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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의 고장 나주를 만나다

글 | 권이지 기자 사진 | 김성남 기자

입력 2012.11.06 09:31:00

영산강이 굽이굽이 관통해 수만 년 세월 동안 기름진 땅을 제공한다. 여름이면 푸릇하게, 가을이면 누렇게 펼쳐지는 평야가 있다. 밤이면 적막마저 아름다워 보이고 푸짐한 밥상은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대대손손 풍요로움을 이어가는 나주는 청(靑) 적(赤) 황(黃) 백(白) 흑(黑) 5가지 색이 조화로운 풍요의 땅이다.
오색의 고장 나주를 만나다


전라도에는 두 도시의 이름이 한데 묶여 있다. ‘전’은 전주를, ‘라’는 나주를 뜻한다. 시간이 흘러 ‘전라’라는 단어는 이 지역을 칭하는 대표적 이름으로 자리 잡았으나 해방 후 나주는 그 영광을 잃었다. 젖줄 영산강에서 태어난 평야가 산업화라는 벽에 부딪히고 만 것이다. 하지만 나주의 흐름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영산강이 오랜 기간 이 땅을 살찌웠듯이 수천 년에 걸친 역사도 5가지 색과 함께 풍요롭게 흐른다. 빛나는 고장 나주에서 몸과 마음을 살찌웠다.

오색의 고장 나주를 만나다

1 나주시 공산면 금강정에서 내려다본 영산강과 나주평야. 2 전남산림자원연구소 산림욕장의 메타세콰이어 길.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아 한적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다. 3 나주 동섬 일대 코스모스 군락.




쪽빛 강물이 마음을 물들이다


오색의 고장 나주를 만나다

5대째 대를 이어 쪽 염색을 전수하고 있는 윤대중 전수교육조교가 자신이 염색한 비단을 펼쳐보이고 있다.





문평면 북동리 명하마을 윤대중(49·중요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 전수교육조교) 씨. 5대째 쪽 염색을 해온 집안에서 평생 염색을 한 그의 거칠고 굵은 손마디와 손톱도 온통 쪽빛이다. 천연염료인 쪽은 한해살이풀로 짙은 푸른색을 만들어낸다. 쪽빛은 한자로 람(藍), 영어로는 인디고 블루다.
공방 뒤편 마당에는 쪽이 추수를 앞두고 기다리고 있다. 며칠 뒤에는 그곳이 허허벌판이 될 거란다. 추수한 쪽들은 조만간 염료로 만들어진다. 전수관 앞에는 굴 껍데기가 산을 이뤘다. 굴 껍데기를 흙에 묻고 구워 천연 석회를 만들기 위해서다. 예부터 천연염색의 재료는 모두 자연에서 얻어왔다. 집집마다 아궁이에 불을 때기 시작하는 추수가 끝난 가을은 염색의 적기다. 불을 때면 쪽을 발효하기 위한 재가 나오고, 방 안에서 발효에 적당한 온도를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10월 3일 명하쪽빛마을에서는 제1회 쪽 축제가 열렸다. 윤씨와 마을 사람들이 함께 준비한 것이다. 윤씨는 천연 쪽 염색 체험뿐 아니라 압화 체험, 농산물 수확 체험 등 10가지가 넘는 체험을 준비했는데, 별다른 홍보 없이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몸살이 날 정도였다며 웃었다.

오색의 고장 나주를 만나다

1 없는 것 빼고 다 있다고 자부하는 유서깊은 명소, 영산포 풍물시장. 2 홍어 특유의 냄새로 가득한 홍어의 거리. 이곳 주민들에게는 없어선 안 될 별미다.




