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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얼굴’ 민해경이 왔다

데뷔 35주년 맞은 전설의 원조 섹시 디바

글·진혜린 | 사진·지호영 기자, 민해경 제공

입력 2013.04.16 10:59:00

왕년의 스타에게는 과거가 영광이고 현재는 과거를 추억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현재를 물어봐도 결국에는 영광의 기억을 더듬는 답변만 돌아오기 때문이다.
요즘 그런 걸 ‘추억 팔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10년 만에 앨범을 낸 민해경에게는 ‘추억 팔기’가 없었다. 추억이라서 한없이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예전의 화려함이 없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 얼굴’ 민해경이 왔다


“아직도 항상 그때 같아요.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웃음), 나는 아직도 20대라고 생각해요.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걸 실감 못하는 거죠. 가끔 사람들이 ‘그때가 그립지 않아?’라고 물어보면 오히려 그 시절에 미련을 가져야 하는 건가, 의아할 때가 있어요.”
TV만 틀면 그가 나오고, 라디오만 틀어도 그의 노래가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벌써 30년이 지난 지금도 제목만 들으면 머릿속에서 노래가 자동 재생될 만큼 유명했던 히트곡의 주인공이다. ‘보고 싶은 얼굴’ ‘그대 모습은 장미’를 부르던 그의 모습도 마치 캡처 화면처럼 뇌리에 남아 있다.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춤을 추며 내던지듯 노래를 부르던 민해경(51)의 모습 말이다.
“지금은 부르면 부를수록 어렵던데, 그땐 막 불러도 작품이었죠(웃음). 당시에 어떤 평론가가 ‘금속성의 목소리로 신경질적으로 노래를 부른다’고 평했던 기억이 있어요. 마치 생각 없이 툭툭 내뱉는 것이 제 노래의 특징이죠. 많은 감성을 노래에 싣고 폭발하듯이 부르는 노래만 좋은 게 아니에요. 저는 절제하는 것이 더 좋거든요.”
스타의 탄생은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울타리 안에서 강한 개성이 표출될 때 가능한 일이다. 그 강렬한 개성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그가 돌연 활동을 중단했을 때, 마치 그가 증발한 것 같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만큼 그의 공백은 컸다.
결혼과 함께 미련 없이 가요계를 떠났던 그는 잊힐 만하면 한 번씩 앨범도 내고 무대에도 서면서 우리를 찾아왔다. 그때마다 ‘왕년’의 영향력을 재현하지는 못했지만 그 자신은 화려했던 ‘왕년’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노래는 전쟁이었고 투쟁이었다”며 옛 기억을 떠올리는 그는 “이제야 비로소 노래 부르는 기쁨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민해경은 10여 년 동안 그를 기다리던 팬들의 간절한 바람으로 17집을 내놓으며 다시 또 새로운 추억 만들기를 시작하고 있다.

