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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토커’ 박찬욱 감독 첫 할리우드 도전기

글·권이지 기자 |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입력 2013.04.16 15:16:00

박찬욱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인 ‘스토커’에 대한 국내외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 국내에서는 화제를 불러일으켰으나 관객 동원에는 실패했다. 이와 반대로 미국에서는 초기보다 상영관 수가 늘고 있으며 “역시, 박찬욱!”이란 평가를 듣는다. 이슈메이커 박찬욱의 첫 할리우드 도전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영화 ‘스토커’ 박찬욱 감독 첫 할리우드 도전기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박쥐’ 등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박찬욱(50) 감독. 하지만 그 특유의 잔인하고 자극적인 장면 때문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해외에서 더 인기 많은 그가 드디어 세계 영화의 심장부 할리우드에 진출해 2월 말 영화 ‘스토커’를 선보였다. ‘스토커’는 18세 생일날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빠를 잃은 소녀 인디아 앞에 존재조차 몰랐던 삼촌 찰리(매튜 구드)가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스토커’는 박찬욱 감독의 첫 번째 할리우드 프로젝트로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제인 에어’에서 주연을 맡으며 주목받은 신예 미아 바시코브스카(23)가 인디아 역으로, 니콜 키드먼(46)이 인디아의 엄마 이블린 역으로 합류했다. 인기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에서 주연을 맡아 우리에게는 ‘석호필’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웬트워스 밀러가 각본을 썼다. 참여한 인물만 봐도 블록버스터급이다.
3월 12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열린 영화 ‘스토커’ 관객과의 대화에서 만난 박찬욱 감독은 “영화 제작하고 나면 특별한 이유가 아니고서야 그 영화를 다시 안 보는데, 이번 영화는 어쩌다 보니 4번이나 봤다”고 너스레를 떨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자막 없이 볼 때는 고생 많았는데, 한글 자막으로 보니 내용을 아는데도 쏙쏙 들어오네요(웃음).”

할리우드 진출은 ‘올드보이’와 ‘박쥐’ 덕분
박찬욱의 첫 할리우드 진출작이라는 타이틀에 비해 한국에서의 흥행 성적은 다소 아쉽다. 2월 28일 개봉한 이후 3월 17일까지 관람한 관객이 약 40만 명이 채 안 된다. ‘7번방의 선물’이 1천2백만 명, ‘베를린’이 7백만 명 관객을 넘어선 것과 비교하면 더 초라한 성적이다. “원래도 나는 흥행 감독은 아니지 않았느냐”는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미국에서는 개봉 첫날인 3월 1일 7개관이었던 상영관이 3주 차에 들어서자 호평 속에 94개관으로 늘어났다.
‘올드보이’로 많은 해외 제작사들에게 러브콜을 받았던 박찬욱은 2009년 ‘박쥐’를 출품한 베를린 영화제에서 미국 영화제작사 ‘폭스 서치라이트’ 간부들과 만났다. 그들은 박찬욱 감독에게 영화 스타일과 취향을 꼼꼼하게 물었고, 2011년에 ‘스토커’ 각본을 보여주며 함께 작업할 것을 제안했다. 맨땅에 헤딩은 아닌 셈. 폭스 서치라이트는 ‘20세기 폭스’의 자회사로 모회사가 대형 블록버스터를 제작하는 것과 달리 소자본의 영화를 주로 만든다. ‘원스’ ‘슬럼독 밀리어네어’ ‘블랙스완’ 등이 이들의 대표작이다.

영화 ‘스토커’ 박찬욱 감독 첫 할리우드 도전기

박찬욱 감독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 주연배우 미아 바시코브스카. 실제로는 니콜 키드먼처럼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그는 영화 속에서는 갈색 긴 머리 가발과 컬러렌즈를 착용했다.



할리우드 스태프하고만 작업했다고? No!
미국 내 영화제작사 스태프들이 주가 됐지만, ‘올드보이’에서부터 함께한 정정훈 촬영감독이 그의 곁을 든든히 지켰다. 영화 속에는 인디아가 엄마의 금발을 빗질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어느새 화면을 가득 메우는 황량한 수풀로 바뀐다. 영화를 보면 장면이 전환되는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한국 CG팀의 힘이다. 이들은 미국의 촬영 현장을 방문해 작업했다. 촬영에 알맞은 장소를 찾지 못한 스태프들은 직접 수풀을 만들었다는 후문이다. 박 감독은 “우리나라의 영화 기술도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제목 ‘스토커’는 해석하기 나름
제목을 보고 스토커가 등장하는 영화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오해다. 주인공 인디아의 성이 스토커다. 박찬욱 감독은 “내가 지은 제목은 아니고 웬트워스 밀러가 쓴 원작의 제목을 그대로 살렸다. 주인공의 성이기도 하다. 다른 의미로는 불을 지핀다는 뜻의 영어 단어 ‘스토크(stoke)’가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이블린 역의 니콜 키드먼이 죽은 남편의 물건을 태우는 장면도 등장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드라큘라’를 쓴 작가 브람 스토커의 이름과도 같다. 뱀파이어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인디아와 찰리는 뱀파이어처럼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영화 ‘스토커’ 박찬욱 감독 첫 할리우드 도전기

