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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실력과 배짱으로 6천만 달러 거머쥔 류현진 부모 류재천·박승순의 야구 천재 조련기

“힘닿는 데까지 뒷바라지했지만 간섭은 안 했죠”

글·권이지 기자 | 사진·이기욱 기자 동아일보 출판사진팀, 류현진·LA 다저스 공식 트위터

2013. 01. 16

세계가 주목하는 선수로 미국 메이저리그행 티켓을 거머쥔 야구선수 류현진. 아버지 류재천, 어머니 박승순 씨에게 그의 성장기와 치열했던 LA 다저스와의 연봉 협상 뒷이야기를 들었다.

실력과 배짱으로 6천만 달러 거머쥔 류현진 부모 류재천·박승순의 야구 천재 조련기


대한민국 대표 좌완 투수 류현진(26)의 얼굴엔 요즘 웃음이 반, 긴장감이 반이다. 세계적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선배 박찬호가 데뷔한 LA 다저스의 다저스타디움 마운드에 서게 됐기 때문이다. LA 다저스는 류현진의 6년 연속 10승 돌파, 최연소 1천 탈삼진 달성, 정규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과 배짱을 높이 샀다고 영입 이유를 밝혔다.
LA 다저스가 류현진을 영입하기 위해 사용한 금액만 6천만 달러가 넘는다. 우리 돈으로 따지면 6백억원 가까이 된다. 여기에는 우선 협상을 위해 한화 이글스에 지급해야 하는 포스팅 금액 2천5백73만 달러(한화 약 2백80억원), 계약금 5백만 달러(한화 약 60억원), 6년 연봉 총액 약 3천6백만 달러(한화 약 2백90억원)가 추가된다. 다저스는 연봉과는 별도로 체류비 명목의 3만 달러(3천3백만원)와 LA발 서울행 일등석 항공권 8장, 개인 통역 비용, 영어 수업 비용, 개인 트레이너 비용을 지급한다.
귀빈 대접을 받으며 당당히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류현진의 뒤에는 그의 부모 류재천(58), 박승순(54) 씨의 뒷바라지가 있었다. 류현진이 연봉 협상 승전보를 갖고 귀국하던 날인 12월 14일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에서 그의 부모를 만났다. 귀국 예정 시간보다 한참 늦어지는 그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어머니 박씨에게 먼저 “아들 잘 키운 비결이 궁금하다”고 인사하자 그는 웃으며 “현진이가 알아서 잘 큰 것”이라고 답했다. 부모는 아들이 알아서 컸다고는 하지만 고생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야구 좋아하는 아들 뒷바라지하다 몰래 눈물

실력과 배짱으로 6천만 달러 거머쥔 류현진 부모 류재천·박승순의 야구 천재 조련기

동산고 시절 타석에 선 류현진. 투·타 모두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아버지 류재천 씨를 따라 야구장 가는 걸 좋아하고, 형과 함께 하는 캐치볼을 최고의 놀이로 여긴 초등학생 류현진. 야구 이야기에 얼굴이 환해지는 소년의 재능을 먼저 알아본 사람은 아버지였다.
“캐치볼을 하는데 범상치 않았어요. 현진이한테 ‘야구 한 번 해볼래?’ 하고 물어봤어요.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그렇게 인천 창영초등학교에서 테스트를 받게 됐죠.”
류현진의 캐치볼을 지켜보던 이무일 당시 창영초 감독은 깜짝 놀라더니 “당장 아이를 전학시키세요. 투수를 시킵시다” 하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어머니 박씨는 처음에 반대했다. 운동선수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일지 안 봐도 뻔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야구를 좋아하는 건 괜찮지만, 야구선수를 시키고 싶진 않았어요. 하지만 현진이가 너무 하고 싶어 했고, 결국 지고 말았어요.”
류현진은 야구를 시작하자마자 빛을 발했다. 누구보다 ‘예쁜 폼’으로 공을 던졌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아듣고 흡수하는 신동인데다 승부욕도 강했다. 아직 3학년이니 당연히 6학년 형들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싫었는지, 악착같이 연습해 6학년 형들을 밀어내고 팀의 에이스로 우뚝 섰다. 자식이 원하는 길이라는 확신이 든 부모는 허술하지만 집에 연습장도 만들어주고, 많은 운동량을 소화하느라 항상 배가 고픈 아이에게 실컷 음식을 해 먹였다. 아버지는 겨울이 되면 운동장에 쌓인 눈 치우는 일을 도맡았다. 그 덕분에 류현진은 한겨울에도 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류현진은 프로야구 스카우터가 주목하는 학생이 됐다. 인천 동산고 2학년이던 2004년 미추홀기 고교야구대회에서는 3학년 형들 대신 에이스로 출장해 4승을 거뒀다. 하지만 왼쪽 팔꿈치에 강한 통증이 왔다. 병원을 찾았더니 팔꿈치 인대가 너덜너덜해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아들이 수술실에 들어간 사이 아버지는 몰래 눈물을 흘렸다. 아들의 부상을 빨리 알아채지 못한 것을 자책했다.



