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식품·동물생명공학부 임정묵(49) 교수의 전공은 줄기세포의 안전성, 그러니까 사람에게 이식했을 때 안전한지 여부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런 그가 최근 전공과 큰 관련 없어 보이는 ‘좋은 아버지 수업’(좋은날들)이라는 책을 펴냈다. 아이에게 유전학적으로 좋은 형질을 물려주자거나 줄기세포를 이식해 더 나은 형질로 변환시키자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14년 동안 대학교수로서 학생들의 고민과 방황을 지켜보며 아이들이 진정 원하는 일을 찾는 데 아버지가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성찰을 담은 것이다.
공부 잘해도 진짜 원하는 걸 모르는 요즘 대학생들
임정묵 교수의 수업은 학생들에게 양방향으로 간단한 논리를 주고 약간 어려운 질문을 던져 학생들이 스스로 답을 찾아가게끔 하는 강의로 유명하다. 그런 그가 신입생을 위한 전공 탐색이나 교양 수업 때 한 번씩 던지는 질문이 있다. “수능 성적, 내신, 부모님의 권유, 언론 보도, 적성검사 결과 이외의 특별한 이유로 전공을 선택한 이유가 있니?” “자신이 어려서부터 가진 꿈과 지금의 전공 분야가 같은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그가 이런 화두를 던지면 강의실 분위기는 대부분 급격히 썰렁해지기 마련. 본인이 좋아하는 일에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야 할 스무 살 청년들이 아직도 자신들이 왜 그 일을 선택했는지, 또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대답조차 준비돼 있지 않은 것이다. 임 교수는 특히 학번이 낮을수록 본인의 꿈과 동떨어진 전공을 선택한 아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가 대학 진학에 성공한 것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믿지만 아이들의 진짜 고민과 갈등은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학교 다닐 때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공부해서 전교 1등을 독차지했는데 막상 대학에 와보니 주변 친구들이 다 그런 거예요. 학교도 세상도 그리 녹록지 않고, 공부 잘하는 아이라는 정체성도 사라지고, 아이들이 혼란에 빠지게 되죠.”
아이들이 방황하는 건, 그들의 잘못 때문이 아니다. ‘공부만 잘하면 원하는 건 대학 가서 얼마든지 할 수 있다’며 도서관으로 학원으로 몰아넣은 어른들의 책임이 더 크다. 성적이 떨어지면 부모는 아이를 다그치지만 임 교수는 “그러지 않아도 아이들은 성적이 떨어지면 부모에게 가장 미안해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아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면 가슴이 짠해질 때가 많다고.
“‘성공하려면 좋아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 좋아하는 일을 찾으려면 세상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 고로 성공하기 위해선 공부를 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공부시킬 때 부모들이 주로 펴는 논리죠. 장래 희망과 상관없이 무조건 공부부터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꿈을 가진 아이가 공부를 열심히 해 서울대 의대에 갈 실력이 된다면 그땐 어떡하겠습니까? 그래도 아이가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는 각자 좋아하는 분야에서 모두 1등 할 수 있는 아이들을 성적이라는 한 가지 잣대로 1등부터 1백등까지 순위를 매기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 리더가 되면 그 사회는 망하는 거죠”
한때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는 엄마의 정보력, 할아버지의 경제력, 아빠의 무관심이 필요하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씁쓸하지만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막대한 사교육비와 교육관을 둘러싼 부부의 갈등, 아이를 키우는 가정이라면 한번쯤 겪어봤음 직한 일이다.
“저는 그런 말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서울대에는 실제 그렇게 들어온 친구들도 많고 학교생활을 잘 하기도 합니다. 또 공부 잘하는 학생들 멘토 노릇을 하다 보니까, ‘네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라는 식의 이야기가 오히려 공부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부모님 말씀 듣고 그게 옳다고 생각해서 좋아하는 다른 일이 있음에도 이 전공을 선택했는데 그걸 부정하라니, 혼란스러운 거죠.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한 아이들은 충분히 존중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싫다는 아이를 억지로 몰아붙이는 식은 곤란하다는 거죠. 부모들이 주도하는 조기교육 혹은 영재교육과는 다른 차원에서 ‘나는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아이가 생각할 기회와 시간을 충분히 줘야 합니다.”
