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성동아 로고

Celeb

석지영 교수의 가장 지혜로운 이야기

아시아계 여성 최초, 한인 최초 하버드대 종신 교수가 되기까지

글·진혜린 |사진·지호영 현일수 기자

입력 2013.02.19 11:29:00

기가 죽어 어깨가 축 처졌을 때, “너에게 자질이 부족하거나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야”라고 말해줘서 고마웠다. 살림하랴, 일하랴 아등바등거릴 때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라고 토닥여 줘서 힘이 났다. 그것은 석지영 교수가 살아온 삶, 그 자체가 전해준 메시지였다.
석지영 교수의 가장 지혜로운 이야기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 출판 기자회견장에서 어떤 기자가 석지영(40) 교수에게 ‘당신의 풍요로운 성장 배경에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나?’라는 질문을 했다. 어떻게 보면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분명 석지영 교수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서울대 의대 출신 아버지와 이화여대 약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6세 때 미국으로 이민 간, 지니 석의 이야기다. 이는 우리와는 다른 가정 환경이나 사회·교육적 상황에서 우리와는 다른 혜택을 받았다는 또 다른 말이다. 반대로 우리는 경험해보지 못한 많은 장벽을 넘어야 했다는 의미도 된다. 그래서 석지영 교수는 그 질문에 “내 이야기는 한국이 아닌 미국의 이야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전통적으로 남성과 백인 위주의 하버드대에서 아시아계 여성 최초이자 한인 최초로 종신 교수가 탄생했다는 것은 한국인에게 남다른 의미다. 한국인에게 하버드대가 갖는 위상을 감안해보면 더욱 그렇다.
고백하자면 많이 부럽다. 여성동아 단독 인터뷰를 위해 마주 앉은 그는 웃는 얼굴이 예쁠 뿐 아니라 따뜻하고 이지적이며, 아이 둘을 낳고도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더욱이 발레와 피아노, 문학과 법을 아우르는 탄탄한 스펙에 대해서는 부러움의 범위,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래서 ‘엄친딸 종결자’라는 표현이나, 존경한다는 단계를 한참 벗어난 경외의 시선으로, 우리는 석지영 교수를 바라본다.

한국인이기에 더 특별한 이야기

석지영 교수의 가장 지혜로운 이야기

석지영 교수는 1월,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 발간일에 맞춰 한국을 방문해 숭실대 등에서 ‘예술·인생·법’을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2010년 하버드대 종신 교수가 됐을 때, 그는 한국 사람들이 자신을 ‘엄친딸’로 바라보는 시선과 관심이 뜻밖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수많은 질문 공세에 답하기까지에는 충분한 자기 인식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오래전에 떠나온 고국과 자신과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생각해보니, 저는 그저 나 홀로 즐겁게 삶을 꾸려가는 나 자신이 아니었어요. 제 생각과 일과 놀이를 통해 제가 누린 거대한 자유는 사람과 문화, 가치관, 관심, 예상치 못한 우연이 모두 합쳐진 산물이었죠. 내게 뛰어난 점이나 전형적인 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어떤 것도 이러한 요소에서 벗어난 것이 없었어요.”
그러한 자기 인식의 결과를, 그리고 자신에게 쏟아진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해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라는 자서전에 담았다.
그의 책 속에는 가정 환경이나 사회·교육적 혜택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고, 또 지난하고 아픈 자기 연마의 노력 없이는 이룰 수 없었던 그의 삶이 보였다. 그것은 모두 끈끈한 인과관계로 얽혀 있어 지금의 석지영을 만들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했다. 물론 그의 부모님이 한국인이라는 사실과, 생의 첫 6년을 한국에서 보냈다는 사실도 포함된다. 부모의 바람과 자신의 신념이 달라 겪어야 했던 좌절, 꼭 합격하고 싶은 오디션 전날의 그 떨리던 마음,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았던 학창 시절과 대참사가 날 것 같은 시험 성적에 대한 걱정, 우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논문을 써야 했던 경험은 분명 우리의 이야기나 다름없다. 그 특별할 것 없던 이야기를 특별하게 써내려갈 수 있었던 것은 석 교수가 가진 장점 덕분이다. 그것이 지금의 그를 있게 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저는 정말 자신감이 없던 학생이었어요. 이민을 갔을 때 말을 못 알아들어서 주눅이 들었지만 자의식이 있는 아이였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 나설 수가 없었죠. 늘 불안하고, 확신이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사람들이 무섭지 않고 제가 하는 일에 확신이 있죠.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기발한 해결책이나 어떤 공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인생을 살아가면서 문제에 봉착했을 때, 도망가지 않고 무서워도 달려들어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거죠. 직접 부딪히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아요.”
어떤 노력 없이 가정 환경이나 사회·교육적 혜택만으로 성공하는 경우는 없다. 여느 이민자들도 그랬겠지만 ‘언어 장벽’에 부딪힌 여섯 살배기 여자아이에게 세상은 공포였고 교육은 폭력이었을 것이다.
“단 한마디의 말도 이해할 수 없는 낯선 환경에 갑자기 떠밀려 들어갔을 때 느낀 극한의 공포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소통할 수 있을 정도가 됐을 때에도 학교는 여전히 두려움과 고립의 장소였죠. 밤마다 겁에 질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바람에 수면 부족으로 헛것을 보기도 했어요.”