류현진이 달성한 프로야구 대기록

2006. 6. 18 최연소 시즌 1백 탈삼진
대전 두산전에서 19세 2개월 24일의 나이로 최연소 시즌 1백 개 탈삼진을 기록했다. 상대는 고영민. 종전 기록은 주형광 현 롯데 코치가 세운 20세 3개월 20일로 무려 9개월 앞당겼다.

2010. 5. 11 정규이닝 최다 탈삼진
청주 LG전에서 정규이닝인 9이닝 동안 총 17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 종전 기록은 최동원, 선동열, 이대진이 갖고 있던 탈삼진 16개. 이날 상대 LG 선발 타자는 전원 삼진을 당했고, 류현진은 매 이닝 삼진을 기록했다. 완투승은 보너스. 3:1로 팀이 승리했는데 1실점은 홈런으로 나왔다. 마지막 타자는 LG 트윈스의 맏형 이병규.

2010. 8. 17 29경기 연속 퀄리티스타트 비공식 세계 신기록 달성
퀄리티스타트는 선발투수가 6이닝 동안 3자책점 이하로 막아내는 것을 뜻하는 야구 기록 중 하나로 투수 보직이 분업화된 현대 야구에서 선발투수의 덕목이다. 류현진은 2010년 8월 17일까지 단일 시즌 23경기 연속, 전 시즌 포함 29경기 연속 퀄리티스타트를 달성했다. 퀄리티스타트는 프로야구 공식 기록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비공식 세계 신기록으로 인정됐다.

2011. 6. 19 최연소 및 최소 경기 통산 1천 탈삼진 달성
2011년 대전 두산전에서 류현진은 24세 2개월 25일의 나이, 1백53경기 만에 1천 탈삼진을 달성했다. 최연소는 주형광이 세운 24세 3개월 14일을, 최소 경기는 정민철이 세운 1백80경기 기록을 경신하게 됐다. 이날을 기념하는 특별 유니폼이 제작되기도 했다.


