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뒤편에 자리 잡은 소화아동병원은 지난해 외벽을 상큼한 그린 계열로 새로 단장하면서 벽면에 기린 그림을 그려 넣었다. 김덕희(67) 박사가 새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시도한 변화다. 기린은 동양에서는 장수와 건강을, 서양에서는 성장을 의미한다. 연세대 의대 세브란스 어린이병원 원장을 역임한 김 원장은 1996년 대한소아내분비학회를 창립한 국내 소아내분비과의 최고 권위자로, 작은 키 때문에 고민하는 어린이와 학부모들에게 ‘키 박사님’으로 통한다.
김 원장은 “20~30년 전까지만 해도 키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었는데 요즘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키에 굉장히 민감하다”며 말문을 열었다. 특히 아이들의 경우 키로 인해 자신감이 결여되고 이것이 학업 성적으로도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상담을 받으러 오는 아이들 중에는‘어차피 나중에 커서 취업도 안 될 텐데, 공부는 뭐 하러 하느냐’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었어요. 부모는 아이가 사회에 나가 키 때문에 실력에 비해 평가절하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경우가 많고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평균보다 키가 작은 사람은 2명뿐이고, 나머지는 평균보다 크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키가 작은 사람이 큰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하위 경제권에 있다는 보고도 있고요. 키가 성적이나 성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심리적 안정감을 통해 성취도를 높이는 데는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아이가 작아서 걱정인 경우, 언제쯤 병원을 찾는 것이 적절할까. 김 원장은 취학 후 또래보다 키가 작으면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 있고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할 수도 있으므로 부모 중 한 사람이 키가 작거나 조부모 중에서 특히 키가 작은 사람이 있다면 미리 성장 전문가로부터 검사를 받아 성인 키 예상치를 확인하고, 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키는 유전적 요인이 40~60% 정도고, 나머지는 환경적 요인입니다. 성인 예상 키는 부모로부터 균일하게 50%씩 영향을 받는다고 가정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키가 작은 한쪽 부모만 닮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아이가 유전적으로 작을 것이 의심된다면 ‘나중에 크겠지’ 하는 생각으로 무작정 기다리지만 말고 반드시 소아내분비 전문의의 진단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성장 호르몬 치료, 80% 정도 효과 본다
아이에게 이지포드로 성장 호르몬을 투여하는 모습. 이지포드는 주사바늘이 숨겨져 있고 자동으로 용량 조절이 가능하다.
의학적으로 저신장증은 성별, 나이별로 1백 명이 키 순서대로 줄을 섰을 때 3번 이내인 경우를 의미하지만, 요즘은 남자 180cm, 여자 170cm를 기준으로 해서 그보다 작을 경우 상대적으로 키가 작다고 여긴다. 그만큼 키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진 것이다.
성장 치료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성장 호르몬 주사다. 김 원장은 성장 호르몬 치료를 받은 아이 중 80% 정도가 효과를 봤다고 말한다. 이렇게 치료를 통해 키가 쑥 자란 아이들은 성격이 밝아지고 자신감도 높아지는 일석이조의 치료 효과가 있다고 김 원장은 설명한다.
성장 호르몬 치료 시기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간혹 부모들 중에는 아이 키가 다 큰 후에 성장 호르몬 주사를 맞아 추가로 키를 더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사춘기가 지난 후 호르몬 치료를 받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현재는 또래에 비해 키가 큰 편이어도 뼈나이가 많으면 성장판이 일찍 닫혀 결과적으로 성인이 된 뒤 키가 작을 수 있으므로 이 또한 주의가 필요하다.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키가 일찍 큰다고 해서 무조건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그만큼 사춘기가 빨리 오고, 성장도 일찍 끝난다는 의미니까요. 보통 부모들은 여자아이의 경우 초경을 시작하면 사춘기가 왔다고 생각하지만 사춘기의 시작은 가슴이 나오는 것입니다. 초경은 사춘기 중반 이후라고 볼 수 있고요. 남자아이도 변성기나 행동의 변화가 왔다면 이미 사춘기가 어느 정도 진행됐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럼 1~2년 후엔 성장판도 닫힙니다. 성조숙증이 급증하고 있는 만큼 부모의 세심한 관찰과 주의가 필요하고, 사춘기에도 1년에 10cm 이하로 자란다면 치료 받을 것을 권합니다.”
아이의 성장 호르몬 치료를 고민하는 많은 부모들이 부작용 때문에 망설인다. 김 원장은 “성장 호르몬 자체의 부작용은 없다”고 말한다. 다만, 주사를 맞는 모든 아이들이 효과를 보는 것은 아니다. 유전성이 강하거나, 갑상선 호르몬 기능이 저하된 경우, 간 질환이나 전신 질환이 있는 아이는 효과가 없다. 이 때문에 무조건 성장 호르몬을 투여할 게 아니라 반드시 성장 전문의로부터 상담을 받아야 한다.
이 밖에 규칙적인 운동도 키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김 원장은 “운동 전과 후 어린이들의 성장 호르몬 분비 정도를 측정한 결과 트레드밀보다 줄넘기를 한 직후 성장 호르몬 분비가 훨씬 더 활발했다”며 “줄넘기나 점프 등 높이 뛰는 운동이 성장 호르몬 분비를 촉진하고, 무릎과 발목 관절에 자극을 줘 성장을 촉진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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