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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LIFE IN HOKKAIDO

선술집, 스키, 오타루 여행

나는야 홋카이도의 무인역장

글&사진·황경성 일본 나요로시립대학 보건복지학부 교수, 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13. 01. 08

소화기의 분말처럼 순식간에 주위를 하얗게 덮어버린 눈은, 내년 봄까지 새로 내린 눈이 먼저 내린 눈 위에 가을 낙엽처럼 차곡차곡 쌓일 것이다. 1m씩 쌓여 옴짝달싹하기 힘든 설국에서 홋카이도 사람들은 무엇을 하며 긴긴 겨울을 견뎌낼까.

선술집, 스키, 오타루 여행

1 매년 2월 오타루 운하를 중심으로 열리는 눈빛거리축제.



내가 살고 있는 나요로 시는 북위 44.37도 동경 142.46도로 한반도보다 훨씬 위쪽에 있다. 같은 홋카이도 내에서도 눈이 적고 비교적 따뜻한 동쪽 지역과는 대조적으로 매서운 추위에 눈이 많이 내리기로 유명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12월 16일 새벽 4시, 바깥 기온은 영하 19.2℃. 일주일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1m 이상 쌓여 웬만한 일로는 바깥 출입을 엄두도 내지 못한다. 홋카이도의 겨울은 한마디로 눈, 추위와의 동고동락(同苦同樂)이다.
올해 첫눈은 예년에 비해 한 달 가까이 늦었을 뿐 아니라, 따뜻한 날씨가 계속돼 방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주일 전 눈폭탄이라는 말을 실감하고도 남을 만큼 눈이 내리더니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내딛을 수 없게 됐다. 2004년 홋카이도로 이주해 웬만큼 폭설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으나 이번 눈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엄청난 양이었다. 소화기의 분말처럼 순식간에 주위를 하얗게 덮어버린 눈은, 내년 봄까지 새로운 눈이 먼저 내린 눈 위에 가을 낙엽처럼 차곡차곡 쌓일 것이다.
폭설이 온 뒤에는 찻길인지 보도인지 논두렁인지 구분이 안 돼, 운전 중 조금만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도로 옆에 쌓아놓은 눈구덩이 속으로 처박히기 십상이다. 시내는 양옆으로 쌓아둔 눈 때문에 평소 4차로는 2차로로, 2차로는 1차로로 좁아진 상태. 예년 같으면 적어도 첫눈이 내리고 한 달쯤 지나야 펼쳐지는 광경이다. 물론 연구실에서 바라보는 도시 풍경은 낭만적이다. 하얀 크림을 나이프로 날렵하게 밀고 나서 몇 개의 초콜릿과 딸기로 장식해놓은 생일 파티 케이크가 떠오른다. 하얀색 페인트를 통째로 들이부어도 이보다 더 하얄 수는 없을 것 같다.
눈이 쉬지 않고 내리다가 잠시 멈추면 시내 도로 안과 밖에서, 그리고 지붕 위에 올라 눈을 치우는 사람들로 진풍경이 연출된다. 나도 인부들과 함께 지붕 위의 눈을 밀어내렸다. 우리 집은 마당이 넓어서 인력으로는 눈을 치우는 것이 불가능해 제설차가 거의 매일 와서 눈을 치워준다. 겨울에 일거리가 적은 토목건설업자들에게는 이런 많은 눈이 고마울 따름이다. 요즘은 새벽 4시쯤 제설차의 굉음에 놀라 잠을 깨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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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온통 눈으로 뒤덮인 오타루 운하. 3 ‘낭만관’이라는 이름의 유리공예품을 파는 가게 내부. 4 카페 닛싱의 지붕 위에 밤새 쌓인 눈을 치우는 모습. 5 나요로시립대학 학생들과 이자카야 ‘비스트로’를 찾아 한잔하던 날.



이자카야 ‘비스트로’에서 여러분도 한잔
홋카이도 사람들은 이 눈 속에서 긴 겨울을 어떻게 보낼까. 첫 번째 해답은 시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음식점들이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자카야로 불리는 선술집이 유독 많다는 것을 안다. 추위를 피해 이자카야에 끼리끼리 모여 한잔씩 하면서 담소를 나누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정착했다.
술을 즐기지 않는 나이지만 가족과 함께 유일하게 들르는 이자카야가 있다. ‘비스트로(Bistro)’라는 이름의 이 선술집은 고전적인 인테리어에 1백 가지 넘는 메뉴를 자랑한다. 그 가운데 숯불에 구운 닭꼬치구이가 유명하다. 주인의 인심만큼이나 넉넉한 크기 때문에 점보꼬치구이라는 애칭이 붙어 있다. 가게에 들어서면 대형 숯 화덕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 화덕 위에서 다양한 생선과 채소가 여름날 모깃불 연기 같은 빨간 불씨를 뿜어 올리며 보기에도 먹음직스럽게 구워진다. 비스트로 숯불구이 맛의 비결은 바로 이 양질의 숯에 있다고 한다.
우리 가족은 비스트로의 주인 오가와 가쓰히코(小川勝彦) 씨와 가족처럼 지내는데, 3년 전 내가 연수차 런던대학에 1년간 머물게 됐을 때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오가와 씨의 딸 치사(知紗)가 영국에서 어학연수를 하게 돼 동행을 부탁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장래 의사가 꿈인 치사 양은 올해 세계적 명문인 UCL(University College London)에 합격해 생의학부에 재학 중이다. 이처럼 사람의 인연은 어디서 어떻게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자카야 비스트로의 저녁 시간은 일시에 사람이 몰려 눈코 뜰 새 없이 주문이 들어가고 음식이 나온다. 비스트로는 러시아 말로 ‘빨리’라는 뜻. 19세기 중반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파리에 입성한 러시아 연합군들이 카페에 몰려와 빨리 마실 것을 달라며 “비스트로 !비스트로 !”라고 외친 것이 어원이라 한다. ‘빨리빨리’를 선호하는 한국에 딱 맞는 이름인데, 느긋한 홋카이도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게 흥미롭다는 생각을 하며 특제 닭꼬치구이를 천천히 음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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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폭설이 내린 뒤 기차를 타고 차창 밖을 바라보면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다. 2오타루 운하 양쪽에 늘어선 옛 창고들이 카페로 개조돼 관광객들을 맞는다.





