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 선수였던 김씨, 범인 덮치고 복싱으로 단련한 장씨, 아이 구하고”

호프집 사장 장태훈(49) 씨와 장어집 사장 김현옥(43) 씨는 서울 역촌동에서 자영업을 하면서 형 동생처럼 친하게 지내는 사이다. 오후 4시께가 되면 호프집 문 열 준비를 마친 장씨와 점심 장사를 끝낸 김씨는 종종 장씨의 가게 앞 파라솔에서 망중한을 즐기곤 한다. 초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6월 26일도 그랬다. 두 사람은 여느 때처럼 슬리퍼도 벗고 파라솔 의자에 편하게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가게 옆 골목 쪽에서 ‘악’ 하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운동선수 출신인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명 소리가 예사롭지 않더라고요. 사람이 정말 절박할 때 내지르는 비명 같았어요. 무슨 일인가 싶어 동생이 맨발로 먼저 달려 나가고, 나는 신을 신고 뒤따라갔죠.”(장태훈)
소리가 나는 곳에선 남녀가 아기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아이 엄마로 보이는 여자는 어린 두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큰아이는 엄마 치마를 붙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부부싸움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남자가 허리를 숙여 유모차에 탄 아이 중 한 명을 들어 4차선 도로 쪽으로 내달렸다. 납치 사건임을 알아챈 두 사람은 동시에 ‘저놈 잡아라’ 소리치며 뒤쫓았다. 범인은 상황이 여의치 않자 아이를 차도에 던지고 달아났다. 순간 김씨가 달아나는 범인을 덮쳤고, 이후 달려온 장씨가 가세해 아이를 무사히 구해냈다. 당시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했던 경찰관은 “우리가 출동했을 때 이미 범인이 제압돼 있었다. 자칫하면 아이가 납치되거나 다칠 수 있었는데, 두 분이 빠르고 침착하게 대응해 큰 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장씨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진땀이 난다고 한다. 직장에서 해고된 것에 대한 분풀이로 길에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아이를 납치하려 했던 범인이 여간 강골이 아니었다고. 두 사람이 위급한 상황에서 용감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건 어릴 때부터 운동을 해 힘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남 고흥 출신인 장씨는 중학교 때까지 복싱을 했고, 김씨는 초등학교 때 씨름을 하다가 중학교 때부터는 선생님의 권유로 유도로 전환, 한때 국가대표를 꿈꾸기도 했다고 한다.
“형님과 제가 평소 잘 통하는 것은 동향 출신인 데다 한때 운동을 했다는 동질감 때문이죠. 이번에도 소리를 듣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뛰어나갔어요. 운동을 한 사람들은 반사 신경이 발달해서 위기 상황에 조금 더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죠.”(김현옥)
다른 두 아이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엄마는 장씨로부터 아이를 건네받고 놀란 가슴을 간신히 쓸어내렸다. 사건 후 아이 아버지가 장씨의 호프집으로 찾아와 감사의 말을 전하며 돈이 든 봉투를 내밀었지만 장씨는 이를 사양했다.
“그 돈을 어떻게 받아요. 그래서 ‘이 사람아, 아이 건강하게 키우는 게 나한테는 더 보람 있는 일이네’ 하고 돌려보냈죠. 그랬더니 나중에 우리 집에 한 번 더 찾아왔더라고요. 그래서 술 한잔했더니 ‘형님’ 그러더라고요(웃음).”

사례금 들고 찾아온 부모, 아이 잘 키우는 데 쓰라며 돌려보내
사건 후 은평경찰서로부터 ‘용감한 시민상’과 함께 포상금 1백만원을 받은 두 사람은 상금도 불우이웃 성금으로 기부했다.
“돈은 먹고살 만큼 있으면 되는 거고 시민으로서 당연히 할 도리를 했는데, 그만한 일로 상금을 받는다는 게 뭣해서 경찰서에다 그냥 알아서 처리해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그건 안 된다고 억지로 쥐여주더라고요. 그래서 동생하고 어떡할까 고민하다가 좋은 일에 쓰자고 뜻을 모았죠.”
한때 불광동 시장에서 닭고기 유통업을 하던 장씨와 고양시에서 가구 매장을 하던 김씨는 각각 2년 전 역촌동에 둥지를 틀었다. 나날이 치솟는 재료비와 인건비 때문에 자영업을 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지만 두 사람은 큰돈을 벌기보단 주변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데 더 관심이 많다. 장씨는 고등학교 시절 길에서 3백만원을 주워 주인을 찾아준 일로 표창장을 받은 적이 있고, 주폭이나 불량 학생 계도에 적극 나서고 있다. 요즘도 새벽 3시 장사를 마치고 귀가할 때는 혹시 수상한 사람은 없는지 아파트 주변을 한 바퀴 돈다고 한다. 김씨 역시 JC(한국청년회의소) 활동을 하며 지속적으로 봉사 활동을 해왔다. 그런 두 사람은 세상이 날로 각박해지는 게 안타깝다고 한다.
“길 가다가 술에 취해 쓰러진 사람이 있으면 의식이 있는지, 혹시 잘못되지 않았는지 한 번 흔들어보고 깨워서 집에 보내거나 경찰서에 신고라도 해야 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냥 못 본 척 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아요. 귀찮고, 괜히 다른 사람 일에 번거롭게 얽히기 싫다는 거죠.”(김현옥)
장씨는 슬하에 아들(21) 딸(19) 남매를, 김씨는 딸 둘(15, 13)을 두고 있는데 아이들이 아빠를 자랑스러워하는 한편으로는 남을 돕는 데 앞장서다가 자칫 화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한다고 말한다. 이번 사건의 범인이 경찰관에게 “두 사람을 꼭 한 번 만나고 싶다”고 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가족들의 불안감이 더 커졌다고 한다.
“집사람은 요즘 내가 집에 안 들어가면 잠을 못 자요. 혹시 밖에서 무슨 일을 당하지나 않나 싶어서요(웃음). 하지만 보복이 두려워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안 할 수는 없죠. 이웃이나 다음 세대인 아이들이 조금 더 안전하고 편안한 세상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든지 위험을 무릅쓸 각오가 돼 있어요.”(장태훈)
장씨와 김씨는 인터뷰를 마치고 장사를 하기 위해 각자의 가게로 돌아갔다. 꽃미남도 꽃중년도 아닌, 어디서나 마주칠 법한 평범한 아저씨들이었지만 그들의 뒷모습은 참으로 멋지고 든든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