코를 찌르는 냄새 중독적인 맛, 영산포 홍어

전라도 명물 홍어. 홍어는 가오릿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로 몸통은 마름모꼴이다. 홍어 하면 산지인 흑산도를 으레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흑산도에서 영산강을 따라 영산포까지 먼 길을 올라오면서 곰삭여져 별미가 됐으니 영산포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교통의 발달로 포구 기능을 상실해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는 영산포 선창 주변은 온통 홍어천지다. ‘홍어의 거리’에 들어서면 코를 찌르는 암모니아 냄새가 가득하다. 처음에는 ‘꼬리한’ 향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지만 냄새에 익숙해지면 입맛이 돌기 시작한다.
영산포 포구에서 홍어의 거리 쪽으로 들어가면 멀지 않은 곳에 풍물시장이 있다. 원래는 영산포장이었다. 나주의 3대 5일장 중 하나로, 포구가 활발하던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역사 깊은 장이다. 당시에는 목포, 영암 등 서남해안을 대표하는 장이었으나 영산포가 기능을 잃으면서 이곳도 쇠락했다. 영산포장이 지닌 역사를 지키기 위해 시장은 자리를 바로 옆인 이창동으로 옮겼고, 중앙에 풍물광장을 갖추면서 풍물시장이란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현대화돼 옛 장의 느낌은 사라졌지만, 없는 게 있다면 대형마트의 카트뿐, 오히려 ‘덤’을 하나 더 얻을 수 있을 만큼 인심만은 그대로다. 장날은 매달 5, 10, 15, 20, 25, 30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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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금빛으로 물든 나주평야는 이 지역의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2 내륙의 뱃길을 책임진 영산포 등대와 강물 따라 바람 따라 오가는 황포돛배는 영산강의 명물이 됐다.




황금빛 평야 가로지르는 황포돛배

영산강 위를 유유히 노란 돛 펼치고 오가는 배가 있다. 나무 몸통에 사각 돛을 단 황포돛배다. 예전에는 영산강영상테마파크에서 체험할 수 있던 것을 9월 말부터 영산포로 옮겨 운항 중이다. 내륙의 유일한 등대라는 영산포 등대가 자리 잡은 이곳에서 오가는 배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황포돛배고 또 다른 하나는 96t 규모의 왕건호다. 두 배 모두 영산포 선착장에서 회진(구진포)까지 왕복하는 유람선이다. 왕건호는 1일 2회(오전 11시, 오후 2시) 운항하고, 최소 운항 인원 28명을 채우지 않으면 뜨지 않는다. 황포돛배는 1, 2호가 있는데 1일 6회(오전 10시, 낮 12시, 오후 1시, 3시, 4시, 5시) 운항한다. 최소 인원 3명 이상이면 운항하며 약 10km 거리, 55분 정도가 소요된다.
나주평야는 나주의 얼굴이다. 나주영상테마파크 인근 공산면 금강정 위 언덕에서 내려다본 땅은 추수가 끝나지 않아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굵은 강물 양옆으로 펼쳐진 나주평야는 전남 일대 평야 중에서 가장 지형이 평탄한 축에 속한다. 풍부한 수량, 비옥한 토질로 전라 지역의 곡창이라 불렸던 이곳은 그로 인해 일제강점기 때 수탈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나주평야에서 생산된 쌀은 영산포항을 통해 빠져나갔다. 영산포항 인근 영산동에는 수탈의 흔적인 동양척식회사 문서고, 일본인 지주가 거주했던 구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저택, 금융조합 등 일본식 건물들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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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주목사가 살던 나주목사내아 금학헌. 2 든든히 속을 지켜주는 나주곰탕.