석지영 교수의 가장 지혜로운 이야기

1 아메리칸 발레 학교 시절. 그는 아직도 발레를 그만둔 것이 가장 아쉽다고 말한다. 2 1995년 옥스퍼드 워드햄 칼리지에서. 덤불 속에서 길을 잃을 때마다 방향을 잡아주었던 교수들과의 만남은 지금의 그녀를 있게 한 가장 큰 힘이라고 했다. 3 1994년 예일대 졸업식에서 기수로 행진했다. 4 줄리어드 예비학교 독주회.



자신감도 확신도 없던 그에게 있었던 한 가지
그런 그에게 큰 변화를 가져다준 것은 소설과 시였다.
“책읽기는 포근한 피난처가 돼주었어요. 책을 읽고 있으면 혼자가 아니라고 느껴졌죠. 그 마음을 눈치챈 어머니가 매일 방과 후 공공도서관에 데려가 저녁 식사 전까지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했죠. 이를 닦을 때도, 옷을 입을 때도, 저녁을 먹으면서도 마지못해 덮었던 소설책을 다시 펼치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 정도였죠.”
그런데 그의 관심은 책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피아노 하나를 배워도 ‘대단한 연주 기술로 좌중을 압도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는 꼬마숙녀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꼬마숙녀의 열망을 채워줄 수 있는 선생님을 만났다는 것도 중요한 일이겠지만 ‘양손이 생명을 얻어 스스로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을 만큼 엄청난 연습을 거듭한 것은 석지영 자신이었다.
“저는 관심을 끄는 것이 있으면 완전히 빠져드는 성격이에요. 그 한 가지에 매료돼 그것만 생각하고 자세히 알기 위해 점점 빠져드는 거죠. 만족할 수 있을 때까지 몰두해요. 그것은 지금까지 제가 무엇인가를 해나갈 때마다 일정 부분 성과를 이룰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죠.”
소설과 시, 그리고 음악으로 대변되는 책과 피아노는 석지영 교수에게는 삶의 저변에 깔린 기반 같은 거였다. 추구하고자 했던 취향이고 즐거움이었다.
본격적으로 석 교수를 사로잡았던 것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발레 학원에서 만나게 됐다. 그리고 발레 ‘호두까기 인형’을 관람하면서 무용수들의 완벽하게 날렵한 몸매, 흠잡을 데 없는 복잡한 무용 스텝, 어린 시절의 환상을 구현하는 숨 막히는 장면들에 넋이 나갔다. 발레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발레에 대한 지식 습득과 연습에 온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문학적 갈증이나 발레에 대한 열정과 상관없이 우리나라로 치면 중학생인 7학년 때, 그는 ‘영재’들을 위한 특수 실험 학교인 ‘헌터 스쿨’에 들어갔다. 헌터 스쿨의 입학을 추천한 것은 석 교수가 다니던 초등학교의 미국인 교사였지만, 한국 출신인 석 교수와 그의 어머니가 ‘헌터 스쿨’ 입학에 임하는 자세는 지극히 한국 스타일이었다. 헌터 입학을 목표로 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인 학원을 찾아낸 것이다. 그 학원 덕분에 석 교수는 자신이 그리 뛰어난 학생이 아니었음에도 헌터 스쿨에 합격할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어쨌든 이 한국 스타일의 입학 준비는 꽤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학원에 다닌 한인 학생의 절반 이상이 합격을 했으니까 말이다.
헌터 스쿨은 석 교수에게 ‘영재 교육’ 그 이상의 의미를 가져다줬다. 가까운 곳에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정보를 모아왔던 SAB, 즉 아메리칸 발레 학교(School of American Ballet)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SAB는 전문 무용수 훈련을 받을 수 있는 학교였다. 아무나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지만 석 교수에게는 입학 오디션보다 더 넘기 힘든 관문이 하나 더 있었다.
“어머니는 발레가 어린아이의 자세와 우아한 몸짓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고 발레 수업을 듣게 한 거지 발레리나가 되길 원하진 않았거든요. 이 때문에 대학을 목표로 공부에 전념해야 하는 10대에게는 발레 훈련에 그토록 많은 투자를 하는 게 이성적이지 않다고 말씀하셨죠. 하지만 합격 확률이 극히 적었기 때문에 오디션에 참가하는 것은 허락해주셨어요.”

