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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의 이야기꽃 피었습니다

‘시인의 서랍’엔 사람 사는 냄새가 진동하네

글 | 이소리(시인, 문학in 대표) 사진 | 조영철 기자

입력 2012.10.15 17:52:00

천안에서 달려온 그에게 등단 23년 만에 낸 첫 산문집 ‘시인의 서랍’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이 뭐냐고 묻자 “깨 벗고 놀기!”란다. 48년 이정록의 삶이 숨김없이 까발려져 있기 때문이다. ‘시는, 온몸으로 줍는 거다’라고 말하는 그는 “별보다 별똥별에 대해, 무지개보다 무지개떡에 대해” 쓰는 시인이다.
이정록의 이야기꽃 피었습니다


이정록(48)이 등단 23년 만에 첫 산문집 ‘시인의 서랍’을 펴냈다. 1989년부터 이곳저곳 발표한 산문을 이리 깁고 저리 새겨 넣은 책이다.
“시로는 다 표현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거든요. 솔직히 말해 시보다 산문이 원고료도 좋고. 술값이 필요했죠. 그래서 한 달에 한 꼭지씩 썼는데 20여 년 지나니 3천여 장이 되는 거예요. 그 가운데 마음에 드는 글을 3분의 1쯤 모았죠.”
술값 때문에 쓴 글이라고 객쩍은 소리를 하지만 이 산문집, 사람을 웃기다가 울린다. 한 번 잡으면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 ‘시인의 서랍’에 대해 그는 “내 인생의 종합보고서이자 추억의 사진첩, 약상자”라며 “제 상처와 동행하며 빨간약 좀 발라보시면 책 말미에 가서는 독자 여러분이 시인이 돼 있을 것이다”라고 장담한다. 괜한 말이 아니다.

“할머니와 어머니, 누나, 아내가 내 글과 삶의 스승”
어머니의 편지는 정말 아름다운 상형문자이지요. 학교 문턱이라고는 자식들 운동회 가본 게 전부인지라, 어머니의 한글에는 거의 받침이 없지요. 어머니의 한글을 볼 때마다 받침 무용론이라도 펴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요. 제가 군 복무할 때 받았던 어머니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었어요.
“사라하느 내 아더라.”
그걸 읽는데 어찌나 눈물이 솟던지. ‘울컥’이란 말을 새삼 깨달았지요.(‘교무수첩에 쓴 연애편지’에서)

그는 산문집 1부 ‘밥상머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가족 이야기로 입걸음을 뗀다. 그는 어릴 때 부엌을 드나들며 식솔들의 밥상을 차려내던 어머니의 한숨을 들었다. 낮술 한잔 걸치고 문지방을 베고 누워 잠을 자던 아버지의 부어오른 배도 보았다. 냇가에서 놀다 배탈이 난 손자의 배를 밤새 쓰다듬어주던 할머니의 거친 손은 약손이었다. 남동생(시인)에게 학교를 양보하고 무논가에서 냉이와 씀바귀를 캐던 누나의 뒷모습은 쓸쓸했다. 어른이 돼서는 결혼반지를 팔고도 보름달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던 아내가 못내 안쓰러웠다. 그는 “할머니와 어머니, 누나, 아내가 내 글과 삶의 스승”이라고 털어놓았다.

“돈이니 여자니 술이니 화투니, 재밌고 따순 햇살만 좇아다니먼 패가망신 쭉정이만 수확허니께, 그늘 농사가 더 중허다고 말이여. 걱정거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겄냐? 그 그늘진 담벼락에서 고추도 나오고 취나물도 나오는 거니께 말이여. 어미 말이 어떠냐?”(‘세상 모든 말의 뿌리는 모어母語다’에서)