영화 ‘스토커’ 속 장면. 스토커라는 성을 쓰는 세 사람, 인디아, 이블린, 찰리 사이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도 볼만하다. 엄마지만 딸을 질투하는 이블린, 엄마의 손길이 닿는 것조차 거부하는 인디아. 찰리는 두 사람 사이에 갑작스럽게 등장해 가족 관계를 재정의한다. 추천 장면은 찰리와 인디아의 피아노 듀엣 신. 피아노를 칠 줄 모르던 미아는 2개월 만에 놀라운 연주 실력을 갖추게 됐다. 이 장면은 절제된 관능미를 보여준다.



유혈보다 감각의 스릴러
박찬욱 감독은 ‘스토커’를 연출하면서 잔인한 장면을 덜고, 감각의 자극에서 오는 스릴에 집중했다고 밝혔다. 유혈이 낭자하는 자극적인 장면의 비중은 높지 않은 편. 그의 전작이 ‘직접적인 행동’을 보여줬다면, 이번 작품은 ‘상징적인 행동’을 보여준다. 장면마다 나오는 은근한 노출이 사람들의 상상력을 깊이 자극한다.

초 단위로 일하는 촬영 시스템에 진땀
박찬욱 감독은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촬영하며 한국과는 다른 제작 시스템 때문에 애를 먹었다고 털어놓았다. “현장이 너무 바쁘다. 한국 회차의 절반밖에 안 되는 40회 차만에 전체를 찍어야 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초 단위로 진땀 빼며 촬영한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작품 세계를 존중해준 것, 오히려 촬영 현장 스케줄이 타이트해 사전 작업을 더욱 철저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장점으로 꼽았다.

대사, 소품, 동선, 음악까지 버릴 것 없는 영화
박찬욱식 영화는 보고 나면 입맛이 쓰다. 하지만 곱씹게 되는 매력이 있다. 그의 장면 연출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은 몇 년 전 한 인터뷰에서 “배우는 타고나지만 감독은 노력하면 될 수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의 영화 속 영상미를 보면 노력만으로 과연 이뤄질까라는 의문이 든다. 철저하게 계산된 화면과 이를 구성하는 소품, 등장인물의 움직임 그리고 대사와 영화를 뒤덮는 음악까지 어느 하나 빼놓고 보기에는 아쉬운 면면이 많기 때문이다.

카메라에 찍히는 모든 장면은 계산된 결과
연극이나 영화에서 많이 사용되는 용어인 미장센. 원래는 ‘무대에 배치하다’라는 뜻을 지닌 이 말은 영화에서 ‘카메라에 찍히는 모든 장면을 사전에 계획하고, 밑그림을 그리는 법’이란 말로 설명할 수 있다. 감독이 화면 속에 주제를 드러내도록 준비하는 작업이라고 보면 된다. 박찬욱 감독은 “미장센을 철저히 고려해 찍어야 한다. 기초적인 작업을 하지 않으면 결코 그 장면을 찍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관객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을 담기 위해 그는 카메라의 배치와 동선까지 철저히 계산한다.

열려 있지만 닫힌 공간인 스토커가 저택
‘스토커’의 메인 무대는 스토커가의 저택이다. 아름다운 엄마와 딸이 머무는 이곳은 너른 평지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박 감독과 제작진은 스토커 저택의 콘셉트를 새장으로 잡고 장소 선택에 참고했다. 미국 테네시 주 내슈빌에 있는 집 80여 채를 살펴본 끝에 영화 속 집을 낙점했는데 이 저택은 1920년대에 세워졌다고 한다. 박찬욱 감독은 “집 속의 계단이 아름다워서 선택했다. 다만 집이 생각보다 좁아서 촬영 동선을 다시 짜게 됐다. 방에 바른 벽지에도 등장인물의 성격을 투영했다”라고 설명했다.

영화의 화룡점정 에밀리 웰스의 주제곡
영화를 본 뒤 영화관을 나서면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에밀리 웰스의 ‘Becomes the color’라는 곡이 귀에 맴돈다. 영화 ‘스토커’를 관통하는 주제곡이다. 뮤직 에디터인 테드 케플란이 찾아낸 신예 아티스트다. 그의 추천을 받은 박찬욱 감독이 함께 에밀리 웰스의 공연장으로 갔는데 홀로 여러 악기를 연주해서 음악을 만드는 1인 밴드인 점도 놀라웠지만 허스키한 보이스가 일품이었다고 한다. 박 감독은 에밀리 웰스의 음악을 듣고 “숨어 있던 실력자라 깜짝 놀랐고, 영화를 본 뒤 자신만의 색을 덧입혀 주제곡을 불렀는데, 그 또한 영화와 완벽하게 맞아들었다”라고 평가했다.

