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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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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대통령 시대 정말 유리천장이 깨진 걸까?

글·김영희 전 주세르비아 대사

2013. 06. 04

세계 여성의 날인 3월 8일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유리천장지수(Glass-Ceiling Index)’에 의하면 한국은 조사 대상 26개 국가 중 최하위다. 25위를 차지한 일본과도 무려 20점 차이가 나는 1백 점 만점에 15점짜리 꼴찌다. 뉴질랜드를 선두로 노르웨이, 스웨덴 등의 순서인 나머지 국가들의 평균 지수는 65점이다. 한국 여성의 고위직 진출과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최하위이고 남녀 간 임금 격차도 OECD 국가 중 가장 크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의 경제발전과 함께 여성의 사회활동이 확대되면서 이제 여성이 직업을 갖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직장 생활을 하는 여성들이 매일 가정과 사회에서 부딪치는 현실은 여전히 선진국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한 나라는 아무리 국민소득이 높아져도 국제사회에서 선진국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40여 년 전 직장 생활을 시작했던 나는 여성의 사회 진출에 대한 심한 편견과 높은 제도적 장벽을 직접 경험했다. 가정형편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을 못한 나는 1969년 서울시 중구청에서 9급 공무원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모든 임용시험에 ‘군복무 가산점’ 30점(과목당 5점)이 주어져 여성의 정규직 취업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다. 대학을 나와 취직해도 결혼 전에 잠깐 거치는 사회 경험으로 여기던 때라 결혼과 동시에 퇴직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만약 임신한 여성이 직장 생활을 계속하려 하면 이는 남편의 ‘무능’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퇴직을 종용받던 시절이었다.

선배는 끌어주고 동기는 정보 주고 후배는 밀어준다는 조직의 논리
세월이 한참 흘러 독일 통일 직후인 1991년 내가 외교부에 독일 전문가로 특별 채용돼 독일 담당 서기관으로 근무를 시작했을 때도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여전했다. 독일 담당 서기관의 주요 업무는 정무인데 여성이 어떻게 정치관계 일을 할 수 있느냐며 나의 업무 배치에 대한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그때까지 외교부에서는 그나마 소수의 여성 외교관들에게 문화나 영사 업무를 맡기는 게 관행이었다. 더욱이 나는 외무고시가 아닌 전문가 특별 채용으로 입부한 터라 선배도 동기도 후배도 없었다. 우리나라의 직장 생활에서는 ‘선배는 끌어주고, 동기는 정보 주고, 후배는 밀어준다’고 한다. 비주류였던 나는 외교관 생활에서 우리사회에 만연한 학연, 지연의 높은 벽을 충분히 실감했다.
이제 외무고시는 물론 여러 분야의 임용시험에서 여성 합격자의 비율이 남성을 능가하고 수석 합격자도 대부분 여성인 경우가 더 많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 여성의 진출이 양적으로는 많이 늘었지만 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가로막는 조직 내의 보이지 않는 장벽 ‘유리천장’은 사회 모든 분야에 여전히 견고히 존재한다. 여러 가지 관습적·제도적 문제가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여성이 가정과 직업을 병행하는 데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육아에 대한 제도적 지원이 절대 부족하고 가사와 자녀 교육은 거의 여성의 몫이다. 직장 여성들은 육체적·정신적인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마치 ‘전쟁’을 치르듯 생활한다. 자녀가 학교에 입학하면 아이의 뒷바라지를 위해 직장을 그만둘까 고민하는 여성들이 상당히 많다. 또한 남성 위주의 직장 문화는 여성의 커리어를 가로막는 장벽이다. 선후배 관계로 똘똘 뭉친 남성에 비해 여성은 끌어주고 밀어주는 조직력이 약하다. 직장 밖에서 정보 교류와 협력 관계를 강화하는 회식 문화에 여성은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성이 능력을 키우고 성장할 수 있는 사회적·제도적 장치가 절대 부족하다.