돌아보면 화려하지만 투쟁 같았던 시간
앨범을 내게 된 이유를 묻자 경쾌한 목소리로 “남편을 잘 만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가수들이 흔히 말하는 ‘팬들의 사랑에 보답’하고 ‘음악에 대한 열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하지 않아 재미는 있었지만 그 이유가 궁금했다.
“내가 하고 싶을 때 노래하고 하기 싫을 땐 ‘그래 접자’ 했어요. 남편이 늘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그랬거든요. 그런 말이 참 든든해요(웃음). 어떻게 보면 무책임한 것일 수도 있는데, 그때 ‘준비가 덜 됐나 보다’ 하는 마음이 컸어요. 제대로 준비하고 본격적으로 하려면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역할을 많이 포기해야 하더라고요. 언젠가는 노래와 가정의 균형을 이룰 수 있을 때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마도 지금이 바로 그때인 것 같아요.”
1979년에 데뷔해 결혼하던 1996년까지 쉼 없이 달려왔던 그에게 노래의 의미는 남달랐다. 16세 어린 나이에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시작했던 때, 그를 무대로 이끈 것은 어려운 가정 환경이었다. 당시 국악예술고등학교를 다니던 그에게 가요를 부른다는 것은 단순한 돈벌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고등학생이라는 사실은 업주들만 아는 공공연한 비밀. 한 번 무대에 오르면 3만원을 줬다. 평균 근로자의 월급이 14만원이던 때. A급 가수의 1회 TV 출연료가 2만원, 라디오 출연료는 8천5백원이었다. 5남매와 부모님을 책임져야 했던 그에게는 엄청난 돈이었다. 당시 그는 무교동, 청계천 일대에 있던 극장식 나이트클럽 업소 사이에서 ‘노래 잘하는 아이’로 입소문을 타면서 그 일대를 장악했다. 그렇게 돈을 벌어 집안의 빚도 갚고 온 가족이 생활도 했다.
어린 나이에 겁 없이 뛰어든 어른들의 세계. 하지만 그 역시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나이트클럽의 거친 어른들을 사회의 첫인상으로 만난 그는 자연스럽게 마음을 닫게 됐다고 한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자신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
“밤무대에 서보지 않은 사람은 그게 얼마나 힘들고 비참한지 모를 거예요. 사람이 싫고, 특히 남자가 너무 싫었어요. 소름끼칠 정도로. 원래도 성격이 차가운 편이었는데, 그런 성격이 더 굳어졌죠. 흐트러지면 누군가 저를 해칠 것만 같았어요. 결국에는 제 차가운 성격을 제 자신을 지키려는 방패로 삼은 거죠.”
가수로 정식 데뷔한 것은 1년여 후. 여전히 고등학생 신분이었던 그는 ‘어느 소녀의 사랑이야기’를 대히트시키며 TBC 신인가수왕 자리에 올랐다. 그 뒤 ‘내 인생은 나의 것’ ‘사랑은 이제 그만’ ‘미니스커트’ ‘그대 모습은 장미’ ‘보고 싶은 얼굴’ ‘그대는 인형처럼 웃고 있지만’ 등을 불렀다. 당시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설명하려면, 단지 ‘스타’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지금과 그때의 ‘스타’라는 개념이 전혀 다른 것 같아요. 한번은 명동을 나갔는데, 뒤를 돌아보니 시커멓게 줄을 섰더라고요. 그런데 아무도 말을 걸려고 하지도 않고 달려들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그냥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발만 동동 굴렀었죠. 그 당시에는 스타를 보고 ‘악’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숨이 멎는 것 같다’는 표현을 더 많이 했죠. 그때만 해도 가수가 많지 않았거든요.”

‘보고 싶은 얼굴’ 민해경이 왔다


화려함 속에서도 그는 ‘밑바닥’을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지치고 힘들어도 쉬어갈 수 없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한창 부모 품안에서 지낼 나이에 노래를 한다는 것 자체로 어깨가 무거웠죠. 돈도 돈이지만 부모님도 자주 못 보고 살았거든요. 한창 활동할 때는 아빠 얼굴을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였으니까요. 노래는 내가 하고 싶을 때만 하는 게 아니고 소속사가 요구하면 싫어도 무대에 올라가야 하니 억지로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죠. 원래 저는 노래를 좋아하고 즐기고 싶었는데, 그걸 미처 깨닫지 못할 만큼 그 당시 상황이 힘들었어요.”
그때의 고민 또한 지금의 민해경을 있게 한 값진 경험이었음을 지금은 잘 알고 있다. 물론 그런 시간 없이도 잘 성장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보통은 인고의 시간이 있어야 비로소 밝게 빛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저는 상황이 좋지 않다고만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 덕분에 저의 달란트를 깨닫고 많은 사람에게 좋은 노래를 들려줄 수 있었고 수없이 많은 상도 받았으니까요.”