박찬욱 영화 여인천하가 되다

영화 ‘스토커’ 박찬욱 감독 첫 할리우드 도전기


박찬욱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의 비중을 높여가고 있다. 초창기 작품인 ‘복수는 나의 것’이 100% 남성 영화라면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이영애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영화 ‘박쥐’에 대해서도 “전작보다 더 여성스러운 분위기가 풍긴다”고 말한 바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성성에 매료된다는 것이다. 그는 “아내와 결혼 생활을 하고, 인디아와 같은 나이의 딸을 키우며 자연스럽게 여성에 집중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래서일까. 영화 ‘스토커’는 ‘여인천하’다. 주요 인물은 거의 여자. 주인공인 인디아, 인디아의 엄마 이블린, 가정부와 인디아의 고모할머니가 등장한다. 남자 배우보다 여자 배우가 더 많은 만큼 이에 대한 에피소드도 적잖다.

두 여배우 사이에 낀 매튜 구드 ‘살려줘’
‘스토커’의 캐스팅에서 심혈을 기울인 것이 남자 주연 배우다. 박찬욱 감독은 “엉클 찰리를 캐스팅할 때 가장 신경 쓴 것은 남성적 매력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매튜 구드와 함께하게 됐다. 미아와 니콜, 매튜와 촬영하다 보니 꼭 여배우 셋과 영화를 찍는 느낌이었다”라며 웃었다. 실제로 스타일리시하고 남다른 매력을 지닌 매튜 구드는 억세기로 소문난 호주 출신 미아 바시코브스카와 니콜 키드먼의 등쌀에 못 견뎌 했다는 후문이다.

깐깐한 니콜 키드먼의 박찬욱 예찬
이블린 역의 니콜 키드먼은 “박찬욱 감독과의 작업이 매우 즐거웠다. 그는 영화감독들 중에도 특히 존경받는 사람이다. 나는 독특한 감성을 표현해내는 감독들과의 작업을 좋아해 이 기회를 기꺼이 잡고 싶었다.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감독과 함께하는 것은 배우로서 최고의 행복이다”라고 말했다. 작업 할수록 박찬욱의 매력에 푹 빠졌다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3월 초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니콜 키드먼과의 일화를 소개했다. 2012년 선댄스영화제에서 첫 프리미어 상영을 마친 뒤 니콜 키드먼은 미국인들이 자꾸 박찬욱 감독과 히치콕을 비교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감독은 누군가 다른 선배 감독의 영향이나 참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기 세계를 가진 사람이다. 그런 이야기 그만 해라.”

박찬욱 영화라면 무조건 하겠다는 미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제인 에어’ 등에 주연으로 출연, 주가를 톡톡히 높이는 중인 호주 출신의 배우 미아 바시코브스카는 내한 후 가진 공동 인터뷰에서 “박찬욱 감독은 원하는 게 분명하다. 그것을 설명하고 지시한다. 이를 듣고 연구를 해서 연기했다. 그 덕에 항상 편하게 일했다”고 밝혔다. 그는 “유머러스할 뿐 아니라 어떤 사물을 봤을 때 위트가 넘치는 편”이라고 촬영장 속 박 감독을 설명했다. 그는 박 감독과 한 번 더 영화를 만들고 싶으냐는 질문에 단호히 “다시 작업할 의사가 있다. 무조건”이라고 답했다. 감독과의 믿음이 굳건히 자리 잡았다는 증거다.

2013년의 할리우드는 한국 감독의 전성시대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김지운 감독이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함께 ‘라스트 스탠드’를 찍었고, 박찬욱 감독이 ‘스토커’를 내놓았다. 조만간 ‘괴물’의 봉준호 감독이 ‘설국열차’를 선보일 예정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각기 개성 있는 감독들의 오랜 노력이 해외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한국에서의 평가는 인색한 편이라 다소 아쉽다. 그래도 낙담하기는 이르다. 박찬욱 감독은 ‘스토커’ 이후 할리우드의 다른 제작사로부터 잇달아 러브콜을 받고 있다.
영화 ‘색, 계’를 연출하고, ‘라이프 오브 파이’로 2013 미국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이안 감독과 ‘적벽대전’ 시리즈를 연출한 오우삼 감독 정도가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아시아계 감독으로 꼽힌다. 할리우드가 미국 내가 아닌 해외 영화계의 감독에 눈독 들이고 있는 지금, 박찬욱 감독의 차기작이 얼마나 성과를 거둘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는 과정이 되지 않을까.

여성동아 2013년 4월 5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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