나주목사내아 달빛 아래 하룻밤, 전통의 맛 나주 곰탕

나주는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한 54소국 중 하나인 ‘불미국’으로 불렸다. 삼국시대 백제에 속할 당시에는 ‘발라’로, 통일신라시대에는 ‘금산’으로 불렸으며 고려시대에 와서야 ‘나주’라는 이름이 역사 속에 처음 등장했다. 특히 고려 현종 때 ‘전라주도’에서 비롯된 만큼 나주는 전통적인 호남의 대표 도시였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을 8도 행정구역으로 나눴다. 지방의 최고 책임자는 각 도의 관찰사이며 수령은 부윤(종2품), 대도호부(정3품), 목사(정3품) 순으로 두었는데 나주는 당시 나주목에 속했고, 나주목사의 관리를 받았다. 호남 지역의 행정 중심지였던 나주읍성에는 사대문이 있다. 동점문, 서성문, 남고문은 복원됐고, 북망문만이 복원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으로 치면 호텔이라 할 수 있는 나주목의 객사 금성관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객사의 형태가 완벽하게 남아 있다.
금성관 바로 옆에 위치한 나주목사내아(www.najumoksanaea.com 061-330-8831) 금학헌은 나주 일대를 다스리던 나주목사가 살던 집으로 지금으로 치면 관사다. 1980년대 후반까지는 실제로 나주군수가 거주했으나 2009년 한옥 체험 공간으로 바뀌었다. 이곳에는 특별한 두 개의 방이 있는데,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유석증 목사와 김성일 목사의 이름을 딴 방이다. 두 방에서 숙박하면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긴다고 소문이 나 예약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내아 안에는 5백 년 동안 이곳을 지켜온 팽나무가 있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 이 팽나무에 벼락이 내리쳤는데, 나무가 두 동강 나고 말았다. 큰 충격을 받았으니 말라 죽을 법도 한데 나무는 질긴 생명력으로 지금까지 그 자리에 있다. 행운이 깃든 이 나무에 손을 대고 소원을 빌어본다. 유석증 목사 방에서 뜨끈한 하룻밤을 보낸 뒤 근처 곰탕 거리로 향했다. 나주의 대표 음식으로 자리 잡은 나주곰탕은 뼈를 쓰는 다른 지역의 탕과 달리 살코기인 양지와 사태를 끓여 육수를 만든다. 안개가 자욱한 아침 일찍 노안곰탕(061-333-2053)집에 들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뚝배기가 눈앞에 놓인다. 곰탕이라 하면 흔히 생각하기 쉬운 뽀얀 국물이 아니라 맑은 국물이다. 한 숟갈 떠보니 시원하고 담백한 맛이 속을 살살 달랜다. 부드러운 살코기가 푸짐한 곰탕 한 그릇을 마시다시피하니 기운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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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 트기 전 영산강 일대 풍경. 2 보양식으로 제격인 구진포 장어.




묵향 풍기는 영산강의 새벽

새벽에 들른 영산강. 강이 만들어낸 작은 섬인 동섬을 찾았다. 나주종합스포츠파크 부근에 위치한 이 섬은 원래 영산강 보의 건설로 물에 잠길 뻔 했으나, 시민들의 건의로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만 태풍 볼라벤의 여파를 벗어나지 못해 굵은 나무 몇 그루는 쓰러져 있었다. 동섬은 봄에는 유채꽃이 만발하고,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피는 꽃섬이다. 일출이 아름다워 출사객들의 단골 코스라 하기에 이를 보러 나왔으나, 해는 구름이 품었는지 온데간데없고 물을 머금은 향기만이 영산강 주변을 맴돌았다. 눈앞에는 수묵화 절경이 펼쳐졌다. 그 사이로 새벽녘부터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자전거도로를 질주한다. 4대강 사업을 통해 자전거길이 완성됐기 때문이다.
황포돛배 매표소 앞에서 만난 주민에게서 신흥장어(061-335-9109)를 추천받았다. 나주의 3대 먹을거리 중 하나인 구진포 장어를 맛보라는 뜻에서다. 영산포에서 강 하류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위치한 구진포는 항구의 기능은 상실했으나 장어는 여전히 이곳을 지키고 있다. 1940년대부터 구진포 부근에는 10여 곳이 넘는 장어집이 들어서 구진포 장어 거리가 생겨났다. 지금은 자연산 장어가 잡히지 않아 양식 장어를 판매한다. 등은 검고, 배는 희고, 껍질은 쫄깃하고 흰 살은 포실하다. 주로 소금구이나 양념구이를 해서 먹는데, 장어 특유의 느끼한 맛을 덜기 위해 생강채와 특제 소스를 곁들인다.

여성동아 2012년 11월 5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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