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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한 한국말’을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독일인 주부 유디트의 좀 다른 시선

기획 | 한여진 기자 글 | 유디트 사진 | 동아일보 사진DB파트

입력 2012.11.01 11:08:00

‘공평한 한국말’을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1 올해로 한국에서 13번째 한글날을 보냈다. 나는 한글이 참 좋다. 한글은 배우기 쉽기 때문이다. 한글의 구조는 이해하기 쉽고 간단하면서 논리적이다. 한글은 한국어에 딱 맞는 문자다. 한글은 정말 완벽하다. 한국어 초급과정 수업에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후 나는 매일 기분이 좋고 뿌듯했다. 일주일 만에 한글 자모를 다 익혔을 때 나는 “와, 이미 다 배웠네! 나 참 똑똑하다!”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금방 깨달았다. 내가 똑똑한 것이 아니라 한글을 만든 이가 정말로 똑똑하다는 사실을. 이렇게 실용적인 문자를 만든 세종대왕은 참 훌륭하다! 외국 사람인 나도 세종대왕이 고마웠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시대에는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이 거의 없었겠지만, 오늘날에는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 사람들이 많다. 당연히 오늘날 세종대왕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외국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한글을 배워본 외국인이라면 누구나 세종대왕을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한글을 배우면서 ‘사랑하는 내 남편이 중국인이나 일본인, 아랍인이 아니고 한국 사람이어서 다행이다!’라고 수없이 생각했다. 남편 때문에 한글을 배워야 하는 외국 여자들은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한글은 최고다!”

2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은 문자뿐만 아니라 어휘와 문법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문화도 배워야 한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해야 언어도 제대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아주 복잡한 과정이다.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 사람에게도 부딪히고 이해하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 여럿 있다. 예를 들어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들은 존댓말과 반말의 차이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다. 언제 어떤 말을 사용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상대방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사실 한국 문화는 한글보다 외국 사람들을 더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3 한국어 수업에 다니기 시작한 첫날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배웠다. 한국어를 전혀 못했지만, 나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아가씨를 왜‘선생’이라 부르면 안 되고 ‘선생님’이라 불러야 하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이 나보다 한국어를 잘하니까, ‘그 사람’이 나에게 도움을 주니까, 나는 ‘그 사람’에게 존중하는 의미로 ‘님’자를 붙여야 하는 것이다. 나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그 사람에게 ‘님’이라는 존칭어미를 붙이면 나는 그 사람이 훌륭하고 고마운 분이라는 것을 말로써 인정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도 있다. 내가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를 왜 ‘어머님’이나 ‘아버님’이라 불러야 하는지도 금방 이해했다. ‘님’이 존경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호칭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4 그런데 시간이 지나 대학교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 갑자기 ‘님’의 사용법에 대해 궁금증을 갖기 시작했다. ‘교수님’, 이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하! 직업에도 ‘님’을 붙여야 하네! 한국어 선생님이 이런 것을 왜 한국어 수업시간에 안 가르쳐주셨지?’ 시간이 좀 지났을 때 내 머리는 더 복잡해졌다. 직업에 ‘님’자를 붙여 쓴다고 생각한 내가 틀렸다는 것을 곧 알게 됐다. ‘우리 옆집에 교수님이 사셔’ 또는 ‘어제 내가 변호사님을 만났어’와 같은 표현은 한국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지만, ‘우리 옆집에 농부님이 사셔’ 또는 ‘어제 내가 경비원님과 얘기했어’와 같은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말을 잘 못 했을 때는 이유를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느라 무척 머리가 아팠다. 한국에서 산 지 12년이 흐른 지금, 나는 거의 확실히 안다. ‘우리 옆집에 농부님이 사셔’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한국 사람은 존대법을 지나치게 사용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만약 누군가 ‘우리 옆집에 교수가 살아’라고 말하면 예의 없고 심지어 교수를 얕본다는 오해를 받게 된다.
교수나 변호사를 직업으로 가진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왜 반드시 ‘교수님’ 또는 ‘변호사님’이라 말해야 하는지 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내가 배운 한글의 엄격한 논리에 맞춰 내 의견도 솔직히 털어놓고 싶다. 위의 예에서 ‘농부님’이라는 지나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 직업에는 존경을 표현하는 ‘님’자를 붙일 필요가 없다. 그런데 많은 한국 사람들은 ‘농부’라 말했다가 갑자기 ‘교수님’이라 말한다. 계속 이처럼 혼돈스럽게 ‘님’자를 사용하는 한국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이렇게 묻고 싶어진다. 한국 사람들은 농부가 교수보다 가치가 낮은 직업이라는 사실을 수시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인가? 교수는 반드시 존경해야 하지만 경비원이나 농부는 얕봐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5 ‘님’자를 어디에 붙이고 어디에 붙이지 않는지는 문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의식의 문제이고 문화의 문제다. 그리고 문화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민주국가인 한국에 이런 ‘차별’을 전제로 하는 언어 사용법과 사고방식이 어울리는 것인지 묻고 싶다.
명확하고 논리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음이 분명한 세종대왕님(!)이 이런 차별이 옳다고 생각하셨을 리 없다. 세종대왕님은 이 ‘차별하는 한글 사용법’에 책임이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우리 옆집에 농부님이 살아’ ‘우리 옆집에 교수가 살아’, 이 둘 중 어느 한쪽으로 ‘님’자 사용법을 통일하는 것을 세종대왕님도 추천하지 않으실까? 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공평하게 한글을 사용할 때, 한글이 더 우수해지고 한국말도 더 아름다워지는 것 아닐까?

‘공평한 한국말’을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공평한 한국말’을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유디트(41) 씨는…
독일에서 정치철학을 전공하고 독일로 유학 온 한국인 남편을 만나 한국으로 왔다. 현재는 강릉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 강의를 나가면서 강원도 삼척에서 남편과 고양이 루이, 야옹이와 함께 살고 있다.

일러스트 | 한은선

여성동아 2012년 11월 5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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