실력과 배짱으로 6천만 달러 거머쥔 류현진 부모 류재천·박승순의 야구 천재 조련기


“토미존 수술(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 부상당한 팔꿈치에 정상적인 팔꿈치의 인대를 떼어 붙인다)을 받았어요. 왼쪽 팔꿈치 속에 작은 뼛조각이 들어 있어 인대가 상한 거죠. 수술보다는 재활이 문제였어요. 인천에서 서울 강남에 있는 병원까지 매일 왕복 4시간이 걸렸어요. 학교도 못 가고 그 좋아하는 운동도 못하는데, 현진이는 힘들다는 내색도 안 했어요. 뭔가 해줘야 할 것 같아서 같은 팀 선수들이 어디에서 경기하든 데리고 다니며 야구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려 애썼죠.”
1년의 재활 끝에 류현진은 고교 무대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3학년이던 2005년, 동산고를 청룡기 고교야구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또 다른 좌절이 류현진을 기다렸다. 프로선수의 꿈을 꾸며 기다리던 2006년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류현진은 인천이 연고지인 SK 와이번스에 1차 지명되는 것을 희망했다. 하지만 SK는 류현진이 팔꿈치 수술을 받은 것이 걸린다며 포수 이재원을 뽑았다. 다음 지명권을 가진 롯데 자이언츠도 투수 나승현을 선택했다. 류현진의 이름을 부른 건 한화 이글스였다. 그를 즉시 전력으로 판단하고 데려온 것도 아니었다.
류현진의 잠재력을 눈여겨본 사람은 당시 한화의 투수코치였던 고 최동원. 전설의 투수가 선택한 류현진은 한화의 국보급 투수 송진우, 정민철, 구대성에게 직접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바닥까지 떨어져 있던 자신감은 2006년 4월 12일, 프로 데뷔이자 첫 선발 등판 무대에서 되찾았다. 이날 그는 신인 데뷔전 최다 탈삼진 타이(10탈삼진)를 기록하며 승리 투수가 됐다. 그 후 2008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 등을 견인하며 대한민국 대표 좌완 투수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마음 졸이며 아들을 바라보던 부모는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마운드 위 배짱 협상 테이블에서 보여줘
자식이 잘되면 흔히들 부모의 입김이 세진다고들 한다. 운동선수의 경우 치맛바람 센 부모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오기도 한다. 하지만 류현진의 부모는 아들 일에 절대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연봉 협상 때도 ‘팀에서 알아서 잘 챙겨주겠지’ 하며 한 번도 서운함을 표현한 적이 없다. 부부가 아들을 위해 하는 일은 경기가 있는 날 어김없이 야구장을 찾거나, 몰래 숙소를 청소해주고 가는 일뿐이다. 아버지 류씨는 “부모의 역할은 뒤에서 지켜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홈과 원정 경기를 빠짐없이 찾았는데, 딱 두 경기만 못 봤어요. 한 경기는 대전에 내려가다 비가 많이 와서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는데 갑자기 비가 그치면서 경기가 시작되는 바람에 못 봤고, 또 한 경기는 장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였죠. 그날은 자리를 지키느라 대신 TV로 봤어요. 경기 끝나면 얼굴 보고, 인사하고 그게 끝이에요. 말하지 않아도 아는 거죠.”
2012년 시즌을 마친 류현진이 메이저리그행을 선언한 뒤에도 부모는 묵묵히 아들을 지켜봤다. 연봉 협상 금액 등에 대해서도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류현진이 2012년 11월 14일 보라스 코퍼레이션 소속 에이전트 전승환 씨와 함께 미국 LA로 출국할 때도 부모는 함께하지 않았다.
“현진이가 출국 전날 집에 와서 하루를 보냈어요. 이미 어른인데 미국까지 함께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시간 맞춰 인천국제공항에 데려다주기만 했어요.”
미국에서 류현진은 LA 다저스 관계자를 만나 인사를 나누고, 스콧 보라스를 통해 연봉 협상 과정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협상은 초반부터 난항을 겪었다. LA 다저스 측은 “보라스 코퍼레이션에서 너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한다”고 언론을 통해 밝혔고, 보라스는 “미국이 아니면 일본이라도 갈 거다”하고 으름장을 놨다. 결국 의견 차를 좁히지 못해 마감 시한 직전인 12월 10일까지 협상이 계속됐다. 그의 에이전트 전씨는 포털 사이트 네이버 ‘이영미 칼럼’에서 “마지막 협상 당시 류현진이 주도적으로 논의를 진행했으며 마운드 위에서의 배짱을 그대로 보여줬다”고 밝혔다.
“협상은 보라스가 진행했지만 그 상황을 듣고 결정하는 건 류현진의 몫이었습니다. 그는 마이너리그 옵션이 계약 내용에 포함돼 있자 사인하지 않겠다고 버텼고, 보라스는 류현진의 반응을 보며 다저스와 다시 협상을 시작했고요. 그게 계약 마감 5분 전까지 벌어진 상황입니다.”

실력과 배짱으로 6천만 달러 거머쥔 류현진 부모 류재천·박승순의 야구 천재 조련기

1 금의환향한 후 부모님을 꼭 안아드린 류현진. 어머니 박씨의 눈에는 슬쩍 눈물이 비쳤다. 2 박찬호가 19년 전에 입었던 LA 다저스 유니폼을 입은 류현진. 그는 한화 이글스에서 쓴 등번호 99번을 달게 됐다. 3 입단식 직후 미국 LA의 코리아타운에서 진행된 팬사인회. 현지 교민들은 그가 박찬호가 일으켰던 코리안 열풍을 이어주기를 바란다.



류현진은 에이전트에만 의존하지 않고 계약조건을 직접 챙겼다. 마감 5분 전까지 자신의 요구조건을 밀어붙였다. 무사 만루에서 등판한 구원투수가 무실점으로 막아내듯 협상 마감 30초 전 다저스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어냈다. 거물 에이전트 보라스도 혀를 내둘렀다. 6년 연봉 3천6백만 달러, 5년간 성적이 좋으면 자유롭게 팀을 옮길 수 있다는 조건에 사인했다. 깊은 숨을 내쉰 류현진은 바로 부모에게 전화했다.
“협상 잘됐어요.”
본격적인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부부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지도, 아들에게서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집 밖에 나가지 않고 밤새 기다리다 전화기 너머로 아들의 담담한 목소리를 들었다. 류재천 씨는 “계약하던 날 밤새 너무 신경을 써서 다음 날 집 밖에 한 발도 못 나갔다”고 털어놨다. 계약 소식을 듣고 놀라 울먹이기도 했다는 박승순 씨는 “혼자 큰일을 해낸 것을 보니 다 컸더라”며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류현진의 LA 다저스 입단식은 바로 진행됐다. 아버지 류씨는 “입단식을 가려고 했으나, 협상이 완료된 직후 다저스에서 바로 공식 입단식을 하는 바람에 가보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내비쳤다. 하지만 박씨는 “한국에서도 입단식을 하기로 했다. 그때 보면 되지 않겠느냐”며 미소 지었다.

