 요청권 학생이 반복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경우, 딘을 통해 교장에게 학생의 정학을 요청할 수 있다. 정학을 당한 학생은 교내 정학실로 등교해 교사가 내준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6) 클래스 교체 요청권 정학 이후에도 문제 행동이 계속돼 교사의 지도 한계를 넘었다고 판단되면, 교사는 학교 측에 학생의 반(Class)을 바꿔줄 것을 요청할 수 있다. 이것은 학생에게도 새로운 교사와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7) 전근 요청권 학생으로부터 육체적 위협을 당했을 경우, 교사는 전근을 요청할 수 있다. 이때 교사는 교육위원회에서 배치하는 학교로 전근된다. (일반적으로 미국 교사는 전근 없이 평생 한 학교에서 근무한다.)
8) 운동부 가입 및 경기 출전 제한권 교사는 문제 학생이나 학업 부진 학생의 운동부 가입과 출전을 제한할 수 있다. 운동부에 가입하거나 출전하려는 모든 학생은 교사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9) 워크 퍼밋(Work Permit) 거부권 14세 이상 학생은 주당 20시간 이하로 일을 하고 돈을 벌 수 있다. 단 미성년자인 학생은 학교의 승인이 필요하고, 학교는 과목별 교사의 ‘일이 수업에 지장이 없음’을 확인받아야 한다.
김숭운 씨가 경기도 교육연구원 주최로 열린 교사 대상 강연에서 교수법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10) 시스템 사용권 학생의 비행 정도가 지나치거나 교내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학생의 지도가 어렵다고 판단될 경우, 교육위원회의 직접적인 개입에 의한 전학이나 교육감 정학 등의 조치를 요구할 수 있다.
아무런 무기도 없이 그저 인격과 덕으로만 교실에서 말썽꾸러기들과 마주치고 교육을 해야 하는 한국 교사들을 보면 그 능력이 슈퍼맨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제도적 미비로 인해 혹시라도 학생 지도를 포기하는 교사가 생겨나지 않을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미국식 제도가 항상 옳은 게 아니고 한국에서 도입하기에 어려운 면도 있지만, 우리나라 교사들에게도 일정 부분 회초리를 쥐어주는 제도적 정비가 필요한 시점이 된 것 같다.
김숭운 씨는…
뉴욕 시 공립 고등학교 교사이자 Pace University 겸임교수. 원래 우주공학 연구원이었으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좋아 전직했다. ‘미국에서도 고3은 힘들다’ ‘미국교사를 보면 미국교육이 보인다’ 두 권의 책을 썼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