동네 커피숍 총각 사장님과의 만남
꼬박 10년이 넘도록 앞만 보고 달려오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현실을 깨달았다. 199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며 가족들의 얼굴도 잊을 만큼 바쁘게 살아왔지만 정작 자신의 손에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이 딱 맞아요. 저는 그만큼 활동했으면 제가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가진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제가 활동하는 데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고, 또 소속사는 재투자도 해야 하는 거니까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정말 하나도 남은 게 없더라고요. 제 성격이 좀 쿨하거든요(웃음). ‘어? 하나도 없네? 그럼 이제부터 모아야지’ 했으니까요.”
서른을 넘긴 나이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느낌이었다. 여전히 가족의 생계가 그의 어깨 위에 있었다. 소속사와의 오랜 인연을 뒤로하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나이트클럽, 카바레, 각종 지방 행사까지 불러주는 곳마다 무조건 달려갔다. 눈 뜨면 일어나 노래를 했고 새벽 늦게 집에 돌아왔다. 하루 종일 신고 있던 하이힐을 벗으면 발은 퉁퉁 부어 있었고 발가락 사이에는 핏물이 고여 있었다.
“그제야 재산이라는 것을 가져봤어요. 아마 저만 그랬던 건 아닐 거예요. 예전에 한창 활동하던 가수들이 계속 노래를 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앨범을 못 내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시간이 지나면 소속사가 계약조차 하려 하지 않아요. 저 역시 덩치는 커졌는데, 그에 걸맞은 계약금을 줄 수도, 그렇다고 안 줄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이거든요.”
그렇게 2년 동안 몰아치듯 돈을 벌고 한숨 돌리고 있을 즈음,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인연이 찾아왔다. 당시 연습 중이었던 뮤지컬의 상대 배우와 집 앞 카페에서 만나던 날이었다. 매니저도 없이 단둘이 만났는데, 어이없게도 둘 다 지갑이 없었다. 식당이나 카페에서 스스로 돈을 내본 적 없는 연예인들의 오랜 습관 때문이었다. 둘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계산대에 서 있던 젊은 직원이 ‘그냥 가세요’라며 넉살 좋은 웃음을 지었단다. 그는 속으로 ‘사장도 아니면서 어떻게 책임지려고 하지?’ 하는 생각에 ‘내일’이라고 못을 박아 외상을 걸었다.
“그러고는 새까맣게 잊은 거죠. 한참이나 지난 후에 TV를 보는데 드라마에서 비슷한 상황이 나오는 걸 보고 번뜩 생각이 났어요. 그렇다고 직접 갈 수는 없고(웃음), 마침 매니저가 옆에 있어서 외상값 1만4천원을 갖다 달라고 부탁하고는 그 종업원한테 전화를 걸었죠. 미안하다고. 그랬더니 자기가 커피 사줄테니 놀러 오래요. 또 잊고 살던 어느 날 그냥 심심하기도 하고 커피 사준다는 말도 생각나서 불쑥 찾아갔어요.”
“커피 한 잔, 아니 진토닉으로 주세요.” 그렇게 만난 두 남녀는 카페에 앉아 열심히 컴퓨터 게임 ‘폭탄 터뜨리기’를 했단다. 그 뒤로는 자주 그 카페를 찾아갔다. 카페에 흐르는 노래가 좋았고 포근한 분위기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종업원을 대할 때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단다.

‘보고 싶은 얼굴’ 민해경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민해경이 독감에 걸린 날, 매니저도 없고 가족도 없이 혼자 집에서 끙끙 앓고 있을 때 불현듯 떠오른 사람이 바로 그 종업원이었다. ‘너무 아픈데, 병원에 데려다줄 수 없겠느냐’고 전화를 걸었다. 종업원은 그 뒤로 일주일을 꼬박 병원 통원 치료에 동행했다. 하지만 그러고도 민해경의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가 민해경의 방으로 전화를 걸어와도 받지 않았단다.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 그의 방 자동응답기에 아침마다 메시지를 남기던 남자.
“제가 없을 때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지만 전화가 오는 소리를 듣고도 받지 않았어요. 참 못됐죠?(웃음) 그러다가 어느 날 그가 ‘제가 실례를 범한 것 같다’며 ‘다시는 전화하지 않겠다’고 하는 소리에 얼른 수화기를 들었어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방금 들어왔는데 지금 놀러 가겠다’고 했죠(웃음).”
집 앞 카페에서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그 짧은 길에서 민해경은 ‘저런 남자와 결혼을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의 유쾌한 성격에 자신의 차가운 성격이 따뜻하게 데워지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카페는 큰형에게 물려받아 본인이 운영하고 있던 거였어요. 스무 살 중반부터 개인 사업도 하던 터라 생활력이 엄청 강했죠. 그 뒤, 10개월 만에 결혼했으니,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겠어요(웃음). 거의 매일 만났죠(웃음). 그래도 데이트는 꿈도 못 꿨어요. 한번은 큰맘 먹고 영화관에 갔는데, 추운 날 멋을 낸다고 하얀 밍크코트를 입었죠. 누가 봐도 ‘내가 민해경이다’ 했을걸요? 그 뒤로는 영화관도 못 갔네요(웃음).”