그가 이번 산문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바로 어머니 말씀을 그대로 옮겨 적은 윗글이다. 이렇게 어머니 말씀은 받아 적는 대로 시가 된다. 어느 날 눈치 빠른 어머니가 부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아들에게 이야기보따리를 풀다 말고 묻는다. “이런 얘기도 시가 되냐?” “시 쓰려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럼 뭐 하러 새꼼맞은 얘기는 허라고 허냐.” “그냥 얘기하고 싶어서 그래요.” “웃기지 말어. 네가 쓰는 시라는 거 거짐 내 얘기 받아 적은 거라고, 먼젓번에 왔던 글 쓴다는 네 선배가 그러드라. 너 그러니께 이 어미헌티 잘혀. 글삯 받으면 어미한티도 한몫 떼주고 말이여.” 아들은 어머니를 당할 수가 없다.
“어머니는 나를 껴안거나 토닥여주시지 않았습니다. 적정한 거리에서 날 바라봐주셨죠. 어머니를 안아보고 싶어서 동생을 임신했을 때 배에다 부빈 적이 한 번 있었어요. 그게 기억의 전부입니다. 속이 깊으셨던 어머니는 시어머니 두 분에 농사일에 대가족 건사에 3남2녀 자식들에 쉴 틈이 없었어요. 지금은 잘 웃으시지만 그때는 무표정하셨죠. 그래도 어머니는 만능선수였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제 머리도 깎아주셨거든요.”
어머니의 삶은 갖가지 일에 치여 버거웠지만 아버지의 삶은 만사태평이었다. 그는 “아버지는 긴 수염에 흰 머플러 날리며 말을 타는 게 소원인 로맨티스트였다”라며 “농사일과 가정 경영보다 마을 이장 일과 남의 집 대소사 챙겨주는 일에 더 앞장서셨다”고 되짚었다.
간경화에 설암으로 검디 검은 얼굴을 하고 술만 마시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지. 그런 남편에게 어머니는 지금도 아들이 가져다놓은 교무수첩에 연애편지를 쓴다. 왜 아버지에게서 답장이 안 오냐고 농을 치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당당히 말한다. “꿈결에다 보내. 꿈속에서는 자주 읽어.” “뭔 내용인데요?” “깨면 다 잊어버려. 그래도 매일 밤 잠들라고 하면 막 설레고 가슴이 두근거려. 너한테도 편지 오냐?” “아뇨.” “꼬박꼬박 받침을 쓴 네 편지는 못 읽는 거여. 받침 없는 교무수첩만 보다가 한글을 다 잊어버린 거여.” “어머니께 오는 답장에는 받침이 없어요?” “당연허지. 넌 영어로 온 편지를 언문으로 답장허냐? 받침 없는 글에는 받침 없이 보내는 게 당연한 거여. 나만 혼자 남겨놓고 간 양반이 무슨 낯으로 글자마다 받침을 들이밀겄냐?” 시인은 이렇게 쓴다. “사랑받는 일에서만큼은 정말 아버지가 부러워요”라고.
그는 남들보다 두 살 일찍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동네 아이들한테 자꾸 맞으니까 아버지가 머리를 써서 일찍 초등학교로 피신시킨 것인데, 이 결정이 훗날 누나의 삶에 짐이 될 줄은 몰랐다. 어쨌든 너무 일찍 들어간 학교에서 어린 정록은 공부를 따라갈 수 없는 어려움만큼이나 외롭고 슬펐고 주눅 들어 있었다. 그는 ‘애기’로 불렸고 친구들은 그를 깔보는 재미로 학교에 다니는 것 같았다. 그의 고무신은 늘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때마다 눈물을 훔치며 자갈길을 맨발로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괴로웠던 유년기는 시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뜻밖에도 “외톨이나 왕따가 무조건 나쁜 건 아니다”라고 한다. 잘 하면 시인이나 철학자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란다.

