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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With specialist | 아이 받는 여의사의 진료실 토크

다국적 분만실 풍경

글·이용주 | 사진제공·REX

입력 2013.05.06 14:35:00

너무 조용하게 잘 참다 혼자 아이를 쑥 낳고 가는 일본인, 온갖 질문을 해대서 의사의 진을 빼는 서양인, 온 가족이 몰려와 떠들썩하게 축하하는 중국인, 산통에 비명을 지르다 입으로 힘을 빼는 한국인.
요즘 분만실 풍경도 다국적이다.
다국적 분만실 풍경


‘지구는 한가족’이 된 요즘, 산부인과 진료실에서도 다양한 인종의 환자들을 만나게 된다. 러시아, 몽골, 일본, 중국, 동남아, 미국, 유럽 등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의 실속 있는 진료를 받으러 오기 때문에 이제 외국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신기할 것도 없다. 오히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진찰하고 아이를 받다 보면 나라마다 문화가 이렇게 다르구나 싶을 때가 있다.
제일 조용하게 아이를 낳고 가는 사람은 일본인. 평소 산전 진료 때 궁금한 게 없냐고 물으면 그냥 ‘네~ 네~’ 하고 정중히 대답하며, 진통이 시작돼 입원한 뒤 소리 한 번 안 지르고 입술 꽉 깨문 채 잘 참는다. 내진이나 분만하는 동안 남편은 밖에서 기다리고 산모 혼자 잘 버틴다. 웬만해서는 무통분만을 원치 않고, 겉으론 작고 약해 보여도 결정적인 순간 힘을 잘 줘서 아이를 쑥 낳는다. 마치 아이 낳는 다부진 여자 사무라이를 보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분만 후 입원실 안이 썰렁하다고 느낄 만큼 온도를 낮추고 갓난아이를 꽁꽁 싸매지 않고 시원하게 입힌다. 한겨울에도 노란 모자에 등가방 지고 맨다리에 반바지 입고 등원하는 일본 유치원생들의 모습이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게 아니다.
흔히 서양인으로 뭉뚱그려 말하는 미국, 호주, 유럽에서 온 임신부는 평균 한국인보다 진찰 시간이 3배 이상 걸린다. 물론 익숙지 않은 영어로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나 무엇이든 물어보고 본인이 완벽히 이해해야 받아들이는 그들의 문화가 한몫을 한다. 의료수가가 높은 외국에서는 이런 식으로 하루 종일 20명 미만을 진료해도 병원이 유지되겠지만, 1시간에 10명씩 진료해야 하는 한국의 상황에서는 이런 임신부들은 난감하다. 진료실 대기 리스트에 서양인 이름이 오르면 의사는 심호흡부터 한다.
서양인들은 분만 시 요구사항이 워낙 많아서 모든 걸 다 만족시켜주려면 의료진은 진이 빠지지만, 대부분 한국인보다 골반 조건이 좋아서 아기를 쉽게 낳는다. 건강히 아기가 태어나면 그때부턴 “오 마이 갓, 허니, 스위티, 베이비” 등등 온갖 좋은 단어를 연발하며 분만의에게 무한한 “땡큐”를 표현한다. 병실을 리본과 풍선으로 장식해 아기의 생일 축하 파티장처럼 꾸며놓고 이벤트를 벌이는데 저러다 폭죽을 터뜨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될 만큼 흥분한 가족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퇴원할 때는 반드시 주치의와 사진을 찍고 본국으로 돌아가서도 이메일로 아이 돌 사진을 보내준다.
중국인 산모는 가족들이 떼로 몰려온다. 진통 중 대기실에 1인 면회 제한을 해도 10분마다 온 식구가 돌아가며 가운을 갈아입고 들어와 시끄럽게 산모를 독려한다. 응급수술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면 수술실 앞 복도는 모여든 가족들로 떠나갈 듯하다. 그러다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정말 화끈하게 축하를 한다. 아이가 신생아실로 옮겨지는 도중 가족들에게 붙잡혀서 한참 축복의 말을 듣고, 분만 후 회진 시 많은 방문객들을 감당할 수 없어 의사가 병실 문만 빼꼼히 열었다 그냥 오기도 한다.
이제 한국인 차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게 문제다. 특히 사극에서 천장에 매달린 무명줄을 붙잡고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는 장면들이 뇌리에 박혀서인지 다들 그렇게 소리를 질러야 아기를 낳는 줄 안다. 아래로 힘을 줘야 하는데 악을 쓰며 얼굴에 힘을 주다 보니 얼굴과 눈 흰자위까지 핏줄이 터져 빨갛게 멍들고 목이 쉰다. 가족분만실에서 나오는 무시무시한 비명 소리는 그 옆 대기실에서 진통이 오기를 기다리는 산모의 전의를 상실케 해 무조건 제왕절개 수술을 해달라고 요청하게 만든다.
어쨌든 어렵게 낳은 아기에 가장 애착을 보이는 사람도 한국 엄마들이다. 산후조리를 잘해야 한다는 주입식 교육에 양치질, 세수, 머리 감기를 모두 생략하고 젖 물리기 사투에 들어간다. 모유 수유를 못하면 좋은 엄마가 아니라고 자책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문제다. 가끔 분유 수유를 하면서 죄책감을 느낀다는 산모도 있는데 마치 100% ‘완모’가 되기 위한 투쟁을 벌이는 것 같다.
사실 각각 생긴 모습이 다른 것처럼 골반 및 신체 조직, 건강 상태, 회복력이 다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산모 스타일이 바람직한지 정답은 없다. 다만 20년 분만 현장을 지켜온 경험에 따르면 어느 한 가지 스타일을 신봉하지 말고 상황에 맞게 의료진에 조언을 구해 판단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 스타일을 경험해보려면 적어도 2명 이상 낳아야 하지 않을까?

다국적 분만실 풍경


이용주 아란태산부인과 소아과의원 원장은…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산부인과 전문의 과정을 마친 후 15년째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고 있는 직장맘이다. 지금은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서 밤낮으로 새 생명을 받으며, 올바른 산부인과 지식 알리기에 앞장서고 있다.



여성동아 2013년 5월 5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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