막상 합격 통지를 받은 후에는 완강히 반대를 했다. 이에 석 교수가 들고 나간 카드는 대입 내신이 적용되지 않는 8학년까지만 SAB에 다니겠다는 약속이었다.
헌터 스쿨의 수업이 끝나면 득달같이 SAB로 달려가 오후 연습에 참가했다. 대체로 자신이 알던 아이들보다 훨씬 더 총명한 학생들이 모여 있던 헌터 스쿨에서 주눅 들고 편치 않았던 것과 달리 SAB에서의 생활은 황홀경 그 자체였다고 했다. 하지만 그 황홀경의 유통기한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상급반은 낮에 수업을 시작하기 때문에 공연계 학생들을 위한 특수 사립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아니라면 일반 학교와 병행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상급반으로 승급되는 것도 같은 반 학생 중 3분의 1에 불과했고, 막상 승급 심사를 통과한다고 해도 9학년이 되면 SAB를 그만두겠다는 어머니와의 약속은 어길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려운 승급 심사를 통과했음에도 SAB를 그만두었다. 그 순간 그는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을 만큼 절망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SAB를 그만두고도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숙제든 과제물이든 리포트든 시험이든, 제대로 하는 것이 없었다. 그 대신 동이 틀 때까지 침대에 누운 채 몰래 책을 읽고 교실에 앉아서는 딴전만 부렸다. 줄곧 탈출의 환상만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딸의 모습에 어머니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단다. 그것이 줄리어드 예비학교였다.
줄리어드 예비학교는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음악 전반에 대한 교육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매주 토요일마다 하루 종일 진행되는 예비학교에 참여하려면 학생들은 매일 집에서 여러 시간 연습을 해야 한다. 졸업 시즌에는 링컨센터에서 제대로 된 독주회를 열었고, 음악을 전공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는 당연히 거쳐야 할 곳이기도 했다.
줄리어드 예비학교 입학 시험을 위해 그는 줄리어드 교수에게 피아노 집중 특강을 받았다. 매일 4~6시간씩 피아노 연습을 하고 이틀마다 레슨을 받았다. 그렇게 다니게 된 줄리어드 시절을 그는 “탁월함을 향한 강렬한 열망이 가득한 공간에서 우리는 짜릿한 공감을 나눌 수 있었다”고 표현한다.