박찬호 키드 이어 류현진 키드 나오길 바라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코리안 특급 박찬호의 분투를 보고 많은 학생이 제2의 박찬호를 꿈꿨다. 야구 붐을 이끈 그의 뒤를 이어 메이저리그로 떠난 선수들만 11명. 하지만 대부분 실패를 맛봤고,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다 국내에 복귀했다. 국내에서도 적응하지 못해 아예 야구를 그만둔 선수들도 있다. 그중 성공 사례는 추신수 하나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류현진은 13번째 메이저리거로 이제 막 이름을 올렸고, 성공을 점치기는 아직 이르다. 실패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류재천 씨는 아들의 성공을 기원한다. 한국 야구의 발전을 위해서다.
“현진이는 박찬호를 보고 컸고, 또래 골프선수들은 박세리를 보고 컸습니다. 저는 지금 운동하는 초·중학생과 부모들이 현진이를 보고 야구선수의 꿈을 키웠으면 합니다. 2000년대 초에 박찬호 키드, 박세리 키드가 있듯 앞으로 류현진 키드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부부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할 예정이다. 아직 미혼인 아들을 옆에서 살뜰히 챙겨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3년 전 미국으로 유학 간 큰아들 현수 씨도 LA에서 류현진과 함께 지낼 예정이라고 한다. “앞으로는 두 아들 장가 보낼 일만 남은 것 같다”고 했더니 박씨는 “좋은 사람 있으면 빨리 장가보내고는 싶은데, 아직은 나이가 어린 것 같다. 제 짝은 제가 알아서 찾겠죠”라며 웃었다.
류재천, 박승순 부부와의 대화가 끝날 무렵 플래시 소리와 함께 입국장 문을 열고 류현진이 등장했다. 귀국 직후 공식 인터뷰를 통해 류현진은 “(LA 다저스 입단은) 개인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는데 잘 해결돼 다행이다.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 잘해야 한다. 입단 기자회견에서도 밝혔듯이 두 자릿수 승과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싶다. 미국에서 알아주는 선수가 되는 것이 목표”라며 자신의 꿈을 밝혔다. 인터뷰가 끝난 뒤 류현진은 주변을 돌아보다 부모님을 발견하곤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한 달 만의 해후. 아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번갈아가며 꼭 안았다. 이들의 포옹에서 부모에게 감사하는 아들의 마음이,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부모의 마음이 느껴졌다.

메이저리거 류현진 만든 특별한 요소

1 서클체인지업
류현진의 필살기. 일반적인 체인지업과는 달리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말아 공을 손으로 감싼 뒤 던지는 구종이다. 류현진은 데뷔 직후 한화 이글스의 전설급 투수인 송진우와 구대성에게 직접 이를 배웠다. 보통 한 구종을 배우기까지는 몇 달 이상 걸리는데 그는 단 2주 만에 배워 실전에서 사용했다. 특히 류현진의 서클체인지업이 유명한 것은 직구와 같은 투구 폼으로 던져 타자들이 착각하기 때문이다. 타자들은 그의 서클체인지업에 대해 “눈앞에서 공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는다”라 평한다. 이것이 필살기라 불리는 이유다.

2 한화 이글스
류현진의 심신을 단련시킨 일등공신. 2008년 말 하위권으로 떨어진 한화 이글스는 2009년에는 주축 선수들의 해외 진출 및 군입대, 고령화 등으로 인해 선수층이 얇아졌다. 그 사이에서 류현진은 고군분투하며 ‘소년가장’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2012년은 속으로 앓는 날이 늘어났다. 10월 4일 열린 시즌 마지막 경기는 최근 몇 년 그의 상황을 요약한 셈이 됐다. 그는 무려 10이닝까지 1실점, 12탈삼진으로 넥센 히어로즈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타선이 터지지 않았고, 이날 경기는 무승부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개인 최고 기록인 한 시즌 2백10개의 삼진을 얻어냈다. 1승만 더 하면 7년 연속 10승 달성과, 자신의 등번호와 같은 한국 통산 99승을 채울 수 있었지만 모두 이룰 수 없는 꿈이 됐다.

3 좌투우타
그의 프로필에는 ‘좌투우타’라 적혀 있다. 그가 왼손을 쓸 때는 오로지 공을 던질 때다. 일상생활과 타격은 오른손으로 해결한다. 우리나라 프로야구는 지명타자제도를 도입해 9명의 타자가 나와 투수의 타격을 볼 수 없다. LA 다저스가 속한 내셔널리그는 지명타자제도가 없어 투수가 타석에 서는 일이 잦다. 그간 볼 수 없던 류현진의 타격을 메이저리그에서 볼 수 있을 전망이다. 류현진은 동산고 시절 4번 타자로 뛸 만큼 타격에도 소질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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