마을 곳곳이 스키와 크로스컨트리 코스
홋카이도의 겨울나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스키와 크로스컨트리다. 홋카이도 사람들은 겨울이면 일상으로 스키나 크로스컨트리 같은 눈과 관련된 스포츠를 즐기며 건강을 유지한다. 시즌이 시작되면 일시에 인파가 몰려 리프트 타기도 힘든 한국의 스키장과는 딴판이다. 기차를 타고 스키장 주변을 지날 때마다 스키 타는 사람보다 리프트 숫자가 더 많은 것을 본다. 그런 스키장들이 홋카이도 전역에 널려 있다.
홋카이도의 구릉지대는 봄부터 가을 수확기까지 옥수수나 감자가 심어져 온통 녹색이지만 겨울이 시작되고 흰 눈으로 뒤덮이면 자연스럽게 크로스컨트리 코스가 된다. 크로스컨트리를 즐기는 사람들을 멀리서 바라보면 개미들이 줄지어 행진하는 것 같다. 크로스컨트리가 별건가. 올겨울에는 우리 가족도 스키 장비를 빌려 너른 마당을 돌며 크로스컨트리를 하기로 했다. 이렇게 스키와 크로스컨트리로 몸을 풀고, 스시를 먹고, 온천에 몸을 푹 담그는 홋카이도의 겨울, 지루할 틈이 없다.
운하의 도시 오타루(小樽)는 홋카이도 여행 필수 코스의 하나다. 특히 1999년 한국에서 개봉된 일본 영화 ‘러브레터’의 인기 덕분에 오타루를 찾는 한국인들이 많아졌다. 우리 가족이 홋카이도에 정착한 초기에는 한국에서 손님이 오면 제일 먼저 오타루로 안내했다. 오타루 자체가 볼거리가 많은 곳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삿포로에서 열차로 30분 남짓한 거리를 구불구불 해안선을 따라 달리며 볼 수 있는 풍경 때문이다. 짙푸른 겨울바다와 선명하게 대비되는 선로 주변의 하얀 눈, 고즈넉하게 자리한 해변 역까지 덤으로 볼 수 있다. 영화 ‘러브레터’의 무대가 된 제니바코 역에 오타루칫코(小樽ちっこ) 역까지 세 개의 역 가운데 어디에 내려도 그림 같은 풍경이다. 어느새 여주인공 나카야마 미호(中山美穗)의 청순한 모습이 떠오른다.

영화 ‘러브레터’의 추억을 찾아 떠나는 오타루 여행
이처럼 일상에서 쌓인 먼지 같은 불순한 기억들을 씻어내면서 오타루에 도착하면 인공적인 아름다움이 여행객을 맞이한다. 오래전 항만도시로 번성했던 오타루에는 운하를 따라 지어진 옛 창고들이 고풍스럽고 곳곳에 유럽풍 석조건물들이 남아 있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또 오타루의 특산품인 유리공예품을 감상하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다. 유리공예 가게 자체가 독특한 외관과 내부 시설로 역사적 보존 가치를 인정받은 곳도 있고, 공예품을 만드는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곳도 있다. 모처럼 딸을 위해 ‘미녀와 야수’음악이 흘러나오는 깜찍한 보물상자 모양의 오르골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구입했다.
이렇게 눈요기를 한 뒤 지치거나 출출해지면 옛 창고를 개조해 만든 빨간 벽돌 레스토랑을 골라 들어가면 된다. 2월에는 이곳에서 운하의 수면 위를 아이스캔들로 장식하는 등 유리성 같은 환상적인 분위기의 오타루 눈빛거리축제가 열린다.
옛 애인의 영혼이 잠든 먼 산을 향하여 “오겡키데스카(잘 있나요?)”“와타시와 겡키데스(나는 잘 있어요)”라고 두 손 모아 외치던 여주인공의 애틋한 사랑의 메아리가 들리는 듯하다. 영화 ‘러브레터’를 보고 오타루를 방문한 이들이 찾는 것은 옛사랑에 관한 기억인지도 모르겠다.
무인역 바로 옆에 살고 있는 덕분에 단지 몇 걸음의 수고로 올라탄 기차 안에서 도시가 멈춰버린 듯한 창밖을 내다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타인의 불편함을 잊은 채 카타르시스와 소박한 나르시시즘에 빠지곤 한다. 고개를 넘어 설원의 들판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열차의 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풍경은 하나하나가 크리스마스카드 속 그림 같고, 이를 보며 마시는 자판기 커피의 카페인이 나의 흥분을 더욱 고조시킨다. 그리곤 나도 모르게 나지막이 중얼거리게 된다. “여러분 오겡키데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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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닛싱 역의 명예역장 황경성은…
고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서 체육교육을 전공했으나 복지에 뜻을 두고 일본 도쿄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일본 나요로시립대학 보건복지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지역 사회의 문화·예술 진흥에 힘을 쏟고 있다. kyungsungh @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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