한국식 교육과 문학적 열망이 만난 결과
고등학교 졸업반이 됐을 때야 비로소 그는 시와 소설, 미술, 극장 공연과 음악 등 자신의 마음을 빼앗고 공부를 방해했던 것들과 수업 시간에 일어나는 일들을 연결해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상위권 성적도 아니었고, 꾸준히 공부하는 버릇도 없었지만 철학과 문학 시간에 활기를 띠는 모습을 보고 선생님들이 석지영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의 대학에서 학생을 선발할 때, 정해놓은 한 가지 기준만으로 평가하지 않아요. 다양한 것을 고려하죠.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 지표를 만족시키는 아이들도 많지만 객관적인 자료보다 학생이 가지고 있는 장래성과 사회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지, 혹은 정치나 여러 가지 분야에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있느냐를 판단하는 거죠. 예술 활동이나 소설 쓰기에서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는지도 중요한 판단 기준이에요.”
결국 가장 쓸데없는 시간이었다고 여겼던 시간들, 예를 들면 책을 읽고 공상에 잠겨 있었던 시간들이 의외로 대학 입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예일대에 합격한 것에 대해 그는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고 말한다. 헌터의 다른 학생들만큼 학업성취도가 높지 않았고, 시험을 잘 보거나 과제를 잘 한 것도 아니었지만 책과 다양한 발상, 예술에 대한 사랑이 세상의 문을 열어주었고, 자신의 미래의 기초가 돼주었다는 말이다.
“예술 분야에 심취했던 것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 같아요. 그림이나 사진을 보고, 또 음악을 들으면서 혁신적인 사고방식을 키운 거죠. 어떤 사건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추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예술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겨예요. 낯익지 않은 것을 바라볼 때, 나의 경험이나 관점을 뛰어 넘어 바라보는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예일대에 입학한 석 교수는 부모님의 지원 아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여전히 할 일을 마지막 순간까지 미루기 일쑤였고, 수업 시간에는 집중하지 못하며, 수업 과제는 자주 게을리 했다. 하지만 철학과 예술에 대한 탐구는 멈추지 않았고, 적어도 그것에 대한 성찰을 즐겼다.
어쩌면 그것은 석 교수가 누릴 수 있었던 최고의 혜택이었다. 여름이면 프랑스 아비뇽의 아파트에 머물며 프랑스어와 프랑스어권 문학을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그중 하나였다. 영재 학교인 헌터 스쿨에 입학하기 위해 한인 학원에 다녔던 것이나 줄리어드 예비 학교에 가기 위해 줄리어드 교수에게 개인 교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한국식 교육 관념과 여유로운 부모님의 경제력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혜택이 어느 때까지고 효험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예일대 마지막 해, 수년간 전액 지원을 받으며 영국에서 대학원 과정을 공부할 수 있는 마셜 장학생으로 옥스퍼드대 현대언어학과에서 박사 논문을 마칠 수 있기까지 지난하고 험난한 학문 탐구의 영역은 오롯이 석 교수 자신의 노력과 연마의 과정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하버드대 종신 교수가 된 것은…

석지영 교수의 가장 지혜로운 이야기


하지만 어느 정도 높은 수준의 학문적 궤도에 올라선 후에도 석 교수는 인생을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일을 붙잡고 있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일만 하기에도 인생은 너무도 짧다.
“글쓰기에 버둥질 치면서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기쁨을 주지만 문학 작품을 쓰는 것은 기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어요. 문학자로서의 길을 계속 걷는다면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은 것처럼 언제나 어색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스물여섯, 그간 쌓아왔던 모든 것을 뒤로한 채 하버드대 법대에 지원할 때도,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길을 따랐던 것뿐이라고 했다.
“최근 22세 어린 학생이 하버드 법대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더라고요. ‘다른 일을 좀 더 해보고 오라’고 말해주었어요. 하버드 법대의 75%에 달하는 학생들이 대학을 갓 졸업하고 온 학생들이 아니에요. 대부분이 20대 후반이고 심지어 40대도 많이 있어요. 하버드대 법대생들을 보면 굉장히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죠. 봉사 활동을 하다 온 친구들도 있고 재무 회사를 다니다가 온 학생들도 있죠. 그렇게 보면 사회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이 하버드 입학에 오히려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그의 말처럼 예술과 문학에 대한 그의 경험은 법학 공부를 하는 데 중요한 뼈대가 됐다. 법의 복잡한 자료, 분석적이고 수행적인 성격을 제대로 인식하고 즐길 뿐 아니라 법의 언어에 존재하는 다양한 제약과 규칙을 즐길 수 있는 밑바탕이 돼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그러한 깊이 있는 문학적 기반은 시험 성적을 높이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수업은 너무 좋았고, 새롭게 사고하는 방식을 익히며 정신이 매일 활짝 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졸업하는 그 순간까지 시험을 잘 치르지는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법대 교수, 그것도 종신 교수가 됐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시험 성적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다고 봐요. 학생을 평가하는 데는 한 학기 내내 수업에 어떻게 참가했는데, 토론에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는가가 학생을 제대로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 시험 성적 또한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었어요(웃음).”
그가 법대 교수직에 지원할 계획을 세우며 논문을 준비할 즈음 하버드 법대 교수들은 그에 대해 “다른 이들은 예상하지 못하는 것을 알아채는 본능과 놀라운 관찰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행운”이라고 평가했다.
그가 아시아계 여성 최초, 한인 최초로 하버드대 종신 교수가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창의력과 사고력이 중요하다는, 교육서에 흔히 등장하는 주장의 근거임과 동시에 진정한 창의적인 사고력이 가진 힘과 파급력을 입증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석지영 교수의 이야기는 흔치 않은 혜택과 문화적 풍요로움 속에서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총명한 한 아이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에 고개를 주억거릴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그 또한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비슷한 고민을 어떻게 해결해갔느냐는 것이다. 그는 늘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부딪혀 싸워나갔다. 그는 ‘제도적 한계와 환경적 제약 때문이 아니라면’이라는 단서를 들었다.