이정록의 이야기꽃 피었습니다


작가란 아픔을 잘 데리고 노는 사람
이정록은 충남 홍성군 홍동면 대영리 황새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중2 때 비로소 전기가 들어온 산간벽지였다. 그 덕분에 소년은 수렵 채취 전문가이자 자연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많은 직접 체험이 언어의 살갗을 쓰다듬고 보듬는데 보탬이 된 것 같아요.”
그는 작가란 “아픔을 데리고 잘 노는 사람”이고 작가의 책무는 “그 고통의 비명을 웃음으로 바꿔서 독자들을 위무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 “현재의 고통도 잘 버무리면 추억이 돼 언젠가는 독자의 웃음보와 눈물샘을 건드리는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괴로웠던 유년시절을 지나 중학생이 된 이정록은 천사처럼 예쁜 국어 선생님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스승의 날 기념 감사의 글짓기가 있었는데 저는 감사할 일이 없었어요. 대신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에 대한 원망을 썼죠. 초등학교 때 돌멩이를 입에 물고 3시간이나 벌을 선 적이 있어요. 같이 벌을 받던 아이들은 벌써 다 도망쳤는데 저만 끝까지 남아 있었죠. 정작 선생님은 그런 벌을 준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고 제게 ‘여태 이러고 있냐? 병신!’ 하셨어요. 그러고는 ‘벌 받다가 늦었다고 하지 마! 부모님 걱정하시니까, 친구들과 놀다가 늦었다고 해!’라고 거짓말을 가르친 선생님에 대한 얘기를 썼죠.”
오순애 국어 선생님은 그에게 입선이라는 상을 주었다. 스물여섯 살의 이정록이 시로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될 때까지 유일하게 받은 상이었다.
“한때 화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중3 때 미술선생님께서 사립고등학교 미술장학생으로 추천해주신다 해서 아버지에게 말씀드렸죠. 아버지가 딱 한 마디 하셨습니다. ‘읍내 동보극장 간판쟁이 젊더라’라고. 그 말은 제가 화가가 돼도 극장 간판쟁이밖에 못할 것이 뻔한데, 동보극장 간판쟁이가 은퇴하기는 아직 젊으니 포기하라는 뜻이었죠.(웃음)”
그렇게 화가의 꿈은 접었지만 대신 첫사랑과 ‘시’가 찾아왔다. 그 무렵 세 살 터울의 누나가 공장에 취직했다. 가난한 집에서 둘씩 고등학교에 보낼 수 없다는 아버지의 말에 결국 누나가 정록에게 양보를 한 것. 누나는 중학교 졸업 후 일 년쯤 농사를 거들다 홍성 읍내에 있는 동화전자주식회사에 취직했다. 누나가 첫 월급을 타서 ‘한국여류수필문학’을 사왔는데 그때 딸려온 시집이 ‘한용운의 명시’였다. 평생 처음 접해본 시집이었다. 마침 까까머리 정록은 어떤 소녀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그때 덜컥 읽은 시가 한용운의 ‘나룻배와 행인’이었으니….
“‘당신은 나를 흙발로 짓밟고 가십니다 그려’란 그 구절이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짝사랑 하던 소녀의 집 바깥 마당이 저수지와 잇닿아 있었는데, 그곳에 작은 조각배가 있었거든요. 그 배 위에는 내 흙발이 찍혀 있었죠. 그때 그 소녀에게 좀 폼 나게 보이려고 시를 베끼고 끼적거린 게 시를 쓰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러니까 제게 ‘한용운의 명시’는 연애편지 교본이었죠. 삽화도 좀 야했어요. 시에 나오는 님은 모두 그녀였죠.”
그 시집을 3년 가까이 가족처럼 가슴에 품고 지냈다. 가난한 농사꾼 집에서 아무리 장남이라도 대학 진학은 버거웠다. 부모님은 “공무원 시험 치라”고 종용했지만 이번에도 너무 일찍 학교에 들어간것이 말썽이었다. 공무원이 되기엔 너무 어렸던 것. 당시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대학 입학 실적을 높이기 위해 아무데라도 원서를 쓰게 했다. “하마터면 약학과에 갈 뻔했죠. 우연히 손에 집힌 원서가 공주사대였어요.”
그렇다고 교사가 마지못해 선택한 직업은 아니다. 이정록의 어릴 때 꿈은 화가, 시인 다음으로 교사였다. 그의 꿈 세 가지 중 두 개가 실현됐다. 그는 현재 아산 설화고등학교 한문 교사로 재직 중이다.
이정록은 1989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와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왜 두 번씩이나 신춘문예에 도전했을까. 여기엔 또 사연이 있다.

“1990년대 초에 어느 출판사의 문학상 신인상을 받고 그 출판사에서 첫 시집을 내기로 했습니다. 시집이 나오기를 학수고대하는 동안 좋은 시가 서너 편 써졌죠. 그걸 들고 장항선 열차를 세 시간이나 타고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그 출판사까지 왔는데 정작 제 시집 원고를 못 찾는 거예요. 어찌어찌 네 시간 뒤 찾긴 찾았지만 다른 원고에 밀려 캐비닛 뒤편에 돌돌 말려 있었습니다. 너무나 어이가 없어 그걸 빼앗아 뛰쳐나왔지요. 눈물이 나서 엘리베이터도 못 탔어요.”
그랬다. 그는 눈물을 훔치며 더 당당한 시인으로 거듭나리라 마음을 다지고 또 다진다. 그 다짐은 이듬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갈무리됐다. 이후 상복도 많았다. 2001년엔 김수영문학상, 2002년에는 김달진문학상을 받았다. 그에게 문학상은 어떤 의미냐고 묻자 갑자기 백일장 타령을 늘어놓는다.
“제가 사는 동네가 천안시 서북구 백석동입니다. 사는 아파트도 백석현대아파트죠. 이곳에선 아파트 주민들을 대상으로 해마다 백석백일장을 엽니다. 올해엔 저도 한 번 참가해서 백석문학상을 받고 싶습니다. 부상으로 선풍기나 밥솥을 주지요. 저는 자전거를 받으면 좋겠습니다. 자전거가 차상 상품이거든요. 어떻게 써야 2등을 할까요?(웃음)”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지금은 피아노 학원을 하는 아내와는 오래 연애를 했다. “시인은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게 지론이라는 그에게 아내와 시 중 하나를 고르라면 누굴 붙잡겠느냐고 짓궂게 물었다.
“청혼을 하면서 이렇게 나불댔습니다. ‘당신은 내 생에 두 번째야. 첫째는 당연 시이지. 하지만 당신을 세 번째로 밀어놓지는 않을 거야’라고요. 그 외곬이 시를 오래도록 생산하게 한 거라 믿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하지요.”
그런 그가 왜 결혼을 했을까. 그는 “독신으로 살기에 열여덟 살의 그녀는 너무 예뻤다”며 “스물다섯 살까지 참았다가 약혼식을 했다”고 고백했다. 시인은 그때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혼인신고부터 했다. 함께 밤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문지방 시학’은 곁에 있는 것부터 껴안고 살라는 것