맞춤형 육아 지원에서 여성 할당제까지
남녀평등은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어느 사회든 지금까지 누렸던 기득권을 자발적으로 내려놓는 곳은 없다. 여성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상당 기간 제도적인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 시행착오를 거치며 앞서나간 선진국의 사례에서, 특히 남녀평등을 실현한 북유럽의 각종 사회적 제도에서 많은 시사점을 찾아볼 수 있다.
그곳엔 가정과 직장 생활을 병행할 수 있는 맞춤형 육아 지원 제도가 있고, 직장의 파트타임 제도도 다양하다. 독일에선 주당 40시간 근무 시간을 1/2, 2/3, 3/5 근무로 조정할 수 있는데, 어린아이가 있는 직장여성의 70% 정도는 파트타임 근무를 한다. 관공서와 기업에는 직원 아이들을 돌보는 육아 시설도 있다. 출산과 육아휴직 후 재취업이 보장되고, 업무 능력에서 낙오되지 않도록 재취업 전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출퇴근 시간이 보장되고, 근무 후 비생산적인 외식 문화가 없다. 직원이 1백 명 이상인 독일의 모든 기업과 관공서는 ‘여성 담당관’을 의무적으로 두어야 한다. 여성 담당관은 여성이 승진에서 차별당하거나 직장 내 성희롱 등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여성 직원에 관한 업무를 전담한다.
이 모든 제도가 하루아침에 정착된 것은 물론 아니다. 독일에서는 1980년대부터 고위직에 대한 여성 할당제 토론이 시작돼 하원의원 후보 공천부터 정당에 따라 30~50%의 여성할당제가 점차 도입됐다. 그 후 여성 할당제는 각료 인선에 도입되고 기업의 임원 승진으로도 확대돼, 이제는 여성의 고위직 비율을 높이기 위한 의무적인 여성 할당제가 필요 없게 됐다. 현재 스웨덴의 국회의원 중 여성은 44.7%, 노르웨이 38.7%, 네덜란드 38.7%, 독일 32.9%인 반면, 우리나라는 16%다. 유럽에서는 양성평등 내각이 보통이나, 우리나라는 현재 각료 중 여성이 겨우 두 명이다. 국가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토론이나 회의석상에서 여성이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1990년대 말 독일 정당 중 마지막으로 집권 보수정당인 기민당(CDU)이 여성 할당제 도입을 추진할 때의 일이다. 추진 토론에서 능력이 부족한 여성들이 할당제에 따라 고위직에 오를 것이라는 남성들의 우려에 대해 당시 여성 하원의장의 대응이 인상적이었다.
“능력으로만 결정된다면 모든 고위직의 50% 이상은 여성의 몫이 될 것이므로 30% 여성 할당제 도입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지난 2008년 말 ‘나영이 사건’이 발생해 나라가 떠들썩했다. 처참한 성폭행으로 장기가 파열되고 배변주머니를 단채 의자에 앉지도 못하는 8세 여자아이를 검찰이 네 차례나 불러 같은 진술을 되풀이하게 하고, 범인이 음주 상태였다는 점이 고려돼 형량이 감소됐다는 기사를 보며 나는 분노했다. 만약 담당 검사나 판사, 또 그러한 법을 만든 사람들이 여성이었어도 똑같은 상황이었을까 자문했다. 그러한 범죄에 12년이라는 형량은 선진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낮은 형량이다.
남성과 여성은 사물을 보는 시각이 다르다. 집안의 중요한 일을 부부가 함께 결정해야 하듯 집 밖의 일도 마찬가지다. 사회 모든 분야의 정책 결정 과정에 남녀가 공동으로 참여해야만 국민의 삶과 직결된 올바른 결정이 내려진다. ‘유리천장’이 깨져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유리천장’을 깨려면 강력한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21세기는 ‘여성의 세기’라고 한다. 여성의 능력이 사장되는 것은 국력의 손실이다. 여성이 행복해야 가족이 행복하고 사회와 나라가 발전한다.

여성 대통령 시대 정말 유리천장이 깨진 걸까?


김영희 전 대사는…
전주에서 6남3녀의 막내로 태어나 전주여고를 졸업하고 서울시 9급 공무원으로 일하다 1972년 파독 간호보조원으로 독일로 건너갔다. 3년간 정형외과 병동에서 일한 후 공부를 계속해 쾰른대학에서 교육학 석사와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쾰른대학 6백년 역사에서 최초로 ‘전공 과목을 강의한 외국인 여성’이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독일 통일 직후 1991년 외무부에 특별채용돼 주독일 한국대사관에서 1등 서기관부터 공사까지 역임한 뒤 2005년 세르비아 대사로 임명돼 대한민국 세 번째 여성 대사가 됐다. 공직 생활에서 은퇴한 후 한국과 미국, 독일을 오가며 학술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20대, 세계무대에 너를 세워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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