부모라고 왜 아이를 자유롭게 키우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아이가 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에 나갔을 때 번듯한 직장을 얻으려면 학벌이라는 보험이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아이가 좋고 싫고를 떠나서 어쩔 수 없이 공부를 시켜야 한다. 임 교수는 이에 대해 “부모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생물학적으로 사람마다 다 유전적 소인이 다르거든요. 아이마다 맞는 일이 따로 있고,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다양성이 존재합니까. 집 주위에 병원만 있으면 사는 게 얼마나 힘들겠어요. 병원도 있고, 한의원도 있고, 은행도 있고, 청소부도 있어야죠. 모두가 리더가 되면 그 사회는 망하는 겁니다. 더군다나 요즘은 판사·검사, 의사가 되는 것보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신들린 듯이 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세상이잖아요. 그렇게 바뀌어가는 과정에서 부모가 변화를 두려워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물론 부모의 입장에서 불안할 수 있습니다. 그 불안감은 원시시대부터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멧돼지가 무섭다고 아이에게 사냥을 가르치지 않은 건 아니잖아요. 중세·산업 사회도 마찬가지고, 인류는 그런 불안감과 싸우며 진화해오지 않았습니까.”
1 그의 연구실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는 가족 사진들. 2 3 임 교수는 두 아들에게 친구 같은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한다.
행복과 불행의 양은 누구에게나 똑같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굉장히 좋아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눈이 나빠 초등학교 때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열심히 공부한 덕에 자라서 학문적으로 성공하고 원하는 걸 이뤘지만 그러는 사이 안경 도수는 점점 높아져 갔고, 늘 책상에만 붙어 있었던 탓에 건강도 잃게 됐다. 의사는 그에게 이제 안경을 벗고 주위도 살피고 운동도 좀 하며 쉬엄쉬엄 살 것을 권했다. 그대로 공부를 계속하면 시력을 완전히 잃을 수도 있다면서.’
임 교수가 가끔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의사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더 열심히 공부해 성공을 향해 달려갈 수도 있을 것이고, 안경을 벗고 좀 더 여유로운 삶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학생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슨 일을 선택하든 일장일단이 있다는 걸 일깨워주기 위해서다. 임 교수는 누구에게나 행복과 불행의 양은 똑같다고 말한다. 돈이 많아도 가정이 화목하지 않은 집, 학벌은 좋은데 돈이 없는 집, 모든 것이 완벽한데 가족 중 하나가 아픈 집 등 가정마다 수많은 고민의 조합이 있다.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느냐, 또는 실패나 실의에 빠졌을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극복하느냐가 더 중요한 이유다.
“저라고 왜 좌절이 없었겠어요?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평생의 상처였고, 대학교 때 성적은 겨우 중간이었습니다. 학사 경고를 받은 경험도 있는데, 학생들에겐 살짝 창피하지만 ‘아이들이 저를 보며 희망을 가지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또 몇 년 동안 집착했던 일들이 제대로 되지 않아 엄청난 손해를 보기도 했죠. 인간이니까 공들인 시간이 아깝고, 다른 사람이 그걸 해내는 걸 보면 약이 바짝 올라 잠을 못 자기도 해요. 하지만 지나고 보면 결국 제가 안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또 안 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사람이기 때문에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지만 나이 들면서 점점 원하는 게 안 된다고 버둥거리며 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되더라고요.”
그가 아버지로서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도 바로 그것이다. 삶은 햇볕이 쨍쨍 내리쬐기도 하지만 때로는 세찬 폭풍우가 몰아치기도 한다. 어떤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가도 때로는 쥐구멍에 숨고 싶을 만큼 창피한 일도 생긴다. 이 모든 과정을 부모가 함께하며 일일이 코칭해줄 수 없다면 아이가 길이 아닌 길도 가보고, 일승일패의 세상에 익숙해지기도 하며, 앞으로 조금씩 성실하게 나아가 지난날보다 조금 더 나아진 자신에게 만족하며 사는 법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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