이정록의 이야기꽃 피었습니다

이정록 산문집 ‘시인의 서랍’, 한겨레출판사.



“상상력이나, 낯설게 하기, 낯익은 것들과의 결별이 창작의 기본이라지만 저는 익숙한 것에서의 낯섦, 평이한 것에서의 깊은 상상을 더 좋아합니다. 자신의 우주가 모이고 모여서 큰 우주가 생기겠죠. 저는 제 깜냥대로 제 믿음 안에서 글을 씁니다. 내 글이 나를 감동시키고 나를 먼저 위무할 것! 내 손때 묻은 것부터 노래합니다. 내가 소리쳐 부를 수 있는 거리 안에서, 내가 품고 속삭일 수 있는 것을 씁니다.”
그는 “시를 쓰며 몸으로 배운 가장 큰 것은 지금 곁에 있는 것부터 껴안고 살라는 ‘문지방 시학’이라고 했다.
“내가 냄새 맡고 내가 쓰다듬을 수 있는 지척의 고통과 어깨동무하기를 좋아해요. 먼 신기루는 제 문학이 아니죠. 그저 아! 감탄과 탄성을 내지를 뿐. 저는 별보다 별똥별에 대해, 무지개보다 무지개떡에 대해 쓰지요.”
시인은 곧 책 두 권을 펴낸다. 하나는 시집 ‘어머니학교’이고 다른 하나는 동화책이다.
“2010년 11월 9일 새벽, 어머니와 한 몸이 돼 잠에서 깼습니다. 장구벌레의 몸을 벗고 나오는 모기 같았죠. 굼벵이 껍질을 벗고 우화하는 매미 같았어요. 몸이 이상했죠. 침대와 천정 사이를 날고 있었어요. 내가 분명했으나, 분명 내가 아니었습니다. 채 어머니로 변하지 않은 오른손이 쏟아지는 어머니의 말씀을 받아 적기 시작했어요. 어머니로 부화하려던 어리둥절한 내 눈망울이 허둥지둥 읽어보고는 눈물을 흘렸죠. 시의 품새와는 사뭇 다르니 시마(詩魔)도 아니고,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지 않았으니 빙의(憑依)도 아니었습니다. 어머니가 시 쓰고 아이들 가르치는 장남인 제게 주는 일인칭의 시였어요. 말씀이셨어요. 놀라운 경험이었죠. 그렇게 써서 모은 시집이 ‘어머니학교’입니다. 다른 한 권은 동화책입니다. 책을 내기까지 15년이나 걸렸어요. 국내 모든 출판사에서 거절당했기 때문이죠. 단추들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프랑스나 중국에서 먼저 출간한 뒤에 국내로 들여오려고 했습니다만 마지막으로 손을 잡아준 출판사가 고맙죠. 내년에는 동시집을 내고 싶습니다. 또, 몇 권짜리 동화책도 쓰고 있어요. ‘행복한 시 읽기’라는 원고도 정리 중입니다.”
‘어머니학교’에 실릴 시 한 편을 슬쩍 훔쳐보았다. 제목은 ‘사그랑주머니’. 사그랑주머니는 다 삭은 주머니라는 뜻이다. 겉모양만 남고 속은 다 삭은 물건, 곧 늙은 어머니를 이르는 말에 다름 아니다.

노각이나 늙은 호박을 쪼개다 보면
속이 텅 비어 있지 않데? 지 몸 부풀려
씨앗한테 가르치느라고 그런 겨.
커다란 하늘과 맞닥뜨린 새싹이
기죽을까 봐, 큰 숨 들이마신 겨.
내가 이십 리 읍내 장에 어떻게든
어린 널 끌고 다닌 걸 야속케 생각마라.
다 넓은 세상 보여주려고 그랬던 거여.

“‘어머니학교’가 곧 출간되는데, 몽땅 어머니의 말씀만 담았습니다. 이제 정말이지 새로이 시인이 된 것 같아요. 무슨 시가 다시 제 몸을 뚫고 나오려는지 기다려집니다.”

여성동아 2012년 10월 5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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