석지영 교수의 가장 지혜로운 이야기

하버드 법대 강의실. 그는 2006년 조교수로 하버드 교수진의 일원이 된 후 2010년 정교수 지위와 함께 종신 교수로 승진했다.



“수업 시간에 기죽고 자신감 없이 느끼는 것을 개인적 자질이나 결함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을 보면 화가 나요. 그것은 문화적 차이와 성장 배경의 문제이거든요. 심각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죠.”
그 또한 자신이 행운아임을,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섣불리 해결책을 제시하고 자신처럼 해보라고 권하지는 않는다. 다만 선택과 집중의 영역에서 ‘아침에 벌떡 일어날 수 있을 만큼 즐길 수 있는 일을 찾는 것’만큼은 모든 사람이 이뤄야 할 꿈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Go Have Some Fun!
“저와 하버드대에서 함께 공부한 친구 중에는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는 것에만 집중하는 사람도 있어요. 반면에 저는 교수직에 지원하고 연구 논문도 제출하면서 지금 이 자리에 있죠. 그것이 개인적인 가치관에 따라 이뤄질 수도 있는 것이지만 때로는 사회의 요구로 결정되는 부분도 있죠.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이고 가정이냐 일이냐를 두고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 또한 예일대 마지막 학기를 마칠 무렵, 미래의 남편 그러나 최근 전 남편이 된, 남자를 만나 하버드 법대 입학 즈음에 결혼했고 하버드대 졸업 논문을 쓸 때에는 첫째 아이를 임신한 상황이었다. 지금은 아홉 살이 된 첫째 재민이와 일곱 살인 둘째 민아의 엄마로, 하버드 법대 교수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는 가정과 일을 어떻게 동시에 해낼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교수직에 지원하고 인터뷰를 하러 갔을 때, 쉬는 시간마다 호텔에 가서 젖을 짜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기억도 있어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일과 삶에 균형적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죠. 그런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해요. 아이들에게 관심을 듬뿍 주는 애정 어린 부모는 확실히 될 수 있겠지만 아이들과 실제로 함께하는 시간은 매우 제한적이겠죠. 남성도 여성도 ‘모든 것을 가질’수는 없어요. 모든 면에서 완벽해지고 싶은 사람은 결코 모든 면에서 자유로울 수 없죠. 가급적이면 자신이 높이 사는 가치와 소망, 그리고 선호하는 것을 반영해 선택하고 그에 맞춰 시간을 배분하고 그 선택에 따라 살아가는 거죠.”
그는 책 출간일에 맞춰 한국으로 떠나던 길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느냐’며 울기까지 하는 아이들을 꼭 안아주어야 했단다.
“제가 한국에 와 있는 동안 아이들이 매일 이메일을 보내서 보고 싶다고 해요. 인간관계라는 것이 항상 옆에 있어서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좋아하는 사람이 떠나서 그리워하고, 다시 만나 그 상실의 느낌을 충족시키는 과정을 통해 성숙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엄마가 없는 시간을 크게 걱정하지는 않아요.”
다만 최고로 좋은 엄마가 될 수는 없어도 ‘그래, 이만하면 괜찮은 엄마지’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아이들과 소통하고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인정해줄 수 있는 어머니가 되고 싶다고도 했다. 그것은 함께하는 시간을 놀이처럼 즐길 수 있을 때 가능하다고 했다. 그에게 교사의 위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학생들이 가슴이 뛰어서 빨리 학교에 오고 싶어 하도록 해주고 싶어요.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처럼 학생들과의 수업도 게임이나 놀이처럼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고요. 너무나 재미있어서 내 능력껏 시도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것을 할 수 있도록 추진하고 그것을 할 수 있도록 힘껏 노력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즐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참고도서·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북하우스)

여성동아 2013년 2월 590호
Celeb 목록보기 좋아요

Print Edition

How to be a woman

생각하는 여자가 읽는 매거진!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이번호목차이번 호 구입하기

독자알림

더보기

Follow up on SNS

여성동아 에디터가 핫뉴스, 최신 트렌드와 이벤트를
실시간으로 전해 드립니다.

  • 여성동아 페이스북
  • 여성동아 인스타그램
  • 여성동아 유튜브
  • 여성동아 네이버포스트
  • 여성동아 네이버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