행복한 삶, 노래하는 기쁨
서른여섯 살에 다섯 살 연하의 남자와 결혼에 성공한 후 그는 과감히 자신의 활동을 접었다. 워낙 차갑고 강한 이미지여서 주변에는 수군거리는 말도 많았다. ‘남편이 힘들겠다’ ‘일주일도 못 갈 거다’며 두고 보겠다는 말은 그나마 애교였다. 아예 벌써 이혼하고 미국에 갔다더라는 말도 나돌았다.
“제가 남편을 휘어잡고 살 것 같죠? 절대 아니에요(웃음). 제가 센 거 같으면서도 은근히 여린 면이 있거든요. 우리 남편은 털털하게 넘어갈 것 같으면서도 딱 잡아주는 뭔가가 있고요. 제가 가끔 화를 내거나 하면 ‘아, 내가 당신 덕에 살아 있음에 감사함을 느끼오’ 하면서 저를 웃게 만들죠. 그런 남편의 유쾌함도 본인이 노력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 또한 남편을 존중하려고 노력해요. 제가 먼저 남편을 존중할 때 남편도 저를 존중해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게 없으면 행복할 수 없을 거예요.”
임신과 함께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고는 3년 만에 앨범을 내는 등 느린 스타카토처럼 가수 활동을 이어왔다. 때로는 미사리 무대에도 서고, 지방 행사도 찾았다. 프로젝트 그룹에 참여하기도 했고, 2002년에 앨범도 냈다. 예전처럼 화려한 조명을 받고 싶지 않으냐고 했더니 오히려 집에 있는 게 가장 좋다고 한다.
“결혼하면서 모든 일을 그만둔 것은 조용히 살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에요. 가족이 생기면 제가 충실해야 할 곳은 여기라고 생각했죠. 제가 살림하는 걸 아주 좋아하거든요. 새벽에 일어나 아침상 차리고, 또 더러운 꼴을 못 봐서 정리를 깨끗하게 해야 하거든요. 그러고는 운동하고 요리하는 생활 패턴을 좋아해요(웃음).”
민해경은 이제 열일곱 살이 된 딸에게는 때론 친구 같고, 때론 한없이 엄격한 엄마다. 지금은 한국에 있지만 2년 전 홀로 유학을 떠났던 딸이 하루는 울면서 전화를 했단다. 수업 중에 자신의 프로필을 설명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엄마에게 매를 맞았다는 말을 꺼냈다가 교실이 한바탕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딸이 아빠한테 ‘다 맞고 사는 줄 알았는데, 나만 맞고 살았다’며 펑펑 울더라고요. 남편이 아이를 달래주기에 오히려 아이한테 ‘혼나고 싶냐’고 그랬죠. 아빠는 은근히 감싸주니까 저는 엄하게 해야죠. 외동딸이니까 오히려 애지중지하지 않고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제가 강하게 자랐으니까 은연중에 아이에게 내 삶의 과정이 반영되는 것 같기도 해요.”
때론 누구보다 무서운 엄마지만 대부분은 쿨하고 화끈한 엄마다. 딸이 크면 엄마의 친구가 된다던데 요즘은 그 말이 딱 맞는 말이지 싶단다.
사람 냄새 훈훈하게 느껴지는 민해경 가족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가 얼마나 큰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무역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남편과 사랑하는 남편을 똑 닮은 딸. 결혼 18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변치 않는 사랑과 감동을 이야기하는 눈앞의 민해경이 예전의 차갑고 날 서 있던 그 민해경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얼굴에 마치 ‘나 행복해요’라고 써 붙인 사람처럼 방실방실 웃는다.
그때서야 비로소 ‘남편을 잘 만났기 때문에 음악을 다시 할 수 있었다’는 말과 ‘노래를 부르는 기쁨을 알게 됐다’는 말이 마음으로 와 닿았다.
“이제 노래가 예전과는 다른 의미에서 저에게 기쁨을 주는 것 같아요. 일단 돈을 벌려고 악착같이 해야 하는 게 아니라서 좋고요. 제 곁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 제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무엇인가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좋아요. 그 어떤 부담감도 없이 편안하게 노래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와 오랜만에 먼지 쌓인 CD 플레이어를 꺼내 그가 건넨 17집 앨범 ‘Balance’를 넣었다. ‘고통과 행복이 어느 것 하나 치우치지 않고 정확한 균형을 이뤘을 때, 삶과 음악 또한 절묘한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던 그의 메시지를 떠올리며 음악을 들었다. 여전히 금속성의 목소리를 지녔지만 한결 부드러워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신경질적’이라는 표현 대신 ‘시크하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렸다. 충분히 민해경다웠다. 데뷔 35주년을 맞아 17집을 발표하고 전국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는 그에게서 과거가 아닌 현재의 민해경이 보이는 이유다.

여성동아 2013년 4월 5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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